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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산방 장군바우님

매루 2019. 3. 19. 17:48





서로 좋아하는 벗이나 이웃들의 공통점은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거지요

비록 60즈음 이라는 늦은 나이에 서로 만나 알게된 사이 이지만

강원도 대관령의 장군바우님이 저에게는 그러한 벗 입니다

1박2일(3월 18일 ~ 19일)일정의 강원도 여행중 장군바우님의 산방에서 1박을 하였읍니다

 





 










영동고속도로 진부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오대산 입구를 조금 지나 유천리라는 마을에는

어린시절의 장군바우님이 10여리길을 걸어서 통학을 했던 초등학교가 있읍니다

사진 오른쪽에 영동고속도로가 보입니다




초등학교 들머리옆의 당귀밭에는 시골아낙이 농사준비를 하고있는 강원도의 봄풍경이 보입니다




허송산방(장군바우님의 농막)에 오르다보면 대원사라는 절로 올라가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장군바우님의 화물차를 갈아타기 위하여 장군바우님을 기다리면서

강원도 골짜기에 찾아온 봄을 느껴봅니다




장군바우님의 산방에 가기 위하여 승용차로 갈수있는곳에 이르자

허송산방의 지킴이인 장군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곳에서 부터는 장군바우님의 사륜구동차를 타고 올라야 합니다






 1965년 기준으로 남한에는  4만 7,000여호의 화전농가가 있었으며

그중 강원도에는 20여 만 명의 화전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악랄한 수탈을 못이겨 이렇게 깊은곳까지 들어와 화전(火田)을 해야했던 옛사람들의 딱하고 고달픈 사연들을 미루어 생각 해봅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나타나면서부터

산간오지의 화전민 마을이 무장공비들의 침투나 근거지가 될 것을 우려한 정부는 1968년 '화전정리법'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화전민 강제 이주정책을 펼쳤고 1976년에 화전정리가 종결되었다고 합니다




대관령 토박이인 장군바우님은 당신의 집에서 화물차로 20여분 거리의 이곳을 사들인후  강원도 특산물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장군바우님의 허송산방 주위에는 겨우살이가 무척 많습니다




허송산방 에서는 용평스키장이 탁트여 바라보입니다

























어지껏 한번도 밥을 지어본적이 없었다는 장군바우님이 밥물의 양이 적당한가를  묻기위하여

남비를 들고 제게 닥아옵니다



장군바우님은 의도적으로 옛화전민들이 살았던대로 현대문명의 이기들을 배제 합니다








장군바우님의 입에도



허송산방의 온돌 아궁이에서도 불이 한창 입니다




저와 계유씨는 매우 오랫만에 참나무로 달궈진 구들장 온돌에서 하룻밤을 보냈읍니다




장군바우님은 산방을 비울때 문을 잠궈놓지 않아서

등산객들을 비롯한 과객(過客)들이 이곳에 둘렀다가 방명록에 버금하는 흔적들을 남겨놓습니다








이번 여행을 함께한 계유씨도 즐거워 합니다



발 부상중임에도  무척 즐거운 여행 이었읍니다



요즈음 종편방송에서는 자연속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방송들이 흔히 보입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제작자들 에게는 장군바우님과 허송산방이 섭외 0순위 이겠지요 

실제로 방송섭외가 빈번하지만 장군바우님은 한사코 거절을 해오셨었읍니다

언젠가 보수성향의 모 종편(ㅈ)에서 방송섭외를 해오자 "천만에 만만에" 6글자로 거절을 했을 정도로

진보성향의 고지식한 장군바우님 이신데 저의 사진촬영 제의에는 마지못해 응해 주셨읍니다 

하룻밤 재워주신것도 고마운데 이래저래 고맙고 영광 입니다






자급자족하며 산속에 둥지 틀었던 화전민들

충북인뉴스 (2006.11.06)



화전민(火田民)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화전 농사를 짓는 사람,

즉 화전은 원시적 농경법으로 초복에 불을 지르고 그 자리를 갈아 농사짓는 밭을 말하고

그 화전을 가꾸는 사람을 화전민이라고 부른다고 적혀 있다.

 화전민은 주로 조와 수수, 메밀, 감자, 콩 따위를 심는데 거름도 주지 않고 김매기도 하지 않으며

몇 년 동안 농사를 계속하다가 땅기운이 떨어지면 옮겨다니며 생활한다고 한다.




▲ 충북의 마지막 화전민
단양군 영풍면 의풍리(노루목)에서 옥수수를 심던 화전민 아낙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카메라앞에 섰다.

그는 3대째 화전밭을 일구면 산다고 했다. / 1986년


화전민 안주인은 무명치마나 삼베적삼 갈기갈기 헤진 옷을 기워 입고 비탈진 화전밭에서 옥수수 심고 감자 캐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화전민의 아낙은 조이삭이 고개를 숙여야 도시 장구경을 다녀올 수가 있었다.

그 길은 추석상을 차리기 위해 수확한 잡곡을 이고 참숯을 지게에 진 남편을 따라 30리 길 고개 두 개를 넘어야 하는 고된 길이었다.




▲ 화전민 초가

통나무로 귀틀집을 짓고 흙벽을 바르고, 지붕은 억새로 얹은 화전민 초가.

오래 살지 않기 때문에 건축에 공을 들이지 않았다. / 1960년대



화전민들은 외딴 산밑으로 스며들어 나무를 잘라 통나무집(귀틀집)을 짓고 지붕은 억새나 굴피나무 껍질을 벗겨 덮어 마무리했다.

추운 겨울 동안은 눈이 많이 내려 산속에 갇혀 살다가 봄이 되면 다시 산불을 놓아 화전밭을 일궈 근근히 살아가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에 쫓긴 피난민이거나 가난에 쪼들린 농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더러는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종교에 현혹되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세속과 인연을 끊고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화전민들이 가장 많았을 때는 조국 광복 후부터 6·25 전란 사이에 쫓긴 사람들이 산속으로 찾아 들면서 절정을 이뤘다.

그러다가 70년대 무장 공비 침투로 산골짜기 독립가옥 철거령이 내려져 강제 철거되면서 크게 줄었고 80년에 접어들어 거의 소멸됐다.


화전민들은 좋은 자리를 잡으면 한곳에서 대물림으로 살기도 했는데

그들은 산을 지키는 감시원(산감)들의 눈을 피해 화전밭을 일굴 자리를 미리 눈여겨 보았다가

싸리나무로 만든 다래키속에 마른 쇠똥과 마른 솔방울을 함께 넣어 화전 예정지 나무 가쟁이에 다래키를 걸어 놓는다.

 쇠똥에 불을 붙이면 쇠똥불이 서서히 타 들어가고 성냥골에 불을 붙이면

솔방울에 불이 붙어 다래키도 타버리고 불붙은 솔방울이 밑으로 굴러 산불이 일어나게 된다.

산불이 진화된 얼마 뒤 땅을 파서 곡식 씨앗을 뭍으면 그곳이 화전밭이 되는 것이다.



화전민들 대부분이 깊은 산 속 독립가옥에서 외롭게 살아 가족간의 사랑이 넘치고.

특히 부부정이 다정하고 낯선 사람이라도 찾아주면 반가워했다.

필자가 소백산맥 이곳저곳을 취재하면서 산 깊은 마을로 찾아가면 화전민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화전민 한사람 한사람 인생 역경을 들어 보면 대부분이 드라마 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배짱 좋은 머슴이 주인집 딸을 납치하여 화전민이 됐고 범법자로 쫓기다 들어온 사람,

과부댁과 눈맞아 가족들을 버린 사람, 도박으로 패가 망신한 홀아비 화전민도 있었다.




▲ 화전 정리
무장공비 침투에다 범죄자들의 은신처가 되고 있는 산간오지.

치안력이 미치지 못하는 화전가옥들에게 철거명령이 내려졌다.

 면직원들이 일일이 찾아가 철거대상 번호를 부여하고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1970년대 단양 (사진 단양 윤수경씨 제공)


깊은 산 속에 10년 넘게 살다 보면 마음이 모두 비단결이 되고 화전민 끼리의 정은 형제 이상의 따뜻한 우애를 나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부지런해 험한 산길을 헤쳐 약초를 캐고 토종벌도 치고 그것을 장에 갔다 팔아 필요한 돈을 마련했고

소금을 제외한 모든 먹거리는 자급자족했다.

의복은 남자들은 군복을 염색해 입었고 여자들은 광복으로 손바느질 옷을 많이 해 입어 특별히 돈 들어갈 일이 없었다.




화전밭에 찰옥수수를 심어 추수한 것을 통나무에 매달아 건조하고 보관시킨다.

나무높이 건조시키는 것은 통풍도 잘 되지만, 야생동물과 들쥐 피해를 막기 위해서다. / 1986년


화전민의 역사는 아마도 농경의 시작과 맞물릴 것이고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과중한 세금에 차별 심한 신분제도의 압박으로 산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처음엔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살다가 마을을 이루고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살던 모습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화전민의 원조격일 것이다.

유년 시절 아버님을 따라 도깨비 노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사는 화전집을 찾아갔던 기억이 생각난다.

 아주 추운 겨울철이었는데 부싯돌로 쑥에 불을 붙이고 광솔불을 밝혀 산토끼 한 마리를 요리해 주던 노인장의 따스한 눈길이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을 정도로 화전민들의 모습은 지금은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따뜻한 인간미 그 자체였다. 




충북인뉴스  cbi@cbi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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