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황해도 장연군 본문

나, 가족 이야기

황해도 장연군

매루 2024. 1. 12. 03:42

 

 

 

 

 

 

 

 

 

1952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옛 장연군의 북부 반가량인 장연읍을 비롯하여 용연면(龍淵面)의 일부와 순택면(蓴澤面)·신화면(薪花面)·낙도면(樂道面)으로 개편되었다.

현재 황해남도 서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삼천군, 남쪽은 용연군, 북쪽은 과일군, 서쪽은 황해에 접하여 있다. 동경 124°51′∼125°13′, 북위 38°09′∼38°21′ 사이에 있으며, 면적 406. 8㎢, 인구 6만 7200여 명이다.

행정구역은 장연읍과 낙연노동자구, 산천(山川)·명천(明川)·화원(花源)·청계(淸溪)·박산(礡山)·산수(山水)·학림(鶴林)·눌산(訥山)·창파(蒼波)·샘물·광천(廣天)·금사(金寺)·백촌(白村)·추화(秋花)·삼산(三山)·세마(細馬)·낙흥(樂興)·석장(石長)·선정(仙亭) 등 19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장연읍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여지도서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1970·1981)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1981)

『한국고고학지도』(한국고고학회,1984)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1993)

주석

주01

지금의 해주

집필자

개정 (1995년)

이한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장연군(長淵郡))]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황해도/해주목/장연현(長淵縣)

(세종실록 152권,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장연현)

현재- 황해남도(黃海南道) 장연군(長淵郡), 용연군, 대탄군 일대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재편하였을 때 해주부 장연군이 되었고,

1896년 13도제가 시행되자 황해도 장연군이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해안면, 대구면과 용연면의 13개 리가 용연군에 편입되었고, 목감면·속달면·후남면이 태탄군에 편입되었으며,

순택면·신화면·장연면·낙도면의 전체 리와 용연면의 2개 리, 송화군 연정면(蓮井面)의 2개 리, 운유면(雲遊面)의 1개 리를 통합하여 황해도 장연군으로 개편되면서 1읍 20리를 관할하였다.

1952년 12월에 송경리가 낙연노동자구(樂淵勞動者區)로 개편되었고,  ㅎ해ㅇ여연군구

 

 

 

 

 

 

 

 

 

 

 

 

 

 

 

 

 

 

 

 

 

 

 

 

 

 

 

 

 

 

 

 

 

 

 

 

 

 

 

 

 

 

 

 

 

 

 

 

 

 

 

 

 

 

 

 

 

 

 

 

 

 

 

 

 

 

 

 

 

 

 

 

 

 

 

 

 

 

 

 

 

 

 

 

 

 

1954년에 황해도가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분도되면서 황해남도 장연군으로 되었다.

 

동쪽으로 해주 경계까지 56리, 남쪽으로 해안까지 40리, 서쪽으로 아랑포(阿郞浦)까지 47리, 북쪽으로 풍천부 경계까지 25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장연(長淵)인데, 신라와 고려에서 모두 옛 이름 그대로 하였다. 현종(顯宗)조에 옹진현에 속하였으며, 예종(睿宗)조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조 원년에 만호를 두어 감무를 겸하게 하였으며 태종 2년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후에, 영강현을 병합하여 연강(淵康)이라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각각 예전대로 하였다. 세종 5년에 병마사로 고치고, 첨절제사를 삼았다가, 후에 현감으로 하였다.

(세종실록 152권,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장연현)

옛 해안현(海安縣)은 

 때 현령(縣令)을 두었는데, 의 침입으로 인하여 없어지고, 홍무(洪武) 16년 계해 에 (靑松)에 붙이었다가, 태종(太宗) 병신(丙申)에 이 지역이 〈본현(本縣)〉 서쪽 지경으로 넘어 들어왔다 하여, 혁파하여 본현의 직촌(直村)을 삼고, 그 아전과 노비(奴婢)는 송화(松禾)에 붙이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 참고 -​

도호부로 승격된 후에는 3품 문·무관이 교대로 임명되었다.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70명, 아전 30명, 지인 13명, 사령 20명, 군뢰 4명, 관노 2명, 관비 11명이 있었다.

1771년(영조 47)부터 장연도호부사는 수군영장을 겸하면서 장산곶 이북의 장연, 풍천, 은율, 장련, 안악 5개 읍의 수군 조련을 담당하였다.​
【군명】 장담(長潭)ㆍ연강. 

(세종실록 152권,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장연현)

호수가 9백 64호요, 인구가 2천 1백 단(單) 4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0명이요, 영진군이 1백 84명이요, 선군이 2백 단(單) 9명이다.

이 메마르며,

기후가 일찍 춥고,

풍속이 잠상(蠶桑)과 어염(魚鹽)으로써 생리를 삼는다.

간전(墾田)이 1만 6천 6백 68결(結)이요, 【논은 9백 4결뿐이다. 】

토의(土宜)는 벼·피·조·콩·보리·팥·메밀·참깨·삼이다.

토공은 꿀·노루·사슴·고니[天鵝]·여우·삵괭이가죽·상어·말린 숭어·물고기 기름·황각·느타리·자리·종이·족제비털[黃毛]·지초요,

약재는 병풍나물뿌리[防風]·단너삼뿌리[黃耆]·흰바곳[白附子]·도아조기름[島阿鳥油]이다.

구리쇠가 현의 동쪽 15리 점석동(粘石洞)에서 난다. 【금상(今上) 7년에 비로소 구리를 불려서 바쳤는데, 매해 50근이다. 】

염소(鹽所)가 1이요, 【가마가 3이다. 】

어량(魚梁)이 2곳이요, 【주로 청어·고등어가 난다. 】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현의 동쪽 27리 장족리(長足里)에 있다. 【하품이다. 】

백령도(白翎島)가 현의 서쪽에 있다.

【물길이 70리인데, 나랏말 1백 70필을 놓아 먹인다. 예전에는 혹도(鵠島)이라 하였다. 】

성씨 

본현: 문(文)ㆍ노(盧)ㆍ장(張)ㆍ변(邊)ㆍ임(任)

이ㆍ경(景)ㆍ임(林)ㆍ김 모두 내성(來姓)이다. 

해안(海安): 송ㆍ조(趙)ㆍ오(吳)ㆍ노(盧) 모두 속성(續姓)이다.

(세종실록 152권,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장연현)

토성(土姓)이 5이니, 문(文)·노(盧)·장(張)·변(邊)·임(任)이요, 

내성(來姓)은 이(李)·경(景)·임(林)이며, 【지금 모두 없다. 】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지금 아전이 되었다.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장담김씨(長潭金氏)

김의립(金義立) 거주지 미상(未詳) 전공 한학(漢學)

[역과] 인조(仁祖) 17년(163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7위(15/18)

장담문씨(長潭文氏)

장연김씨(長淵金氏) 시조명 김정신(金鼎新)

장연노씨(長淵盧氏) 시조명 노구(盧坵)

장연변씨(長淵邊氏) 시조명 변유령(邊有寧)

장연임씨(長淵林氏)

장연장씨(長淵張氏)

해안노씨(海安盧氏)

해안백씨(海安白氏)

해안최씨(海安崔氏)

【산천】

괴림산(槐林山)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오반산(五盤山)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천일사(千日寺).

석봉산(石峯山)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영남사(永南寺)ㆍ석봉사(石峯寺).

불타산(佛陁山)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견불사(見佛寺)ㆍ천불사(千佛寺)ㆍ해림사(海林寺). 자비사(慈悲寺)ㆍ해림사(海臨寺)ㆍ칠봉사(七峯寺).

장산곶(長山串) 고을 서쪽 64리에 있다. 장산곶사(長山串祠).

대청도(大靑島) 고을 남쪽 30리 바다 가운데 있다. 소치는 목장이 있다.

소청도(小靑島) 대청도 동쪽에 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면 대청서(大靑嶼)ㆍ소청서(小靑嶼)로 되어 있는데 곧 이것이다. 《고려사》지리지에, “백령진(白翎鎭)에 대ㆍ소청 두 섬이 있다.” 하였는데, 지금은 백령도도 고을 경계 안에 들어 있다. 백령도 대청도 서쪽에 있으니 옛날 백령진이다. 강령현(康翎縣) 연혁 조에 자세하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나라에서, 적당(賊黨) 탑야속(塔也速)을 여기로 귀양보내었다. 목장이 있다.
남대천(南大川)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송화현 수회천(水回川)의 하류로서 고을 서쪽 10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조니포(助尼浦)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용정(龍井)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끌어서 논에 물대는데 가물면 비를 빈다.

대곶량(大串梁) 고을 남쪽 63리에 있다. 오차포(吾叉浦)의 옛 영(營)이 있었다.

안심사(安心寺) 미라산에 있다.

곡서사(鵠棲寺) 괴림산(槐林山)에 있다.

【토산】

사(絲)ㆍ삼[麻]. 동철(銅鐵) 진석동(眞石洞)에서 난다. 철(鐵) 동라곶(冬羅串)ㆍ길곶(吉串) 두 곳에서 난다. 상기생(桑寄生) 대청(大靑)ㆍ백령 두 섬에서 난다. 곽(藿)ㆍ사곽(絲藿)ㆍ녹각교(鹿角膠)ㆍ청각(靑角)ㆍ황각(黃角) 참가사리(細毛)ㆍ소라(少螺)ㆍ홍합(紅蛤)ㆍ은어[銀口魚]ㆍ청어(靑魚)ㆍ전복[鰒]ㆍ상어[鯊魚]ㆍ맛조개[竹蛤]ㆍ숭어[季魚]ㆍ꿀[蜂蜜].

【성곽】

읍성 돌로 쌓았다. 둘레가 5천 7백 25척이요 높이 13척이며 안에 우물 세 곳이 있다.

【관방】

오차포영(吾叉浦營)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 수군만호 1인.

아랑포영(阿郞浦營)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 수군만호 1인.

【누정】

진서루(鎭西樓) 객사 동쪽에 있다.

남문루 곧 성의 남문루이다.

【역원】 

신행역(新行驛)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금동역(金洞驛) 고을 동쪽 45리에 있으니 영강현(永康縣) 옛 터이다. 

광천원(廣淺院)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신증』 

장동원(長洞院) 고을 북쪽 35리에 있다.

【고적】

대청도(大靑島)

고려조 충숙왕(忠肅王) 4년(1317)에 원나라에서 위왕(魏王) 아목가(阿木哥)를 여기에 귀양보냈다가 10년에 소환하였으며, 11년에 발라태자(孛剌太子)를 여기에 귀양보냈다가 16년에 소환하였으며, 17년에는 도우첩목아(陶于帖木兒)를 여기에 귀양보냈다가 후원년(後元年)에 소환했는데 그들의 거처하던 집터가 아직도 있으며, 목장이 있다.

웅침리 목책(熊沈里木柵)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고영강(古永康) 고을 동쪽 50리에 있다. 

해안폐현(海安廢縣)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고려 때에 현령을 두었는데, 후에 청송현(靑松縣)에 예속하였으며 본조 태종 16년에 그 지역이 본현(本縣) 서쪽 경계에 넘어 들어왔다 하여 본현에 예속하고, 직촌(直村)을 삼았으며 그 주민과 아전은 송화현에 예속하였다.

두견산고성(杜鵑山古城)

고을 북쪽 4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2백 88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인물】 

고려 문정(文正) 문인위(文仁渭)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광해주 계해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영조 40년에 현감으로 강등시켰다. 왕제둔(汪濟屯) 백성이 둔감(屯監) 김상념(金相念)을 묻어 죽였기 때문이다. 

44년에 수군영장(水軍營將)을 겸하였다 장산(長山) 이남 오읍(五邑)ㆍ삼진(三鎭)의 수군을 나누어 다스렸다. 

49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순조 25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방면】 

낙산(樂山)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목감(牧監)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속달(速達)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설산(雪山) 서쪽으로 끝이 10리이다. 

후강(朽舡)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남읍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본읍 옛 터인데 불타산(佛陁山)의 남쪽에 있다. 

해안(海安)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90리이다. 

순택(蓴澤) 동북쪽으로 30리이다. 

신곡(薪谷) 서북쪽으로 60리이다. 

추라(秋羅) 서남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40리이다.

동라(冬羅)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대곶(大串)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성지】

읍성(古邑城) 남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는데 남은 터가 있다.

고행성(古行城) 불타산 위에서 장산곶(長山串)까지 산 허리를 따라가며 혹은 돌로 쌓고 혹은 흙으로 쌓았는데, 군데군데 남은 터가 있다.

【진보】 

조니포진(助泥浦鎭) 

서쪽으로 60리 장산곶의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금사(金沙)와 20리, 남쪽으로 오차(吾叉)와 20리, 동쪽으로 용정(龍井)과 20리인데, 옛날에 별장이 있었다. 숙종 37년에 아랑포(阿郞浦) 만호를 내합(來合)하였다. 

○ 수군만호 1인. 금사사보(金沙寺堡) 승장(僧將) 1인. 

추포방소(追捕防所) 

무수룡포(舞睡龍浦) 남쪽으로 65리, 동령포(東令浦) 서북쪽으로 55리, 쾌암포(快巖浦) 서쪽으로 50리이다. 오차포(吾叉浦)ㆍ조니포(助泥浦)ㆍ백령포(白翎浦) 이상 여섯 곳에는 추포무사(追捕武士)가 있다. 

○ 오차포ㆍ백령도ㆍ도사내도(島乃島)는 모두 요망장졸(瞭望將卒)이 있다. 

요망(瞭望) 24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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