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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족 이야기

선감도, 터미섬 <임삐용의 천국>

매루 2022. 11. 27. 21:40

임삐용의 천국(선감원  또는 선감학원)

일제 시대 말기(1941년)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의해 선감도에 세워진  소년수용소로

1982년까지 약 40년 동안 운영 존재  하였었고(원아대장에 따르면 인원이 4,691명에 달함)

지금은   경기창작센터로 바뀌었으며 인근에는 당 시설의 비극적인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선감역사박물관이 있읍니다

 

1943년 선감학원 야외교육 장면

 

 

 

IMF시절 이었던 1998년도에 저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을 종종 찾아 갔었읍니다

그때 그곳에서  우연히 읽게 되었던 <임삐용의 천국> 이라는 책이 있었읍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책 이기도 했지만

저는 한때(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2학년) 인천 용현동 낙섬에 있었던

부랑아 보호시설의 원생들과 함께 지낸적이 있었읍니다

그들은 선검도의 원생들과 똑같은 처지의 부랑아들 었기에

이책을 읽으면서 남다른 공감과 안타까움을,,,,

그리고 지금은 소식을 알수없는 원생들이 그리워 쟜읍니다

 
 

저자 최건수 | 타임기획 | 1993.5.1.

 

이책속의 실제 주인공인  임용남은 7살이란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림받고 뒷골목에서 방황을 하다가

소년 범죄자들을의 강제수용소인  선감도에  있었던 선감원의 원생으로 강제수용된후

불법 감금 상태에서 강제노역과 가혹행위에 시달렸읍니다

추위와 허기 속에 낮에는 고되게 일하고 밤에는 기합을 받으며

매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죽은 아이들이 허다했읍니다

임용남은 여러 차례 걸쳐 섬에서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때마다 모진 고통을 감수해야 했지만

 포기 하지 않고 8번째 탈출시도끝에 성공을 합니다  

 

무기징역수인 ‘빠삐용’이 인권유린, 강제노역 등이 이어지는 감옥 속에서도 탈옥을 시도하지만

잡히고, 다시 탈옥을 하는 과정이 임용남과 흡사하기에  

이책의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을 ‘임삐용의 천국’이라고 지었읍니다

 

 

선감학원은 1942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경기 안산의 외딴섬 선감도에 세운 소년 강제수용소다.

부랑아들을 교화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빈민층 아이들을 쓸어담아 가두는 만행이었다.

문제는 광복 직후 경기도가 이 시설 운영을 맡아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까지,

원생 연인원이 5000명 넘도록 같은 일을 계속했다는 점이다.

부랑아는 도시 미화,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사라져야 할 존재로만 취급됐다.

그런데도 1990년대 들어 일본인 목격자 이하라 히로미쓰가 선감학원의 실상을 폭로하기 전까지

우리는 아이들이 목숨을 걸고 그곳을 탈출하려 했던 이유를 알지 못했다.

공권력이 저지른 심각한 아동 납치 범죄와 인권침해에 모두가 눈을 감았던 것이다.

일제의 만행을 답습하면서도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던 것이라 더욱 부끄럽다.

 

 

1967년 가을날 맹아산 부랑아보호시설의 원생들

흰점퍼 차림의 안경을 쓰고 게신분이 저희 아버지(당시 맹아산의 부랑아보호시설 책임자),

검은양복차림의 고선생님 께서는 재미있는 진행으로 어릴적 저희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켜주셨읍니다 

 

 

 

 

간척종합개발사업이 시행(1987년)되기  이전의 대부도와 선감도일대의 모습

시화방조제 (2015년)

길이 11.2 km. 농어촌진흥공사가 대단위 간척종합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1987년 6월부터 1994년 2월까지 6년 반에 걸친공사 끝에 길이 11.2 km의 방조제가 완공 되었읍니다

 

 

 

 

시화호 개발사업을 실시함으로써 주변의 섬들을 연결하는 방조제가 건설되었고

도로를 개설하여 동쪽의 화성시 서신면에서부터 탄도·불도·선감도를 거쳐 대부도까지 모두 연륙되었다.

대부도와 선감도는 하나의 섬으로 통합되었읍니다.

 

 

 

 

몇일전에 오토바이를 타고 선감도를 둘러보았읍니다

지금은   경기창작센터로 바낀 옛 선감원

 

 

 

 

 

 

 

 

 

 

터미섬

섬에 소나무가 우거진 모양이 사람 머리털처럼 생겨서 털미섬이라 했던 것이 와전되었다.

 

소설<임삐용의 천국>에서  수차례 선감도 탈출에 실패했던 주인공은 

어느날 고참원생에게서 사리때면 터미섬쪽으로 육지인 송산을 걸어서 건널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사리물때를 맞추어 마침내 선감도 탈출에 성공을 합니다

 

 

 

 

 

에코 뮤지엄의 아픈 컬렉션, 선감도

 

서정문 경기창작센터장

 

2003년 안성만세고개 조각공원 조성사업을 담당했었다.

극일(克日)·평화(平和)·공존(共存)을 테마로 하는 작품 10점을 공모하여 설치했다.

안성3·1운동기념관 정문에 들어서면 왼쪽에 ‘잠기다’라는 제목의 작품(작가 천성명)이 있다.

마치 죄수복 같은 물방울 무늬의 옷을 입고 쪼그려 누운 사람의 몸을 뚫고 식물이 자라나는 괴기스러운 모습의 작품이다. 일제의 폭압에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민중의 삶을 묘사했으리라…

10여년이 지난 지금, 경기창작센터가 위치한 ‘선감도’에서 이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된 것은 무슨 조화일까?

일제 조선총독부는 부랑아들을 교화시키겠다는 명목으로 1942년 선감도에 ‘선감원’을 세웠다.

10대 소년 수백명을 잡아들였으며 독립군 자손들도 그 곳에 수용되어

교관들의 엄격한 통제 속에 군사훈련에 강제노역을 당하다가 병들어 죽기도 하고,

일부는 고문과 굶주림과 학대, 그리고 노역에 지쳐 탈출을 시도하다 갯벌에 빠지고 조류에 휩쓸려 죽어갔고

그 어린생명들은 비석 하나 없는 선감원 인근 야산에 매장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 당시 선감원 부원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8살 때 선감도에서 2년간 생활을 했던

이하라 히로미츠씨가 “아! 선감도(井原 廣光, 1989)”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부터다.

해방 이후에도 ‘선감학원’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잡혀온 아이들의 생활은 1982년도 폐쇄되기까지 그대로 이어져

우리의 청소년들은 역사의 질곡을 헤매다 끊임없이 죽어갔다고 한다.

70년대 초반 수용되었던 주인공(임용남)의 실화를 다룬 “임삐용의 천국(최건수, 1993)”,

「사건내막」이라는 인터넷 주간지에 2014년 말까지 연재되었던

소설 “지옥극장-선감도 수용소의 비밀(김영권, 2015)” 속에 당시의 모습이 생생히 증언되어 있다.

그동안 죽어간 어린생명들이 묻힌 묘지마다 그 위에 수십년간 자라난 나무들을 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바로 내가 천성명의 작품에서 본 그대로였던 것이다.

지난 어느 날 선감학원출신 생존자들이 안산시에 요구하여 일부 나무들이 베어졌다.

주변마을 사람들은 땔감용으로 그 나무들을 가지고 갔다.

어린 생명들의 뼈와 살을 먹고 자란 나무로 밥을 해 먹는 것이다.

보다 못한 생존자들이 경기창작센터에 일부 베어진 나무들을 갖다놓았다.

언젠가는 뜻있는 작가를 만나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어 묘지동산에 세워질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묘지 위의 그루터기에서 다시 새가지가 솟아나 숲을 이루어 가고 있다.

생존자들 일부는 그들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쳐다보기도 싫고, 꿈에서도 발을 들여놓고 싶지도 않은 이곳을 가끔씩 방문한다.

해방 70주년을 맞이하는 8월에는 선감학원 생활을 숨기고 살아왔던 생존자들

몇몇이 가족을 이끌고 와서 하룻밤 묶고 가겠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당시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떨쳐버리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하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후벼 파지는 가슴을 안고 나는 오늘도 아침저녁으로 그들의 주검들이 집단적으로 묻혀있는

다시 숲이 되어가고 있는 묘지동산을 지나친다.

 

2015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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