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인천의 극장들과 신금단 이야기 본문
인천출신 여배우인 도금봉(1930~2009) 주연의 유관순 영화(1959년 제작) 포스터
제가 태어나고 자랐고 지금도 살고있는 인천에는 과거에 무척 많은수의 극장이 있었는데
초등학생 시절에는 단체영화관람 으로
대구의 일기장 어린이가 주인공 이었던<저 하늘에도 슬픔이>, 삼일만세운동의 <유관순>과 <돌아오지않는 해병>등을 관람 했었고
부모님과 함께 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씨가 주인공으로 나온<내주먹을 사라>와
신금단 부녀상봉을 다룬 <눈물의 신금단>영화를 보았었고
어머니께서 좋아하셨던 여가수한명숙씨가 인천에 오면
부모님과 저희집에 세들어 살던 신혼부부와 함께 애관극장 으로 쑈구경을 하러가곤 했고
고교 졸업후와 군입대 전후에는 연인과의 데이트를 목적으로 영화관람을 하곤 했었는데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의 인천에는 애관과 미림극장 정도가 남아서
그 많던 극장들에 얽힌 추억을 말해주며 맹맥을 유지하고 있읍니다
신금단
해방이후 우리나라가 올림픽이나 국제육상대회 대회에서 거둔 성적은
황영조와 이봉주 선수가 마라톤에서 활약을 했던 1990년대를 제외 하고는 실로 보잘것 없는 세계육상계의 후진국 이지만
1964년 일본의 도쿄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전세계 육상계의 이목은
북한의 여자육상선수인 신금단선수에 집중되어 있었던때가 있었읍니다
선수시절의 신금단
북한 육상의 살아있는 전설인 신금단(1936년생, 압록강체육단 연구사)의 국제대회 성적
1962년 7월 소비에트 연방(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즈나멘스키 형제상(兄弟賞) 쟁탈 국제육상경기대회
8백m(2분1초), 4백m(53초)에서 각각 1위
1963년 6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즈나멘스키 형제상(兄弟賞) 쟁탈 국제육상경기대회에서
8백m(2분4초6), 4백m(52초2)에서 각각 1위
1963년 9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1회 가네포 대회
2백m(23초5), 4백m(51초4), 8백m(1분59초1)에서 세계기록으로 1위
하지만, 이 세계기록은 가네포 대회 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육상경기연맹으로부터 공인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음
가네포(GANEFO : 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 신흥국 경기대회. )
1962년에 인도네시아, 중화인민공화국, 아랍 연합 공화국의 주도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12개국이 신흥국 경기연맹을 창설하고,
이듬해인 1963년 11월 1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제1회 신흥국 경기 대회를 개최했다.
신흥국 경기 대회는 주로 사회주의 신흥독립국들이 참가했으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가네포 대회 출전 선수는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신금단이 출전하는 여자육상에서 금메달 두세개 회득이 확실시 되던 북한선수단에게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가네포 대회 출전 선수는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하고
북한은 신금단은 물론 전 선수단을 도쿄에서 철수를 시킵니다
신금단 압록강체육단 연구사
"신금단 선수는 선수생활 동안 11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국제경기에서 28개의 금메달을 쟁취했다"
ㅡ 북한 언론매체 조선신보 ㅡ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辛文濬, 1916년 ~ 1983년 12월 27일)은 1.4후퇴 당시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 남한으로 내려갔고
신금단은 나머지 가족과 함께 북한에 남게 되었다.
신금단의 활약이 남한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안 신문준이 대한올림픽위원회를 찾아가 신금단이 자기 딸임을 호소했고
북한의 신금단도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수긍했다.
이 둘의 만남을 남북이 합의하기에 이르러 도쿄 올림픽이 끝난 후 귀국하기 전에 만나기로 했으나
북한 선수단의 도쿄 올림픽 철수 결정으로 어려워지게 되었고
철수 전에라도 만나자는 이야기로 진행되었으나 이마저도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대한 각 측의 입장 차이로 계속 미루어진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합의가 되어 두 사람은 10월 9일 도쿄 조선회관에서 13년 만에 상봉의 기회(상봉시간 10분 조건)를 가졌다.
신금단을 남한으로 끌고 오려 한 중앙정보부의 지시를 받은 신문준이 남한으로 오라는 말을 하자 신금단이 거절하고
헤어질 때에는 조총련 구성원들이 신금단을 끌고 나가버리는 등 다소 어색한 만남은 13분만에 끝이 나고 만다.
만남의 마지막에 신금단이 외쳤다는 "아바이!"라는 말에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눈물의 신금단>(노래:황금심)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 답동광장
사진 정면 멀리 인천 우체국이 보이고 오른쪽의 삼각형 지붕건물이 키네마극장(현 외환은행 건물) 입니다
<동방> <애관>과 함께 신포동의 르네상스를 구가했던 <키네마>
우리나라의 여섯 번째 지역은행인 인천은행의 개점식이 1969년 12월 8일 신포동 키네마극장에서 거행되기도 했읍니다
키네마극장 옆에 있었던 동방극장
지금은 인성여고의 다목적관으로 사용되고있는 옛시민회관 (1956년)
1960년 시민극장
지하도(점선)가 생기기전인 60년대 후반의 동인천역 광장
사진 왼쪽에 사라지기 전의 인영극장(지붕에 인영극장 글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진 오른쪽 높은 건물이 별제과,별다방(현 대한서림)건물 입니다
인천극장
1960년 4,19 학생의거 당시의 미림극장
사진왼쪽 벽돌건물 에 미림극장 글자가 보입니다
오성극장
창영동쪽에 출입문이 있엇던 문화극장은 훗날 출입문을 송림학교쪽으로 새로내고 이름도 피카디리가 됩니다
현대극장
1960년대 초반
자유극장
장안극장
숭의 공설 운동장 왼쪽에 붙어있다싶이한 삼각형 지붕의 단층건물이 도원극장 입니다
사진정면 가운데에 도원극장 건물의 벽 일부분이 흰색으로 칠해져있고
그흰색 바탕에 도원극장 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읍니다
사진 왼쪽 아래에 도원 야구장의 옛 전광판 건물이 보입니다
주안의 중앙극장(초창기에는 이극장의 이름이 아폴로극장 이었읍니다
부평에는 부평역전의 대한극장과 길건너편의 금성극장 그리고 부평시장 근처에 부평극장이 있었읍니다
부평 산곡동(백마장)의 백마시장안에 있었던 백마극장
용현시장(옛 한일시장)의 한일극장이 있었던 자리
제가 중학교 3학년생 일적에 저희 부모님 께서는 용현고개 근방의 우리주택 입구에서 구멍가게를 하셨었읍니다
당시 한일극장에서 저희가게에 상영될 영화포스터를 붙이는 대가로 극장표라고 불리우던 영화관람 할인권 몇장을 주었었읍니다
부모님 몰래 삥탕을 친 돈과 함께 할인권을 쥐고 수시로 드나들었던 한일극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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