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史庫)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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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사고(史庫), 사적 37호,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1910년경의 오대산 사고
이곳은 조선시대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보관하던 사고(史庫)가 있던 자리이다.
오대산 사고는 1606년(선조39)에 이곳이 물.불.바람의 재화(災禍)를 막을 수 있는 길지(吉地)라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역사서를 보관하기 적절한 곳이라 하여 건립되었다.
사각(史閣)과 선원보각(璿源譜閣) 등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타서 모두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92년에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하여 복원된 것이다.
부근에는 역사서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사고사(史庫寺)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초기에 춘추관(春秋館).충주.전주.성주에 1부씩 보관되었으나
임진왜란(1592) 때 전주실록만 내장산으로 옮겨져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버렸다.
1606년(선조39) 3부가 다시 제작되어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 보관되었고,
전주본은 강화 마니산에, 그리고 교정본은 이곳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다.
그후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1624년)으로 인하여 춘추관본.마니산본이 물에 타거나 파손되었으므로,
다시 사부의 실록이 작성되어 강화도 정족산.태백산.무주 적장산.오대산에 1부씩 보관되었다.
오대산에 보관되었던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져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거의 불타 버렀다. <출처:문화재청>
일제 강점기 도서정리사업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를 통해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도서정리사업 또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먼저 일제는 한일강제병합 직전 통감부를 통해
홍문관, 집옥재, 시강원, 북한산 이궁, 강화 정족산 사고 등이 보유하고 있던 도서들을 규장각으로 모았다.
그리고 원래 있었던 규장각 소장 도서들과 함께 ‘제실도서’로 명명하고 면밀한 도서 정리 작업을 실시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총독부 취조국에서 이를 강제로 인수하고 태백산 사고, 오대산 사고, 적장산 사고 등의 도서들도 점유하였다.
이로써 서울의 규장각과 지방의 사고, 외규장각 등으로 철저하게 관리되던 조선 전통의 왕실도서 관리 체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1912년 취조국의 폐지 이후, 일제는 참사관분실 등에서 도서목록작성, 도서카드 작성, 일부 도서 해제 등의 도서정리사업을 수행하였으며,
이러한 작업을 통해 식민 정책 수립의 기초 자료를 구축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월정사 -김홍도 그림
오대산사고 (五臺山史庫) -김홍도 그림
상원사와 적멸보궁을 품은 오대산 중대의 전경.-김홍도 그림
10여 년 전 어느 겨울 나는 우연히 서울의 한 박물관에서 옛 그림 몇 점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1788년 정조의 명을 받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금강사군첩이었다.
한동안 나는 충격으로 인해 그 그림들 앞에서 떠나질 못했다.
그때 내가 본 그림은 평창의 청심대, 오대산 월정사와 전나무 숲, 상원사, 대관령, 그리고 바로 오대산 사고였다.
그 그림들은 너무나 생생했다.
그 그림만 가지고도 옛 사찰의 정확한 위치를 복원할 수 있었기에.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오대산 사고는 전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강원일보의 기사를 보니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궤는 1922년에 주문진항을 통해 일본으로 약탈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대산에서 나와 대관령을 넘었다는 얘기다.
자료를 뒤져보니 1512년 강원도관찰사 고형산이 대관령을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혔다고 한다.
고형산은 세월이 흘러 병자호란 이후 대관령 길을 넓혀 주문진에 상륙한 오랑캐가 한양으로 쉬이 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 길을 일제가 1917년 신작로로 넓혔다.
지금도 대관령 옛길 중턱의 바위에 준공 기록이 남아 있다.
아마 산림자원 수탈이 가장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제는 오대산에서 왕실의궤를 싣고 나와 지금의 월정거리에서 좌회전을 한 뒤 차항, 횡계 대관령을 넘었다는 얘기다.
그 길옆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나로서는 아득하고 아련하지 않을 수 없다.
이효석의 소설에 영서 삼부작이 있는데 `메밀꽃 필 무렵' `산협' `개살구'가 그것이다.
1937년 진부를 배경으로 한 `개살구'에는 그 신작로 얘기가 나온다.
산촌 사람들에게 있어 대관령을 넘어와 신작로를 달리는 트럭은 마치 멧돼지가 씩씩거리며 달려오는 것 같았다고 이효석은 소설에서 밝혔다. 진부의 한 처녀는 오대산으로 나무를 운반하러 온 사내를 흠모해 월정거리까지 걸어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얘기도 있다.
돈 많은 사내는 그 길을 이용해 강릉에서 첩을 데려와 살다가 온 동네에 망신을 떨기도 했다.
그런데… 일제는 300여 년을 오대산 사고에 고이 보관돼 있던 왕실의궤를 그 길을 이용해 훔쳐갔다는 얘기인 것이다.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부끄러움만은 감출 길이 없었다.
다행히 집 떠난 지 89년 만에 조선왕실의궤 오대산본이 6일 돌아왔다.
배를 이용해 주문진항에 도착하고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으로 돌아오는 게 좋겠다고 나름 생각했는데
떠났던 길이 아닌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온다고 한다.
[강원포럼]왕실의궤 오대산으로 와야 하는 이유
2011.12.07자 강원일보
김도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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