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어렸을적 성탄절 본문
지금은 교회에 다니질 않지만 저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렸을때부터 기독교신자 였읍니다
어려서는 <믿음,소망,사랑>으로 요약돠는 성경속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자랐는데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교리나 십계명의 가르침과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죽어 천당에 가기위하여 예수를 믿는..." 모습으로 비쳐지는교회의 모습들이 싫어졌읍니다
(물론 일부 대형교회의 이야기 인데 이들의 모습은 마치 대한민국의 모든교회 모습인양 비쳐집니다)
어렸을적 성탄전날 흰고무신에 두루마기차림의 목사님께서 이야기해주셨던
베들레헴, 동방박사, 말구유의 아기예수 탄생 이야기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성탄절의 의미가
코로나 시국으로 혼돈 스럽습니다
저의 어머니 께서는 1929년에 황해도 장연의 부잣집(금광을 운영하시던 박면장님댁)의 막내딸로 태어 나셨고\황해도 해주의 명문여고였던 행정고녀를 졸업후 서울의 중앙대학교에 진학을 하셨읍니다
인천의 이천전기 공장장에게 시집을 온 친정언니부부의 관사에 묵으며 통학을 하던 어머니는
한국전쟁통에 졸지에 학업을 중단하게되고 1954년에 같은고향(황주)출신이신 저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십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던 1961년부터 어머니께서는 고모부께서 운영을 하시던 성동원에 출근을 시작 하셨읍니다
영어실력이 있는 직원이 있어야어야 선명회의 도움을 받을수 있었던
고모부의(당시 성동원 이라는 고아원 운영중)집요한 요청과 설득 때문 이었지요
성동원 에서 어머니가 하셨던 여러가지 일들중의 하나는
선명회를 통하여 성동원의 고아들을 외국의 후원자들과 양부모관계를 맺게한후
서로 주고받는 편지들을 번역하여 소통하게 하는 일도 있었읍니다
당시 외국의 양부모(후원자)들은 후원관계를 맺은 한국의 고아들에게 정기적인 후원금을 보내오는것을 비롯하여
해당 고아의 생일날 그리고 성탄절에 많은선물들을 보내 주었었읍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우리는 가난한 나라에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후 선진국으로 부터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들 중에서
원조국이 된 유일한 나라가 되었읍니다
![](https://blog.kakaocdn.net/dn/cSFTuv/btroQNWPZij/dewHjrc2TqNREdD8mUGC81/img.jpg)
1960년대 후반 성동원 근무때의 어머니 모습 (어머니의 옷차림으로 보아 여름계절로 보입니다)
![](https://blog.kakaocdn.net/dn/SAi6k/btroQjPdVnq/rLStCIfnI49jl4wvByjEM0/img.jpg)
성탄절을 즈음하여 외국및 각계각지에서 들어온 선물(성품)들과 목록을 살펴 보시던 모습
어머니 뒷편의 생활한복차림의 여성은 어머니의 동료직원 이셨던 방선생님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