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설날과 전족 그리고 뙤놈의 추억 본문
2016년 설을 즈음하여 초등학교 동문카페에 올린글
때때옷(비록 나일론제품 이지만), 세뱃돈, 각종 먹거리등으로 기다려졌던 설날 이었는데
어느덧 설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 나이에 들기도 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인 지금의 청장년세대들을 보아서라도
비록 우리민족의 고유 명절 일지라도 드러내놓고 설을 즐기자는 이야기를 하기가 꺼려지고
막연하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를 건네기도 멋적군요
그래도 설은 설이기에 제 개인적인 설에 대한 기억과 옛사진 한장 올려 봅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 흔적은 커녕 위치파악 조차 어렵겠지만
우리들 어렸을적에 유공 정문 바로앞에는 중국 음식점이 하나 있었읍니다
어느해 설날 즈음에 친척 어르신께 그집에서 짜장면을 얻어먹는 횡재를 했었는데
그때 그 식당에 전족(纏足)을 한 중국여인들의 모습이
저의 어릴적 설에 대한 기억중의 하나로 남아 있읍니다
지금이야 우리나라 사람들도 중국음식점을 운영 하지만
70년대 까지만해도 중국음식점은 화상(華商 : 청나라 상인들을 일컫는 말)들의 차지 였었기 때문에
청요리집,중국집이라 불렀는데 우스개 소리로 짱게집 심지어는 뙤놈식당 이라고도 불렀었지요
당연히 중국 음식점의 계산대에는중국여인이 앉아 잇엇는데
이들 10명중 9명 이상은 어김없이 전족 이엇읍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을 큰나라(大國)이라 불렀었고
중국사람들을 대국사람이라 불렀읍니다
우리나라 에서는 어떠한 개인에 대하여 부정적인 호칭을 할때 사람 대신 놈 이라는 표현을 하지요
대국사람은 대국놈으로 부르다가
그들중의 일부가 잘 씻질않고 꿰재재 하기에 땟국이라는 표현을써서 땟국놈이 되었다가
줄임말로 때놈 또는 뙤놈이 되었을거라는 저의 생각 입니다
전족(纏足)
주로 한족에서 행해졌고, 소수민족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
보통 3~4세 여자아이의 발을 목면으로 감아 발의 성장을 저지시켜 그 형태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데,
발의 크기는 약 10~13㎝에 머무르게 되고, 5~6세가 되면 기본적 형태가 완성된다.
이후 전족포를 벗기고 전족용의 신발을 신는다. 전족이 시작된 것은 송대 이후라고 한다.
전족을 하면 뼈가 가늘게 되어 여성의 몸 전체가 섬세하게 되는 미적 효과를 볼 수 있다.
전족을 하면 집오리가 걷는 것처럼 뒤뚱거리거나 성기관의 특수한 발달을 촉진시켰다거나
부녀의 정절을 지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 때는 전족을 금지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다가,
청대 말기에 태평천국 등 민간에서 폐지운동이 일어나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ㅡ DAUM 백과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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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카페에 <이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사진 입니다
60년대에는 히다찌라고 불리웠었고 한때는 대우전자 공장이 있었던 동네 이지요
수인선 용현역의 협궤열차 철로위의 널뛰기 풍경 입니다
변변한 설빔은 커녕 두툼한 바지와 스웨터, 그리고 싸구려 털신...
사내 아이들은 상고(삼부머리), 계집아이들은 단발머리 일색 이었지요
그시절 설즈음이면 흔히 볼수있던 우리들 모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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