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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족 이야기

전통과 저항의 고장 장연長淵

매루 2024. 1. 11. 18:25

 

 

문효성의 고향 『전통과 저항의 고장 장연長淵』
 
김우추천 1조회 2123.08.28 22:12댓글 3
 
 
문효성/실향민
  *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제 고향은 황해도 장연(長淵)입니다. ‘장연’이라면 그곳이 어디지? 하고 궁금해하는 분이 많을 겁니다.
저는 1934년생으로 2023년 현재 89세가 됩니다. 나이 16살 때 북한이 공산주의 세상이 되는 바람에 부모님의 강력한 뜻에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어찌어찌하다가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법대서를 하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인천으로 올라와 한국 판유리를 다녔습니다. 26세에 지금의 아내를 중매로 만나서 결혼하였는데 아내는 지금도 연로하고 힘이 빠진 저의 곁을 굳건히 지켜주고 있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1979년에는 석바위 사거리에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당시 교회는 개척하자마자 어린이로 차고 넘치게 부흥하였는데 이때 큰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지금 제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헛되이 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보람과 자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모든 것이 그립고, 아쉽고, 애틋한데 유독 가보지 못한 유년기의 고향 산하가 많이 생각납니다. 지금 이 글도 온전치 못한 정신력과 기억을 되살려 필사적으로 지난날의 추억들을 생각해 내는데 아내와 아들이 평소 저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회상시켜 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제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사회시간에 재미있는 것을 배운 것이 생각납니다.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라는 대표 고장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고,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라는 식입니다. 제가 태어난 고장 황해도는 지역의 대표적인 고장인 황주(黃州)와 해주(海州)의 첫 글자로 이름이 정해진 것을 알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태어난 장연이 이름에 포함되지 않아 저의 고향이 아주 작고 조그마한 고장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황해도 중에도 장연이란 곳은 많이 생소한 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백령도도 1895년에는 황해도 장연군에 속한 섬이었습니다.
 
* 장연의 여러 배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제 고향 장연은 고구려 때부터 장연이라고 불린 오랜 역사를 가진 곳입니다. 통일신라 때는 해주부에, 고려 시대에는 옹진군에 속했다고 합니다. 조선 때는 도호부로 승격, 현으로 강등, 7다시 부로 되었다가 1895년(고종)에 군으로 확정되었습니다.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자연환경으로는 대부분 지역이 5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와 평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남대천이 비교적 큰 강으로 서해로 흐릅니다.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롭습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 · 은 · 아연 · 납 · 구리 · 철 · 인회석 등이 풍부하여 낙연광산과 장연광산을 중심으로 광업이 활발합니다.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살기가 좋습니다.
산업과 교통을 살펴보자면, 경지면적은 군 면적의 40%이며, 주요 농산물은 쌀 · 옥수수 · 콩 · 밀 · 보리 · 수수 · 잎담배 · 깨 · 박하 등입니다. 여러분들이 소설 장길산을 통해 잘 아는 몽금포의 장산곶을 연결하는 도로가 장연읍에서부터 주욱 나 있습니다. 문화와 관광 면을 살펴보면, 패불사 · 해림사 · 자비사 · 칠봉사 등의 많은 사찰이 있다 하여 이름 지어진 불타산이 유명합니다. 황해도 장연의 꼭두각시놀음도 유명합니다. 모두 무도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당시 지배계급의 타락과 승려의 부패를 폭로하며 조소하는 풍자극입니다.
 
* 소래교회를 아십니까?
 
 


장연군의 자랑인 소래교회를 소개합니다. 소래교회는 장연교회로도 불립니다. 아마도 장연군에 위치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소래교회는 1883년에 설립되었는데,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로 지어진 한옥교회이자 교인들이 스스로 자력으로 지은 최초의 교회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큽니다. 소래교회는 서경조, 서상윤 형제 등 조선 최초의 개신교 목사 7인이 세운 교회입니다.
소래교회 자리는 한 이름 모르는 과부가 기증한 무당의 집터 위에 세운 교회당입니다.
소래교회, 혹은 솔내교회(松泉교회)라고 불렸는데 아마도 솔내교회에서 ‘ㄹ’자를 빼고 소래교회라고 불린 것 같습니다. 건축양식도 앞에서 얘기했듯이 우리나라 전통양식인 기와집 형식으로 지어서 은근히 민족적인 뿌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장연군의 자랑인 소래교회는 최초로 우리 한국인의 손에 의해 건축되고 최초의 장로 장립(長老 將立), 그 당시 민족종교였던 동학(東學)과의 상생, 해후 등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교회입니다. 소래교회가 배출한 사람들로는 노천명 시인, 국보 양주동, 김필례 여사 등이 있습니다. 얼마 전 작고한 김양겸 여사(1921~2022)는 성황신을 모신 백령도로 시집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백령도에 천주교의 싹을 틔운 신앙인으로 자연인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래교회 출신인 저는 어린 시절 소래교회 주일학교를 다녔습니다. 필자의 아버지인 문택준 님은 독립지사이었습니다.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황해도 송화교화소에서 2년간 투옥 생활을 하는 등 우리 민족의 정신을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하신 분입니다. 광복 이후에는 바닷바람 세고 거친 백령도에 방풍림을 조성하여 그 공로로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한 분입니다.

* 나이 들어 고향을 찾았습니다
저는 기억이 희미하고 기력이 떨어진 지금까지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 왔습니다. 평소에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장서가 있었습니다만 얼마 전 다 처분하여 지금도 섭섭한 마음이 큽니다. 쓰는 것도 좋아하여 집의 벽이나 심지어 천장까지 닥치는 대로 낙서를 하였는데 이것이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였다는 자식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읽은 책 중에 좋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자연히 외우게 되었습니다. 즐겨 암송한 것들은 구약의 아가서(雅歌書)와 윤동주의 서시(序詩) 등입니다. 왜 이렇게 외우고, 기억하고, 담아두었다가 꺼내기를 좋아하였나를 생각하니 아마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에게 생명을 준 고향 땅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 그리고 흙과 바람, 산과 들에서 같이 살아온 사람들로 기억되는 본향에 돌아가고픈 마음이 그토록 컸나 봅니다.
 
 
 
댓글
  •  
    작성자 23.08.28 22:25

    첫댓글 문효성님은 안타깝게도 금년 2023년 7월에 돌아가셨습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평생을 가슴앓이한 한 실향민의 명복을 빕니다.

  •  
     
    작성자 23.08.29 20:34

    長淵敎會는 소래교회·솔내교회(松泉敎會)로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교회로서 서상륜(徐相崙)이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교향 장연에 세웠습니다. 건립과 운영을 자급자족하였고, 건축양식도 기와집의 전통적 가옥 형태를 취했습니다. 후에 선교사들이 이 교회를 방문하여 한국인 주도의 교회생활과 학교교육 등을 관찰하기도 했습니다. 1888년 인도의 대기근 때에는 큰 금액의 구제금을 보낸 일도 있습니다. 1895년 동학도들이 몰려와 교회가 위험하기도 하였지만, 캐나다의 선교사 매켄지(Mckenzie, W. J.)와 한국교인들의 복음증거로 1만여 동학도와 우호적 관계가 맺어져 이 지방의 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소래교회는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최초의 장로 장립, 동학과의 해후 등이 이루어진 역사적 교회입니다. 김명선(金鳴善)·노천명(盧天命)·김필례(金弼禮)·양주동(梁柱東) 등이 이 곳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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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23.08.29 20:43

    김필례여사는 정신여고 교장인 김마리아 여사의 고모로 김마리아를 위시한 근대 한국여성들의 신문물과 독립의식을 조직하고 교육한 시대를 앞서간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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