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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이야기

인자 아주머니

매루 2019. 11. 3. 21:48





2000년대초에 저희 부부는 인천 만수동의 문성여상 교문 그처에서 대형갈비집을 운영 했었읍니다

그때 그 식당의 주방에서 온갖 궂은일들을 도맡아 해주셨던 아주머니 한분이 계셨었읍니다

강원도 정선의 깊고 가난한 동네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갓스므살때에 정선에 있는 탄광의 광부에게 시집을 갔고

슬하에 두명의 사내아이를 두었고  둘째아들이 갓난아이 일적에

그녀의 신랑께서 탄광매몰사고를 당하면서 그녀는 청상과부(婦)가 됩니다

1953년생인 그녀는 홀로 두아들을 키우고 공부 시키던중

2002년 저희부부가 개업을 한 갈빗집의  주방찬모로 들어오면서

저희부부에게 <인자 아줌마>로 불리웠고  그녀와 저희부부의 인연이 시작  되었읍니다




오늘 인자 아주머니께서 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영흥섬을 찾아 오셨읍니다




인자 아주머니는 제 아내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은 사이 입니다






쉬는날을 이용하여 저의 친구인 승권이도 영흥섬을 찾았읍니다

인자 아주머니와 승권이는 저희부부가 만수동에서 갈빗집을 운영 할적에

거의 매일 마주치고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 반가운 사이 입니다





만수동에서 갈빗집을 운영 할적에 제가 민물낚시를 즐기고 민물고기를 즐겨먹던것을 기억하는 인자 아주머니는

낚시광인 그녀의 둘째아들이 틈틈히 잡아놓은 쏘가리와 꺽지를 잔뜩 가져 오셨읍니다




리고 제가 순대국을 좋아하는것을 기억하며 제가 즐겨찾던 순대국집의 포장순대음식을 잔뜩 사오셨읍니다







인자 아주머니



인자 아주머니 강원도 정선이 고향인 인자 아주머니는 젊은 나이에 아저씨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어린 두아들을 데리고

인천으로 오게 되었고 제가 갈빗집을 운영할때 주방의 우두머리 찬모 아주머니 였읍니다

작은 키 이지만 특유의 부지런함과 맺고끊음이 확실한 성격이라 저희 부부에게는 보물같은 존재 였읍니다

아침 10시에 출근하여 밤10시까지 주방에서 쉴틈없이 일하고도 영업이 끝나면 그냥 집에가는법이없었읍니다

거의매일 모여앉아서 집에갈 생각들은 안하고 소주파티를 벌였으니까요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자기가 그때 소주를 너무많이 마셔서 저희 갈빗집이 망했다고 말을 할 정도 이니까요

남편과 사별후 인천에 데려온 어린 두아들은 탈없이 잘 성장하여 아주머니의 든든한 버팀목이요 보람이 되어주었으므로

아주머니는 고생이 어느덧 끝난듯 즐겁게 일을 하고 놀때도 일을 할때만큼 열심히 즐겁게 놀았읍니다

하지만 그녀 에게는 고질적인 무릎관절을 앓고 게시는 고향의 오빠가 항상 걱정이되는 아픔이 있었읍니다

원주기독병원에서 치료를 받을때는 호전되는가 싶어지자 워낙 먼거리의 통원치료가 벅차기도 하여

의사의 말을 안듣고 집근처 병원에 다니면서 상태가 악화 되었던것 입니다

다시 원주기독병원을 찾아왔을때 오빠를 담당하셨던 의사선생님은 이미 다른데로 가신 상태였고

문제는 원주기독병원에서 오빠에 대한 제반 진료나 치료를 거절하는것 이었읍니다 일종의 괘씸죄 였겠지요

항상 밝던 아주머니의 표정이 어두워 지니까 식당전체의 분위기도 덩달아 침체되는것을 느낄수 있었읍니다

한창바쁜 점심시간이 끝난후 잠시 한가한 시간에 아주머니와 단둘이 마주 앉았읍니다

아주머니에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위로의 말을 건넨후

오빠의 인적사항을 적어줄것을 요구 했읍니다 그리고 그다음날 아주대학병원의 친구에게 전화를 했읍니다

저의 고교동창인 현만이는 연대의대를 졸업후 인턴생활을 마치고 캐나다로 2년동안 유학을 떠났고

캐나다 유학을 마친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진료를 시작했던곳이 원주기독병원 이었읍니다

제게 사연을 전해들은 현만이는 "일후야 딱하지않고 급하지않은 환자가 어디있겠냐?"하며

지금 진료를 기다리고있는 환자들이 너무 많이 밀려있으니까 전화를 끊자고 하였읍니다

현만이의 고지식한 태도에 대하여 기분나빠할 필요도 없었지만 내심 아주머니 뵐일이 걱정이 되었읍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일텐데 뭐라고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

그날 저녁 8시쯤이 되어서 현만이로부터 전화가 왔읍니다

"일후야 원주기독병원으로부터 그환자의 진료기록을 팩스로 받아봤는데 내가 아무도움도 안되겠다"라며

의사와의 문제가 아니라 병원쪽과의 마찰 때문에 그런것 같으니까 차라리 서울쪽으로 와서 치료해보는게

어떻겠냐고 제게 말을 하였읍니다 저는 늦은시간에 제게 전화로 이야기해주는 현만이가 고마웠읍니다

그런데 잠시후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제게 달려왔읍니다

"사장님 방금 정선에있는 조카 며느리한테 전화가 왔는데요

원주기독병원에서 오빠에게 내일 입원하라고 연락이 왔데요"하며 기뻐하는것 이었읍니다

순간 제친구 현만이의 모습이 제뇌리에 스크린처럼 스치며 한없이 그가 자랑 스러웠읍니다

원주기독병원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었지만 이미 한국 의학계에서 인정해주는 명의의 반열에 올라선

현만이의 오빠에대한 조회전화 한통에 병원의 태도가 달라진것에 대하여 말입니다

그후 오빠는 거의 정상으로 회복하셨고 아주머니는 때마다 잊지않고 오빠의 안부를 제게 전해 줍니다

전화가 되었든 찾아 오는게 되었든 지금도 수시로 저희집에 드나드는 인자 아주머니는

매년 초겨울 우리식당의 김장때면 저희갈빗집에서 같이 일하다가 아주 친구사이가된 순금이 아주머니와

저희집에 달려와 막걸리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김장 담구는일을 도와준다기보다 직접 하는데

바깥에서 들으면 저집은 여편네들이 대낮에 술쳐먹고 시끄럽게 노래나 부르고있다는 소리를 들을정도로

힘도 안드는지 떠들고 노래하며 척척 손발을 맞추며며 김장을 처리해냅니다

이따금씩 아주머니들과 영흥도엘 가서 친구의 배를 타고 무인도에가서 바지락이나 소라를 캐고 잡는데

영흥도 친구가 이아주머니들에게 <고려자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읍니다

제가 운영했던 갈빗집 상호가 <고려> 였기 때문 이지요

인자 아주머니가 저희 갈빗집에 근무할때 첫손녀를 보게 되는데 그때 그 손녀의 이름을 제가 지어 주었고

두번째 손녀의 이름까지도 또 제가 지어 주었는데 큰손녀 지윤이가 벌써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읍니다

지윤이는 어렸을때부터 저를 <오빠>라고 불렀읍니다

아주머니가 지윤이를 데리고 저희집에 올때마다 맛있는거 사줄때나 지윤이에게 선물을 사줄때마다

저를 오빠라고 부르라고 지속적으로 교육을 시켰기 때문 이지요

마찬가지로 고려자매의 또다른 멤버 순금이 아주머니의 손자 영봉이는 저를 <엉아>라고 부르고요

저는 인자 아주머니가 손녀들을 귀여워 해주는건 좋은데 너무 손녀들에게 매여있어서 속상합니다

다음에 인자 아주머니의 큰며느리를 만나면 다니는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하라고 말을 해야겠읍니다

그래야 영흥도에가서 흐느적 빽댄서 전문 제친구와 <고려자매> 합동공연을 할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인자 아주머니는 지독한 음치 입니다 그래서 노래는 잘하질 않지만 어울리는걸 좋아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자리나 노래방에 가면 인자아주머니는 저에게 <외나무다리>를 신청 합니다

어울리는 모임의 성격에 따라 18번이 다른데 고려자매들 앞에서의 제 18번은 외나무다리 입니다

저는 <외나무다리>노래를 앞으로도 오랜동안 부를수 있으면 좋겠읍니다



<2011년 2월 9일 작성글>












  윤혁민 :작사 / 최창권: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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