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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다

1,21, 교련, 나쁜정권

매루 2019. 1. 21. 02:06




제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중이던 1968년 오늘(1월 21일)은  

북한의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하여

우리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며 사상자를 낸 이른바 김신조부대사건이 일어났던 날 입니다 

사건 다음날 저희 이모님께서는 살해된 무장공비들의 얼굴을 확인해 보셔야 한다며

저희 어머니와 서울에 함께 올라가줄것을 부탁 하셨었읍니다

인천으로 시집을 오신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전에 친정(황해도 장연)나들이를 가셨다가

외손주(45년생으로 당시 4살)를 두고 가라시는 친정어머니의 청을 거역 못하고 북에 두고왔던 당신이 아들이

행여 무장공비들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며 매우 안타까워하시며 하염없이 우셨던 이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저의 기억에 생생 합니다


김신조사건후에 이땅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는 교련 이라는 과목이 신설 되었고

1976년도에 군에 입대한 저는 33개월의 군대생활을 하던중 황당한 일을 당합니다

저의 군생활 25개월여 즈음에 저보다 수개월이나 늦게 군에 입대했던 후임병이

군복무기간감면혜택을 받고 저보다 먼저 제대를 할것 이라는 겁니다 것

유신정권은 대학을 졸업 했거나 재학중에 군대에 입대한 사람들에게

군대에 오기전에 대학생활중 받았던 교련(3학점)시간 만큼 현역복무날자를 줄여준다는것 이었는데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70년대에는  고교졸업생의 20%남짓만이 대학에 진학을 하였었고

 수학능력과 상관없이 가정의 경제사정이 어려워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에도 진학을 못했던 이땅의 많은 청소년들은

군의무복무기간 조차도  대학생활을 못한죄(?)로  불이익을 당했던것 이지요 





19681 21사태 (김신조 사건)


1967년 4월에 북한의 민족보위성은  정찰국 산하에 유격전 특수부대인 124군부대를 만드는데

이 부대는 각 부대의 정예요원 2400명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8개 기지에 300명씩 분산되어 고강도 특수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1968년 1월 16일 황해도를 출발한 124군부대원 31명은 다음날 오후 11시에 고랑포 일대로 침투한후

18일 자정무렵에  미군 2사단이 철책선을 담당하던 서부전선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루를 보내고

19일 밤 8 30분경 경기도 고양군 법원읍 삼봉산에 도착을 하였고

이곳에서 나무를 하던 우씨 3형제와 마주칩니다

이들은 생포한 우씨 3형제를 풀어준후(풀려난 우씨 3형제는 곧바로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를 함)

8시간만(시간당 10km의 속도의 구보)에 북한산 비봉에 다다릅니다

당시 한국군 유격대의 산악지대 이동속도가 시간당 4km라고 하니 가히 초인적인 능력 입니다


"우씨형제들을 풀어준 지점에서 서울 진관외동의 진관사까지 산악코스로 행군하면

해병대도 족히 이틀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진관사를 거쳐 북한산 비봉의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해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기겁했지요.

중무장하고 야간 산악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 건

제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ㅡ 당시 국방부장관 이었던 김성은의 회고 ㅡ

 20일에 앵무봉을 통과한 이들은 비봉,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내려와

21일 밤 10시 청와대를 불과 500m를 남겨둔 지점인 세검정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서

처음으로 검문을 받게 되고  전투가 벌어집니다


  

 


 22일 새벽에  인왕산 기슭에서 김신조가 생포 됩니다.






1968. 1. 22, 오후 7시부터 30분간 육군방첩부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김신조

TV가 귀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당시 저희집에는 TV이 있었고

저는 TV로 중계된 이날의 기자회견 모습과 내용이 지금도 눈과 마음에 생생 합니다

김신조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남파 임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내래 청와대 까부수고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라고 대답을하여

온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넣습니다





사살된  무장공비의 시신들을 확인하기위해 끌려나온 김신조


경기도 일대에 걸친 대대적인 수색작전 끝에 당국은 남파된 유격대원 총 31명중 

 28명 사망(김춘식은 치안국에서 자폭), 1명 생포, 2명 월북(추정)했다고 발표 하면서

우리 측은 군 장병 25명과 민간인 7(심지어 신고를 받은 경찰의 늑장 출동 때문에 사망한 민간인도 있었다!)

 총 32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발표를 하면서

군 병력 1 9,213명이 동원된 작전은 종료가 됩니다



이 사건후 태극연습(1969년 을지연습으로 개칭)을 그 해 처음 실시하였고

대한민국에는 주민등록번호 제도와  향토 예비군제도가 시행이 되고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 됩니다

대학생들은 물론 청소년인 남녀고교생들에게까지 교련 이라는 군사교육을 받게 합니다







교련(敎鍊)

1,21사태이후, 안보의식과 전시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을 높인다는 명분 하에

이듬해인 1969년에 교련이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

이 때, 당시 주 4시간이던 체육 수업을 3시간 줄이고 교련을 주 2시간으로 편성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교련(敎鍊)은 사관생도나 학군후보생, 군사학과 등 군사교육이수자가 아닌,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에 재학중인 일반 학생들에게 실시된 군사 관련 교육훈련 과목이다.

대학 교련은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1988년에 폐지되었고, 고등학교 교련은 단계적으로 총검술, 제식훈련 폐지를 거쳐

1997년 부터 선택과목으로 전환되어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후2011년에 '안전과 건강'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완전히 폐지되었다.





ㅡ출처 : 위키백과ㅡ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부산 구덕경기장에서



인천 숭의공설운동장에서




본부석에 <고교 교련 합동 사열및실기대회>글자가 보입니다

남학생들 뒤에 서있는 여학생들의 모습에서 남녀를 구분하던 시대상이 엿보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녀님 까지도 거수경례를 하던 시절 이었읍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1971년)때 숭의동 공설운동장에서 치러진  인천시내 고등학교 교련실기대회에

연대장 이었던 병철이(미얀마에서 목회중)와 함께 기수로 참가 하였읍니다


저(모자 쓴이)는 2011년 2월 14일 낙섬일사회 정기모임에서

고등학교 졸업(1973년)후 38년만에  병철이(빨간색 윗옷차림)를 다시 만났읍니다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는 제가 군대생활을 할적에 고참졸병 할것없이 다함께 즐겨 부르던 노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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