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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자의 '주라, 그리하면 채우리라' 본문

사람이 먼저다

양영자의 '주라, 그리하면 채우리라'

매루 2019. 1. 22. 18:37





                                      



 

양영자선수의 전성기때에 유행하던 노래 입니다

  

    

 


오늘 인터넷에는 반가운 이름(전 국가대표 탁구선수)으로 화제 입니다

어제(1월 21일) KBS1 교양프로그램 '아침마당'의 '화요초대석'에 그녀가 출연을 하였다고 하는군요
서울 올림픽(88올림픽) 여자탁구부문 단체전 결승에서 현정화와 짝을 이루어
마지막 복식경기에서 첸징/자오즈의 중국조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차지 하였었던 양영자 입니다
88올림픽후 언론과 세인의 관심이 온통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국경을 넘나드는 사랑과 결혼 이야기였을때
이에리샤,정현숙에 이어 한국여자탁구를 이끌어오던 양영자는 조용히 우리곁을 떠났었읍니다
탁구솜씨는 별로 이지만 어렸을적부터 탁구대,탁구공,라켓이 있는곳(아버지가 근무 하셨던 학교의 관사)에서 자란 저는
사춘기때에 2년여 다녔던 전도관과 관련이 있는 시온고등학교의 탁구부와 경기에 관심이 있었고
저와 같은 학번 이었던 이에리샤(서울여상 73년도 졸업)선수가
정현숙 선수와 함께 유고의 사라예보에서 세계재패를 하면서 더더욱이 그러하다가
제가 졸업을 한 동인천고등학교 탁구선수단의 선전(유남규 선수 때문에 1등 기록은 많질 않았지만)이 한창일때
한국 여자탁구계에는 당시 전라북도 이리(지금의 익산)의 포목점집 딸인 1964년생 양영자라는 소녀가 나타납니다 
저의 고교후베들의 탁구경기에 관심을 갖다보니 양영자선수의 경기들이 눈에 띄게 되었고
양영자 선수의 경기를 보면서  당시의 여자키로는 큰키(166cm)와 감탄을 자아내는 경기력에 절로 팬이 되어갔읍니다
서울 올림픽 여자탁구 단체전의 마지막경기에서 승리를 한 순간 열광과 환성의 도가니 속에서도
방금전 경기를 치른 탁구대옆에서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치며 차분히 자신의 짐을 챙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 합니다


 양영자 본인은 이때의 심정에 대하여

1987년 세셰선수권대회에서 이미 금메달을 따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에서는 지면 역적이고 이겨야 본전 이었기 때문에 무척 부담스러운 상태였는데

막상 금메달을 따고보니 이겨서 기뻤던것 보다는 국민들의 기대에 보답을 했다는 안도감이 들엇었다고 회상을 합니다


그러한 그녀의 신앙 이야기와 그녀가 펴낸책 '주라, 그리하면 채우리라' 이야기 입니다














몽골로 떠나기 전, 선교 훈련을  받으면서 나는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복"을 직접 체험해보거 싶었다

남편이 예수전도단에서 훈련을 받을 였는데.

그 훈련내용  가운데 "오직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만을 의지해서 생활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시간이 매우 은혜롭고 행복 했다고 내개 말해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와 같은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살펴보니 이미 나는 너무 많은것을 가진 사람 이었다

내가 온전히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 만으로 살아 가려면

적어도  먼저 내가 소유한 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먼저 내가 가진 것들이 무엇인지 곰곰히 헤아려 보았다

무엇을 내려놓아야할지 머릿속에 하나씩 떠올리다보니

내려놓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는것을 깨달았

남편과 함께 선교사의 삶을  살기로 결단을 했으니

내가 가지고있는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도 가슴 설레기는 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망설여졌다

며칠동안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동안 내가 받은 은혜들을 묵상해 보았다

모든것이 주님께로부터 왔고 주님께서 주신것들 이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도 간절한 기도의 결과였고,

앞이 보이지않는 캄캄한 우울증 속에서 말씀의 광채를 비추시고 맑고푸른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신분도 하나님 이셨고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선교사 사역을 하도록 소둥한 남편을 만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 이셨

모든것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셨는데,

더군다나 선교사로 나가면서 주님의 공급 하심을 의심하고 주저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나는 내 모든것을 아낌없이 내려놓기로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솔직히 두려움이 조금은 앞섰으나 주님께서 채워주실 거라는  확신이 들면서 기대하는 마음과 설레는 마음으로 들떴다

가장 먼저 나의 연금 전액(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 국가에서 지급하는연금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받던 연금을  은퇴하고 시골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하고 계신 목사님이 받도록

 연금수령계좌를  옮겨 놓앗다

그리고 강원도 동해시에 내가 소유하고있던 작은 땅을 매매한 대금과 현금 전부를 한 선교단체에 기부했다

당시 우리 가족은 강남 서초동에서 전세로 살고 있어쓴데

이제 선교지로 떠나게되면 그 전세자금은 우리 부부에게 필요치 않으리라 판단되어

전세자금과 부동산 매매대금 전부를 선교단체에 기부했다

그 선교단체는 당시 선교사 자녀들(MK)을 위한 숙소를 건축할 계획 이었는데

그 건축에 대한   지정헌금으로 기부한 것이었다

선교지에서 국내로 되돌아와서 고생하는 선교사 자녀들을 돕기 위한 숙소를 짓는다니,

나 역시 선교사로 나가는 마당에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선뜻 지원할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그동안 소유하고 의지했던 재물을 미련없이 하나님께 전부 내려 놓았다

더는 내가 소유하고 의지하는 재물이 없었기에

좋든싫든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 만으로, 주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선교사가 되었다

우리부부는 어쩔수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부부가 선교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했던 가장 어려운 훈련과정 이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선교자 생활뿐 아니라 현재 까지도 나의 모든 필요를 넉넉하게 채워주고 계시니

주님의 살아계심과 공급 하심을 직접 체험해봤다고 말할수 있다










‘탁구보다 그림’이 좋았던 유년시절

 

탁구를 처음 시작하게 된 건 10살때였어요.

한 번은 초등학교 시절 산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데 선생님이 보니까 다른 친구들은 풍경화 같은 걸 그리고 있는데

저는 친구들이 어떻게 그리고 있나 막 왔다갔다 하고 있더래요.

활동적인 저를 보신 선생님이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셔서 추천해주신 운동이 탁구였어요.

제가 원래 화실을 다니면서 미술 공부를 했었거든요.

 제 고향이 전북 익산인데 제가 그린 그림이 서울시민회관에서 특상을 받을 정도로 잘 그렸던 모양이예요.

지금 그리라고 하면 하나도 못 그리는데(웃음).

어느날 저랑 라이벌이었던 옆집 친구는 상을 받았는데 저는 못 받게 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탁구를 안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저희 어머니에게 졸라서 다시 저를 탁구부에 끌고 가셨어요.

그렇다고 억지로 탁구를 치거나 그런 건 아니였고요.

 


‘녹색 테이블의 여왕’으로 불리다

 

강한 체력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에 비해선 괜찮았던 거 같아요.

일단은 승부근성이 강해서 지면 막 못 견디는 그런 스타일이었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탁구를 치다보니 중학교 때쯤 꿈이 생기더라고요.

‘나중에 국가대표가 되어서 훌륭한 탁구선수가 되보고 싶다.

’ 매일 탁구 일기를 썼는데 일기를 보면 ‘도에서 1등, 전국대회 1등’ 목표가 점점 더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중학생 시절 당시 전국 탁구 중등부 경기, 중, 고등부 경기가 있었는데

중등부 경기에서도 1등하고, 중, 고등부 경기에서도 1등을 해서 2관왕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 일이 드문데 그 시합을 계기로 중학생 때부터 국가 대표로 선발이 되었죠.

하지만 ‘테니스엘보우’라는 팔꿈치의 심한 통증으로 진통 주사를 맞지 않으면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되었어요.

 팔을 들지도, 내리지도 못할 정도 였거든요.

의사 선생님이 탁구 그만두면 괜찮아질거라고 하시는데 차마 국가대표의 꿈을 포기하기가 너무 아쉬운거예요.

어린 나이에 진통주사를 맞으면서 경기에 나섰는데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그렇게 진통제를 맞으면서 국가대표도 되고 세계선수권 대회도 출전하게 되었고요.

그러기를 6년, 진통주사의 효과는 계속 떨어져 나가고 나중에는 약효가 듣질 않더라고요.

첫번째 세계선수권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87년 당시 세계 랭킹 50위 안에도 못 들었던 제가

세계 랭킹 1위를 이기고 결승에서 다른 사람에게 지긴 했지만 세계 랭킹2위를 차지하게 된 거예요.

 당시 탁구로는 중국을 이기는 나라가 없었으니까 매스컴에서는 ‘중국킬러가 나타났다’라고 띄워주기도 했죠.

 


고통 중에 기도로 붙잡은 하나님

 

근데 문제는 팔이었어요.

너무 아픈데 더 이상 방법이 없으니 아는 분께서 저한테 기도원을 가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기도원에 가면 안수를 해주시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 아픈 선수들 몇 명 데리고 같이 갔어요.

사실 제가 어릴 때부터 교회는 다녔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뭔지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기도원에 가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어요.

정말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피흘려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분을 내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내가 오늘 당장 죽는다고 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구원의 복음을 듣는데 회개의 눈물이 어찌나 나던지…

그 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을 하게 되었어요.

그 분이 안수기도 할 때 제가 6년동안 주사를 맞으면서 고통을 견뎌왔던 팔의 통증이 사라지면서 아프지가 않은 거예요.

그 때부터 다시 운동을 할 수가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잊지 않으시고 기적적으로 고쳐주셨구나’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오게 하셨죠.

구원의 은혜만 생각해도 너무 감격스러워 평생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서 살수 있을까 할 정도인데

 팔 고침까지 표적으로 보여주시니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신앙이 어리다보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다 신학교에 들어간 전도사, 목사만 하는 줄 알았어요.

당시 옥한흠 목사님과 다른 부목사님들도 탁구 자주 치시고 그랬었는데

전 이제 탁구를 그만두고 전도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목사님께 상담을 받았죠.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신학교만 들어간다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영광을 돌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 일로 저의 가치관이 변화되기 시작했어요.

훌륭한 탁구선수로 정말 명예로운 국가대표 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이제는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지게 된거죠.

그런데 1년 후 84년(당시 20세)에 또다시 간염으로 쓰러지고 말았어요.

운동을 하루 이틀 무리해서 하면 2-3일 쉬어야 할 정도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더라고요.

간염은 잘 쉬어주어야 하는데 운동선수가 잘 쉴수가 있나요.

그러다 보니 성적도 떨어지고 국제대회 나가서 지고 오니까,

옛날에 잘하고 왔을 땐 매스컴에서 막 띄워주더니 이제는 노장이 됐다는 둥 이러면서 언론이 확 바뀌더라고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간염 때문에 운동을 내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혼란스러웠죠.

아프고 탁구도 잘 못하니까 매스컴에서도 비난하고 스스로도 사기가 뚝 떨어지더라고요.

그 당시 믿음이 없었다면 정말 포기했을거 같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라켓을 움켜쥐다

 

잠언 24장 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하나님께선 제가 주저 앉지 말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말씀을 주셨어요.

다시 내가 일어나야 한다는 믿음으로 일어서긴 했는데 여전히 간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렵게 시작을 했죠.

그러던 중 떠오르는 신인 탁구 유망주가 있었어요. 바로 현정화 였죠.

저보다 5살 어린데 그 선수가 주목받는 신인으로 부상하고 있었고 저는 서서히 밀려나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던 중 둘이 최강전을 붙게 된 거예요.

다들 한참 상승세를 타고 있는 현정화가 100% 이길 것이라고 했는데 예상외로 제가 이기고 최강의 자리를 다시 지키게 됐어요.

정말 모든 사람이 예상치 못했고 저 또한 진짜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치뤘던 경기였어요.

그렇게 현정화 선수와 제가 국가대표의 조를 이루어서 그 뒤부터 단짝으로 시합을 하게 됐죠.

 아시안게임 같은 경우는 남, 녀가 중국을 이기고 모두 우승을 했는데

여전히 간염 때문에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어 병원에 50일을 입원해 있었어요.

그런 연약함 속에서도 저는 은퇴를 할 때까지 매시간 마다 하나님을 붙들고 시합을 해야만 했던거예요.

 만약 제가 정말 많은 연습과 노력으로 남들처럼 준비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애썼기 때문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전 맨날 비실비실 남들보다 연습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딴 금메달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할 말이 없도록 만드신 선수시절이었어요.


15년의 선수시절 중 8년간의 국가대표 생활을 끝내고 89년에 은퇴를 하게 되었죠.

 제가 늘 생각했던 건 명예로운 은퇴를 하자는 거였어요.

사실 금메달 땄기 때문에 그만둔 게 아니라 몸이 계속 좋지 않았기 때문에 88년 올림픽을 마치고 은퇴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명예로운 은퇴, 그 후

 

은퇴를 하고 제일모직 팀에서 트레이너 생활하면서 후배양성의 길에 들어섰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만족감이 없고 기쁨이 없었어요.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하고, 이 일의 목표가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또 은퇴하고서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바쁘게 살다 보니 교회에서 간증 요청이나 봉사에 대한 부분을 많이 등한시 하게 되었어요.

점점 내 영혼이 곤고하고 메말라져 가는데 그 땐 왜 그런지 몰랐어요.

저희 청년 시절은 서로 교제하고 나누는 공동체가 없었어요.

대학부, 청년부에 있기도 했지만 거의 예배 끝나면 집에 돌아오고 그랬어요.

그 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십자가의 세로 막대기만 있고 가로 막대기는 없었던 거죠. 그런데 세로만 있고 가로가 없다보니 어느 순간 넘어지게 되더라고요.

은퇴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우환이 겹치면서 우울증까지 찾아왔어요.

이게 한달 두달만에 나을 증상이 아니었어요. 굉장히 심한 우울증이었어요.

땅 깊은 곳이 어디인가를 체험할 정도로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거 같고, 마치 하나님이 날 버리신 것 같았어요.

한 번은 집사님들이 이렇게 집에만 있으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강화도에 코스모스가 피었으니 보러가자고 억지로 끌고 가셨어요.

 차 안에서도 누가 나를 본다고 외투의 모자를 뒤집어 쓰고 강화도까지 가기도 했었어요.

그럼에도 제가 회복이 잘 안되니까 주변에서 절 돌봐주시던 분들도 지치시는 거예요.

 제 자신도 저를 포기할 정도 였으니 주변분들은 오죽 하셨겠어요. 그렇게 허무한 2년을 보냈어요.

 


탁구여왕에서 B국 선교사로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던 시기에 주변의 사람들이 정리되고 나에겐 하나님 밖에 없다라는 결론이 섰어요.

그리고 지금 남편을 만났는데 당시 구로공단에 있던 사랑의교회 센터에서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섬기고 있었어요.

 형제를 처음 만난 건 자카르타였거든요.

남편은 취재차 왔고, 저는 우울증 때문에 아는 집사님이 자카르타에 한 번 오라고 하셔서 갔죠.

취재하러 갔던 무역회사 장로님이 인터뷰 끝나고 나서 남편이 사랑의교회 다니는 걸 알고,

우연히 저와 함께 점심약속한 자리에 데리고 나오신 거예요.

자세히 보니 청년부에서 안면이 있는 청년이었어요.

제가 되게 안 좋아하는 형제였어요. 물론 말도 안해봤지만(웃음).

그 당시에 찬양할 때 손을 들고 찬양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맨날 앞자리에 앉아서 열정적으로 손을 드는거예요.

 왠지 ‘척’하는 신앙생활인 것 같아 보여서 별로 였거든요.(웃음)

이후 저를 초대한 집사님이 중매역할을 해주셔서 서울에 돌아가서도 연락하고 결국 교제하게 되었죠.

교제를 하면서도 제가 계속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에 형제가 새벽기도 다니면서,

 QT 하면서 묵상한 말씀을 나누는 것이 데이트였어요.

김양재 집사님(현 목사님)과 함께 QT, 말씀공부를 하면서 말씀이 제 속에 들어가니까 이제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결혼도 하게 되었고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말씀을 통해 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죠.

 제가 우울증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드렸던 찬양이 있었는데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이었거든요.

다시 내가 우울증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어서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겠다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어요.

 

남편은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었어요.

저도 QT를 하면 할수록, 말씀을 보면 볼수록 나가서 선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을 주셔서 신학을 먼저 공부했죠.

이후 선교 훈련 받고 97년도에 선교지를 갔어요.

6년 동안 B국에 있었고, 2004년에 A국로 옮겼어요.

 B국에서 남편은 성경번역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데 올해3월이면 신구약이 완성이 돼요.

4월 초쯤 출판을 하려고 해요. 남편은 성경번역을 하고, 저는 탁구 사역을 주로 하고 있어요.

아이들, 주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올림픽 메달리스트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도움이 될 때가 많아요.

여기저기 가면 비자받기가 어려운데 탁구를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비자를 받고

남편도 비자 받기가 수월해서 풀타임 사역으로 집중이 가능해요.

좋은 소식이 들려와요. 탁구를 가르친 아이들이 전도를 해서 교회로 데려오기도 하고,

조금씩 저희 사역에도 열매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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