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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半島

참담함과 부끄러움

매루 2023. 3. 6. 20:29

 

윤석열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배상금을

국내 기업 돈으로 지급하는 방안을 ‘해법’이라며  6일 발표했읍니다.

이에 대하여 일본 가해 기업들의 배상 참여나 사과는 없고

일본 외무상 조차도 ‘과거 담화를 계승한다’는 차가운 언급뿐  ‘사과와 반성’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읍니다.

피해자들의 수십년 힘겨운 싸움과 그 결실인 대법원 판결 등을 모두 후퇴시킨 참담한 굴욕적인 ‘해법’입니다.

과연 윤석열이라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커녕  과연 그가 한국사람인지 조차 의심이 듭니다  

 

일제에 맞서 갖은 고생을 하며 일제에 맞섰던 순국선열들을 뵐 염치가 없는 참담한 오늘 입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과 광주전남역사정의평화행동은 6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 5·18민주광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윤석열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기금을 국내 기업 단독으로 조성하는 ‘제3자 병존적 채무 인수’ 방안으로 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6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 5·18민주광장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와 지원단체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회원들이 정부 합의안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독립을 6개월 앞두었던 1945 2 16일 오전 3 36,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간도 출신의 조선 청년 윤동주(尹東柱, 1917~1945)가 스물일곱 짧은 생애를 마감했읍니다. 

일본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을 다닐 무렵부터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당하다가 었던

 1943 7, 귀향길에 오르려다 일경에 사상범으로 체포된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이듬해 3월에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心讀)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판결문)을 한 혐의"

 징역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1945 2 16일) 윤동주의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었고

그해 3월에 고향인 간도 용정에서 장례식이 치러졌읍니다 

 

 

사상범으로 체포되기 전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일본 유학시기였던 1943년 5월경에 찍은 사진으로

두어달 뒤인 1943 7 치안유지법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됩다

 

 

▲ 윤동주의 장례식.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3월에 고향인 간도 용정에 묻혔다.

 

▲ 북간도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무덤. 조부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돌로 비석을 썼다고 한다.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윤동주의 출생지인 명동촌(동쪽은 조선을 의미, 즉 조선을 밝히는 마을이란 뜻)

그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마을의 정신적 리더이자 윤동주의 외숙부인 김약연 목사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한 인물로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25년 4월  송명규와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1931년 3월 졸업한 후

 대랍자(大拉子)에 위치한 중국인 소학교인 화룡현립제일소학교 6학년(졸업반)에 편입하여 1년 수학했다.

이 때의 경험은 그의 시 <별 헤는 밤>의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이란 구절로 나타난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이렇게 멀리 유학와서 어렵게 들어간 숭실중학교는 1935년 연말부터 신사참배 문제로 당국과 갈등을 겪다가

1936년 1월 총독부 학무국장의 명령으로 교장이 해임되고 동맹휴교가 이어지면서 공전하게 되었rh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평양으로 유학와있던 윤동주는 불과 반 년만에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4학년 수료)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국학 연구의 산실이었던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는 최현배에게서 조선어를, 

손진태에게 역사를, 그리고 이양하에게 영문학을 배웠다.

그의 오촌 당숙인 윤영춘은 윤동주가 최현배를 깊이 존경했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연희전문 입학 후 조선어로 정제된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생회의 문예지인 <문우> 발행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렇게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은 윤동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으며,

이때 그의 많은 명시가 쓰였다.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

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1941.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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