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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연수동 결핵요양원

매루 2021. 3. 9. 18:41

 

 

몇일전에 우연히 가수 김정호씨에 대한 기사를 읽던중

그가 결핵치료차 머물렀었다는(1985년 11월 29일33년 8개월간) 요양원  이야기를 보았읍니다

지금은 인천적십자병원이된 그 요양원은

주변경관이 무척 좋아서 영화촬영장소로 유명 했었고

제또래의 인천 토박이들이 요양원옆 남동염전 저수지에서의 망둥어낚시,

연인과 함께 옛수인선 송도역에서 소래역까지 협궤열차 철길을 걸어가는 데이트길에

조경이 뛰어나고 각종꽃들이 아름답던 정원이 있던 그곳 요양원 경내를 둘러보곤 했었을 정도로 에게는

많은 추억이 있는 장소 입니다 

 

 


저승으로 날아간 「하얀나비 김정호」

 

<하얀나비>로 1970년 대 중반을 요란하게 뒤흔들던 가수 김정호. 

 

ㅡ중략 ㅡ

그가 인천에 있는 어느 요양원 인천에 있는 어느 요양원에 입원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작곡가 이현섭 씨와 그가 입원해 있는 요양소에 면회를 갔다.

송도 근처 였다 몇개의 병동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고 병실 창에서 보면 소나무 숲과 바다가 보였다.
우리가 병실을 찾아 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 나오는 것으로 보아 멀리 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얘 담배 피우는 거 아니야?”
현섭이 형이 재털이에서 아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담배꽁초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요양소에 와서도 절제를 하지 못하는 그였다.
폐병을 않고 있는 사람에게 담배가 어떠한 치명상을 입히는지 그가 모를 리 없다.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고 컴백도 실패를 하여 자포자기하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을 절제하지 못했다.

요양소도 그의 매니저인 이상기 씨가 강제로 입원을 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아니, 언제 왔어요?”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온 그는 우리를 발견하자 여간 반가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그는 그가 사랑했던 소녀의 이야기와 <이름 모를 소녀>나 <저별과 달을>을 만들었을 때의 감정들을 이야기했다. 그의 얘기는 시간이 가도 그칠 줄 몰랐지만 가야할 길이 멀었던 관계로 우리는 일어서야 했다.

창밖에는 노을이 걷히고 어느덧 어둠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초롱초롱 했다. 그것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는 그냥 병실에 있으라고 했지만 굳이 동인천 고속 터미널까지 배웅 나왔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광대뼈가 드러난 몰골로 우리를 바라보던 그의 퀭한 두 눈을 잊을 수가 없다.

ㅡ 하략 ㅡ

 

 

작사가 박건호의 수필 <오선지 밖으로 튀어나온,,,,>중에서

 

 

김정호는 80년에 앨범 "인생"을 냈지만 폐결핵 증세가 악화되어 인천의 요양원에 입원했습니다.

의사는 충분한 요양을 취하면서 적어도 1년 이상은 치료해야 한다고 했지만

김정호는 4개월 만에 요양원을 뛰쳐 나와 음악에 몰두했습니다.

1983년 새 앨범 '님'을 발표했는데 이 곡은 김정호의 유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정호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33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1965년 남동염전 일대의 지도

 

1966년 내지는 1967년 항공사진입니다.

사진에 세 무더기 염전이 보입니다.

왼편 아래가 1구, 위쪽이 2구, 오른쪽 아래가 3구 염전입니다.

1구 염전과 2구 염전 사이에 검은색으로 저수지가 보이는데

그 저수지와 2구 염전을 가르는 뚝방길에 수인선이 지나는 것이 보입니다.

1구 염전과 2구 염전의 왼편에도 저수지가 보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2구 염전 왼편 뚝방에 저수지를 지나는 다리가 보입니다.

이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지금 원인재역 근처에 있는 다리와는 다른 다리입니다.

지금의 것은 1986년인가에 완공된 다리입니다.

[출처] 남동염전|작성자 kkkk8155

 

 

 

 

 

문학산에서 바라본  연수동 일대

사진 위쪽 오른편에 보이는 다리는 수인선 철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연수동 일대

 

 

 

 사진의 맨 위 맨 왼편에 수인선 남동역이 보입니다.

그 아래로 염전이 보이고 그 아래에 염전저수지가 보입니다.

이 저수지는 남동역 동쪽으로 흐르던 승기천을 이곳으로 수로를 바꾸는 바람에

저수지가 개천으로 바뀌어  지금은 승기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사진 위쪽 오른편에 보이는 다리는 수인선 철교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철교는 1988년경 다시 만든 철교입니다.

이 다리와 남동역을 잇는 뚝방이 바로 수인선입니다.

수인선 위에 보이는 물이 있는 지역은 바다가 아니라 역시 저수지입니다.

남동염전은 1지구 2지구 3지구로 나누는데 사진에 보이는 염전은 2지구입니다.

사진 맨 아래 왼편에 보이는 길은 송도에서 연수동을 거쳐 선학동으로 가는 도로입니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도로는 적십자 결핵요양원으로 들어가는 도로입니다.

그 도로 위에 결핵요양원 지붕이 보이는군요.

참고로 1970년 이 사진과 매치가 되는 지도를 올려 보았습니다.

[출처] 문학산과 이종화원장님 4|작성자 kkkk8155

 

1986년 적십자병원 주변 항공사진(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

 

 

 

 

 

1960년 전후의 사진으로 추정을 합니다.

화도진도서관 소장의 사진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위 멀리 보이는 섬은 옥구도입니다.

왼쪽 중앙 끝에 대원례도가 보이고 있습니다.

이곳 바로 오른쪽에 남동역이 있습니다.

사진 중앙의 하얀 부위가 남동염전의 저수지 중 한 곳인데..

저수지 아래쪽 제방으로 수인선이 지나고 있습니다.

아래 제방 수인선 오른쪽 끝으로 철교가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철교는 훗날 오른쪽 논 자리에 생기게 됩니다

 

[출처] 승기천 철교|작성자 kkkk8155

 

1955년 6월 인천에 소재한 적십자 요양원의 직원들의 단체 기념촬영. 

 

 


 1940년 연수동에 국내 첫 결핵병원 56년간 전국 각지의 '폐병 환자' 수용

[인천 이야기] 한국인의 건강을 책임졌던 도시
일제 때 산업화·도시화로 '후진국 질병' 결핵 창궐
연수동, 물 맑고 공기 좋아 환자 위해 수인선 멈추기도
가수 김정호가 한때 입원… 대저택의 정원처럼 꾸며져 영화촬영지로도 각광받아

유동현 '굿모닝 인천' 편집장

입력 2012.10.10 03:09

 

세계보건기구(WHO) 한국연락사무소가 곧 문을 닫는다.

1965년 우리나라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 보건 환경과 건강 상태가 월등히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진국 질병'이라 여겼던 결핵이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어 보건당국이 다시 긴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결핵은 1910년 이후 일제치하의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급속하게 발생했다.

불결한 환경과 굶주림 속에서 집단 노동에 시달리면서 일제강점기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결핵 사망률을 기록했다.

특히 외부로 열려 있는 항구와 전국 노동자들이 모여 일하는 공장들이 많이 있었던 인천은 전염병에 쉽게 노출되었다. 1935년 한 해 동안 인천부(현 인천시)의 각 병원에서 결핵을 치료받은 환자는 모두 1502명이었다.

조선인 730명, 일본인 742명, 외국인 30명이었다.

병원 문턱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까지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당시 인천의 인구는 7만여명이었다.

인천부에서는 매년 결핵예방주간을 설정하고 객담(가래) 무료 검사, 의류와 침구의 일광 소독 권장,

선전 영화 상영, 선전 전단 살포 등을 시행하는 한편 부민들에게 공기 좋은 교외 산책을 독려하기도 했다.

결핵 환자가 계속 늘어나자 조선적십자사는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기 위해 수도권의 물 맑고 산 좋은 곳을 물색했다.

적임지로 낙점된 곳이 인천 송도 근처 문학면 연수리(현 연수구 연수3동)였다.

1938년 11월, 뒤로 문학산이 있고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는 구릉지 10만여㎡를 사들여 공사에 들어갔다.

당시 이곳은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였다.

적십자 측은 이곳이 너무 외져서 환자와 보호자들이 접근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수인선을 운영하는 경동철도주식회사에 송도역과 남동역 사이에 임시 정거장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수인선 기차는 결핵요양원을 위해 임시정거장에서 1분간 정차를 했다.

 

 

1957년 인천결핵요양원 정원에서 간호사들과 놀이를 즐기는 고아 결핵환자들.

 

'인천개항 100년사'에 의하면 인천결핵요양원은 1940년 11월 20일 '연수장(延壽莊)'이란 이름으로 개원했다.

'목숨이 연장된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병원명이었다.

1931년 미국장로교 의사 홀 박사가 황해도 해주에 설립한 결핵요양원에 이어 두 번째이며

남한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결핵전문병원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일본인과 제대군인, 교원, 경찰관 등 특수한 신분자들만 입원시켰다.

대한결핵협회 학술지 '보건세계'에 의하면 6·25 전쟁이 터지자 입원환자 대부분은 도피했으나

일부는 공산 측에 가담하였고 근처 송도에 살던 남로당계 의사 한 명이 이 요양원을 관리하였다.

인천상륙작전 후 잠시 요양원을 되찾았으나

다시 1·4 후퇴 때 인공 기흉기 하나 달랑 들고 제주도 서귀포로 옮겨 개원했다.

피란 중 인천결핵요양원은 송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휴양소로 잠시 사용되었다.

1953년 휴전 후 전쟁고아 결핵환자 22명을 수용하면서 그 기능이 다시 정상화되었다.

헐벗고 굶주린 한국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됐다.

급기야 정부는 1968년 서울·부산·인천 등 5대 도시 모든 동사무소에 결핵 관리요원을 1명씩 배치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인천시는 환자들이 계속 늘어나자 송도역에서 요양원까지 가는 도로를 뚫었고

요양원은 병실을 증·개축했으며 앞뜰을 1만여㎡로 넓히고 잔디와 옥향나무 등을 심어 대저택의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송림 너머 염전과 갯벌 사이를 하얀 연기 뿜으며 달리는 수인선 협궤열차의 목가적 풍경은

환자들에게 안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촬영의 단골 장소가 되었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가수 김정호가 1980년에 입원했다.

6개월이면 완치될 수 있다고 진단받았지만 그는 4개월 만에 요양원을 뛰쳐나갔다.

'고독한 여인의 미소는 슬퍼'라는 노래는

요양원 시절 송도 인근 해변을 걷는 여인에게서 느낀 슬픔의 이미지를 담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1990년대 들어 입원환자가 감소하면서 요양원의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다.

1991년 연수신시가지 건설계획에 따라 3000여㎡의 땅이 수용되면서 아름다운 정원이 뚝 잘려나갔다.

아파트에 사람들이 입주하자 결핵요양원은 '폐병 환자들의 수용소'라는 인식 때문에 대표적인 혐오시설로 전락했다.

결국 지난 56년간 이 땅의 무서운 결핵균에 맞서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인천결핵요양원은

1996년 6월 5일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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