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이나 지난 일이다.
김운경(60)이 쓰는 <서울의 달>이 시청률 40%를 넘겨 초대박을 내고 있었다.
당시 국내 최대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한 시사잡지가 그를 표지인물로 정해놓고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김운경이 “작가라는 신분을 숨기고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데 얼굴이 알려지면 뒷골목 취재를 할 수 없다”며
사진 찍기를 거부한 거였다. 결국 그 시사잡지는 사상 최초로 사진 없이 기사를 내보냈다.
그 김운경이 오랜만에 또 남의 집 안방에 대고 ‘구라’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JTBC서 내보내는 <유나의 거리>다.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그리는 전형적인 ‘김운경표’ 드라마다.
소매치기, 전직 조폭, 전직 부패 경찰, 꽃뱀, 일용직 노동자, 배우 지망생 등 내세울 것 없는 ‘쌈마이’(삼류) 인생들이 얽히고설킨다.
이런 식이다. 다세대주택에서 옆 방 여자가 자살했다.
그런데 이 집 안주인 한다는 말이, “월세를 두 달이나 밀려놓고 어떻게 자살할 수가 있어.”
나이 들어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왕년의 주먹 ‘쌍도끼’의 등에는 엉뚱하게도 토끼 문신이 새겨져 있다.
“문신 하는 친구가 제일교포였는데 쌍도끼 문신을 해달랬더니 잘못 알아듣고 산토끼를 그려놨어.”
오래 기다려온 김운경 드라마 마니아들은 요즘 월, 화요일 저녁 약속을 잡지 않는단다.
“김운경이 썼다 하면 웰메이드 보장이지. 역시 뉴스는 손석희, 드라마는 김운경이더라고.” 며칠 전 들은 얘기다.
이런 대단한 김운경과 호형호제하며 술자리를 떠돈 지가 30년도 넘었다
(기사에 맨 처음 김운경 사진을 내보내기도 했으니 이건 충분히 자랑거리다).
김운경이 무명작가 데뷔작으로 <전설의 고향> <포도대장> 같은 ‘허접한’ 드라마를 쓰면서
젊은 날의 한가운데를 힘겹게 통과할 때부터 어울려다녔다.
당시 서른한 살의 김운경은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두고 보라 친구여.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는 이 위선의 현실, 찢겨져 쓰레기통에 뒹구는 아픈 내 원고에 침을 뱉으며 맹세하겠다.
복수하고야 말겠다.” 시청률만 따지는 방송사와 프로듀서, 삼류 드라마를 쓰는 작가,
그걸 즐기는 시청자들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던 시절이다.
그러다가 ‘순돌아빠’ 임현식, 만수 아버지 최주봉이 겁나게 웃기는 <한지붕 세가족>을 쓰면서 확 떴다.
그리고 <서울뚝배기> <형> <옥이이모> <파랑새는 있다> <황금사과> <짝패>로 당대 최고의 작가가 됐다.
말하자면 제대로 복수에 성공한 거다.
유명 작가가 되어서도 따로 작업실을 구하지 않고 방송국 작가실에서 원고지를 박박 구겨가며 글을 썼다.
작가실 한쪽에 군용 철제 야전침대 하나를 놓고 먹고 잤다.
후줄근한 청바지와 검게 물들인 군용 점퍼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다.
그게 김운경의 취재, 글쓰기, 잠옷 겸용 차림새였다.
노숙인 얘기를 쓸 때는 서울역에 가서 같이 소주 마시며 한 2주 동안 노숙을 했다.
제비족 취재를 위해 영등포의 유명한 춤선생 ‘대머리박’에게 사교춤을 배웠다.
그렇게 해서 제비족, 사기꾼, 차력사, 창녀, 밤무대 가수 등 주변부 군상들의 캐릭터가 나온 거다.
그러니 현실의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쓰는 것마냥 디테일과 전문용어가 펄떡펄떡 살아있을 수밖에.
김운경 드라마는 통속의 세계에서 더 빛난다.
<서울의 달>에서 변태 미술선생 백윤식이 푼수 윤미라와 환상의 콤비를 이뤘을 때다.
“카페 이름으로 뭉크 어떻습니까?” “뭉크는 뭉클뭉클해서 이상하잖아요.” “저는 댁과 같은 여자를 새 대가리라고 부릅니다.”
백윤식은 윤미라를 ‘꼬시려고’ 웃음기 싹 빼고 이런 말도 한다.
“불이 났는데 렘브란트 그림이 있고 고양이가 울고 있다면 나는 고양이를 구하겠소.”
김운경은 드라마에서 선과 악을 구분짓지 않는다.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한 사람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울의 달>에서 신분상승을 꿈꾸며 ‘보이스 비 엠비셔스’를 연발하던 홍식이도 악인은 아니다.
<옥이이모>에서 운동권 학생을 집요하게 쫓는 악질 형사조차 그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때론 가증스럽고 때론 야비하지만 그 바탕에 인간미가 흐른다.
김운경은 미남, 미녀 주인공에게는 별 애정이 없다.
스타의 얼굴을 팔아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걸 혐오하는 편이다.
그러니 연출자와 갈등할 수밖에 없지만 숱한 배역들이 제각기 만화방창, 개성을 발휘한다.
김운경은 한동안 책상머리에 김광규의 시구를 붙여놓고 지냈다. “꽃들아, 네 마음대로 피어라.”
<서울뚝배기>를 쓸 때는 어느 순댓국집 주인이 가게에 붙여놓은 글을 옮겨 적었다.
“나는 세상을 내 손으로 맛있게 하기 위해 나온 사람.
힘들고 서러워 눈물이 앞을 가려도 신문지 위에 마늘을 깔아놓고 마늘이라도 까면서 울어야 한다.”
김운경은 지식을 내세우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
“인생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착하게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드라마를 쓴다”는 그다.
누가 기업을 물려받느냐가 아니라 저 푸줏간집 아저씨는 배추장수 아줌마와 결혼을 할 것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는 거다.
김운경은 등산과 여행을 좋아한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곧장 히말라야나 인도로 떠난다.
여행은 인간의 방황과 고독을 이해하기 위한 경건한 의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고 산악인 박영석을 따라 10번 넘게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 올랐다.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2박3일 동안 기어서 살아나온 박정헌과도 친하다.
김운경이 이들을 좋아하는 것은 머메리즘 때문이다.
머메리즘은 영국의 산악인 머메리가 주창한 등반정신으로 ‘등로주의’를 일컫는 말이다.
험준한 암릉이나 암벽 등 어려운 루트를 직접 개척해가며 역경을 극복해 나아가는 그 과정을 중요시한다.
셰르파를 앞세워 가장 쉬운 코스를 선택해 정상에 오르는 ‘등정주의’에 반하는 개념이다.
김운경은 요즘 방송작가들이 대규모 산악원정대와 비슷하다고 한탄했다.
내가 알기로 김운경은 생활 속에서도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부산에서 나고 인천에서 자랐다는데 팔도 사투리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그러니 그의 1인다역 구라는 거의 예술의 경지다.
김운경에게 <유나의 거리> 관전 포인트가 뭐냐니까 “소외된 사람들의 가장 본질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했다.
“사랑 말고는 우리가 사람다워질 수 있는 길이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