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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인천 전도관

매루 2023. 1. 16. 20:51

 

 

인천전도관이 생기기전에 그곳에 있었던 알렌 별장

호러스 알렌( 주한 미국 총영사·대리 공사재직기간 1884년∼1905년)이 

1890년 고종황제의 땅 옆(숭의동 107번지 인근)에 지은 여름 별장

 

 

 

알렌 골짜기(AllenDale)

2022년 2월 2일자 기호일보(인천의 역사를 찾아서)

 

 

알렌이 한국에 왔던 1884년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이 발생했는데,

이때 부상당한 민영익을 고친 것이 인연이 돼 알렌은 고종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됐다.

이후 왕실의사 겸 고종 황제의 정치고문이 됐다.

고종은 고마움의 표시로 서울 재동에 있는 개화파 홍영식의 집을 주고,

1885년 4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을 설립하게 했다.

알렌의 한국에서의 외교 및 정치활동은 1890년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됐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열강들의 이권쟁탈전이 벌어지던 시기였는데,

알렌은 고종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 미국인들이 이권사업을 따는 데 유리했다.

운산광산 채굴권(1895), 경인철도 부설권(1896) 및

전차·전등 등에 관한 전력회사의 설치권(1897)을 미국에 넘겨주는 역할을 했다.

알렌은 22년간 한국에 머무르다가 1905년 조선을 떠나 고향인 오하이오주 톨레도에 정착, 향년 74세로 타계했다.

숭의동에 알렌별장이 왜,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정황상 경인철도가 부설되는 1897년 전후로 추측된다.

더구나 별장 건축 비용 문제에서도

미국의 외교관 신분이었던 알렌은 주변 사업가의 주식을 단 한 주도 소유할 수 없었음에도

고향인 톨레도의 회사 두 곳에 투자했던 점 등에서

각종 이권사업을 알선해 준 것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런 것이 알렌별장을 건축하는 비용으로 사용됐으리라 추측된다.

알렌별장은 현재 전도관 자리, 창영동 쇠뿔고개로 불리는 곳에 세워졌는데,

경인철도가 이 별장 앞을 경유해 지나갔고 그를 위해 우각리역이 조성됐다고 전해진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이 지역을 ‘알렌 골짜기(Allendale)’라고 불렀다.

별장은 흰색 2층 서양식 건물로 한 모퉁이를 둥근 탑으로 쌓아 올린 작은 돔 형식이었는데

‘공사집’, ‘의사집’, ‘이명구(이완용 조카) 별장’, ‘서병의(서상집의 아들) 별장’ 등으로 불리면서 소유주가 바뀌어 갔고,

뒤에는 이순희의 계명학원이 있다가 1956년 인천전도관이 지어졌다.

한때 인천을 휩쓸었던 이 교회는 계파 갈등으로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기도 했는데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1978년까지 무려 20여 년간이나 이 자리에 있었다.

인천전도관이 떠난 후 잠깐 공장이 들어서기도 했으나, 이곳에 마지막까지 자리했던 것도 교회당이었다.

최근에는 전도관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이 터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들이 일시에 사라질까 안타까운 마음이다.

 

 

1897년으로 추정

교통탑 오른편 멀리 보이는 건물이 알렌씨의 별장입니다.

아마 이 사진 촬영 직후 헐리고 전도관이 들어서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거의 지금 보이는 별장 건물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오른편 트럭이 가는 도로는 경인로입니다.

 

1956년 7월로 추정

 

‘불의 사자’, ‘동방의 의인’이라 불린 박태선 장로의 한국예수교 전도관 부흥협회가

 ‘공사집’, ‘선교사 집’으로 불리던 건물을 헐고 그 자리(1천700여 평)에 1957년 10월 전도관을 세운다. 

1978년 전도관은 이곳을 떠났다. 

. 1984년 이 자리에 예루살렘교회가 들어섰다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의 3루쪽 덕아웃..공사가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전도관이 완공된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아..(사진 왼편 윗쪽 전도관 건물에 종탑이 아직 안보임))

1956년 사진으로 보입니다.

 

 

 

전도관의 전체건물중 우측 종탑부분의 공사가 진행중입니다

숭의동 109번지는 흔히 ‘전도관 동네’라고도 불리웠는데

1957년 10월 ‘불의 사자’, ‘동방의 의인’이라 불린 박태선 장로 중심의 종교단체인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가

산 정상에 전도관을 세우면서 얻게 된 이름이다.

이사진의 촬영년도를  1957년 또는1958년으로 보는 까닭은

전도관 건물의 종탑쪽만 2층으로 되어있고 나머지 지붕은 아직 1층인것 입니다

 

 

 

 

 5,6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신축 인천전도관은  사방팔방 뚫린 숭의동의  산 위에

1956년 12월 25일 10월 중순에 기공하여  28일 하오 7시에 낙성집회를 갖습니다 

 

 

사진 왼쪽 윗편에 전도관이 보입니다(1966년) 

1964년 인천에서 전국체전이 열리는 것을 계기로

야구장과 육상경기장 관람석을 다시 만들고..정구장은 없애고 대신 보조경기장을 만들어

농구나 배구경기를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육상경기장 위쪽 왼편에..도원극장이 보입니다

 

숭의동 로타리(1978년)

인천의 대표적인 교차로 숭의로터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도관

 

 

 

2020년 초반

 

 

2022년 9월 13일

 

 

 

 

박태선 (1917~1990) 평남 덕천출신

1955년 1월 무학교회를 시작으로 서울 남산, 부산, 한강 백사장 집회를 인도하면서 부흥사로 활동

 1956년 1월 한국예수교부흥협회를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로 개칭하였고, 부흥 집회와 전도관이 전국 각지에서 개관되었다. 같은 해 11월 11일  박태선을 감람나무로 추대하는 행사가 거행되었다.

1957년 경기도 부천의 약 49만 5000㎡[15만 평] 부지에 소사신앙촌이 건립

 1962년 7월 경기도 남양주에 중공업에 중점을 둔 덕소신앙촌을 건립하였다.

1971년 8월에 완공 기장에 제3신앙촌 건립

1980년 4월 탈기독교를 선언하면서 기독교를 전면 부정하였고, 8월에는 교명을 천부교(天父敎)로 개명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지칭하며, 신도들에게 이혼과 별거를 명령하였으며, 섹스 안찰(按擦) 시비가 일기도 함

1990년 2월 지병이었던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남  

 

인천전도관을 나서는 박태선(1970년대)

 

 

 

목사동생의 인천 전도관 옆 제물포 장로교회의 추억

 

사진 중간에 전도관의 노란색 지붕이 보이고 

전도관의 1시 방향에 제물포장로교회가 보입니다

다른 방향에서(전도관 건물이 안보이는 쪽) 촬영한 제물포 장로교회 

 

저희형제가 학익장로교회의 주일학교에 다니던 1964년 가을...
이곳 제물포장로교회에서 인천시내 주일학교 합창대회가 열렸었고

당시 학익초등학교 4학년 이던 저와 목사동생(당시 학익초등학교 1학년)은 학익장로교회 주일학교 합창단원으로 

이대회에 참석을 했었읍니다

그후 수십년 세월이 흐른 어느날  목사동생은 저에게 묻습니다

어렸을적에 합창대회에 나갔었던 기억은 마음 한구석에 소중하고 아름답게 기억을 하고 있는데

그 교회가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하는것 이었읍니다  

목사동생은 지금도 그쪽을 지나는 일이 있을때마다 감회가 늘 새로운 모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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