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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족 이야기

이모님. 어머니 산소

매루 2021. 3. 16. 21:50

 


MBC 문화방송 ‘이제는 만나야 한다’에서 수고하시는 여러분께 드립니다.

먼저 이산가족들의 숙원인 북의 가족 찾기를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1998년 이산가족 생사확인을 신청한바 있는 고향이 황해도 장연인 1925년생인 박연화 할머니입니다.
문화방송 사장님께서 두 차례 격려서신을 보내주신데 대하여 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MBC 문화방송 여러분들이 애쓰시어 1500명의 가족이 거처 및 생사가 확인되어

올가을부터 재회할 수 있다는 방송을 접하고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그런데 내 가족은 아직 생사를 모르고 있어 너무나 답답합니다.

남한에는 내 여동생과 6촌동생만이 살다가 두 동생 모두 세상 떠나고 나 홀로 살고 있으며

저 역시 병노하여 여기저기 다니지 못해 수소문할 수도 없고

제 3 국에 연고도 없고 나의 힘으로는 알길이 없으니

오직 MBC 여러분들만 믿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만남의 그날까지 애써 주시기 바라며 건강하시고 계획한바 일이 다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고향 장연(황해도) 낙도면에는 친인척이 많이 살고 있었고

나의 부친 박치남(朴致楠)씨는 장연군 죽계리에서 사과밭과 전답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생활했으며

1951년 1.4후퇴시 여식을 남하시키고 조카를 설득시켜 남하하시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숙청되어 돌아가셨다는 말을 유격대원들로부터 들은바 있는데

돌아가신 날을 알고싶고 나의 시가인 장연군 선정리에다 시부모 시누이들과

내 아들(당시 6세)을 놓고 왔는데 시부모 돌아가신 날과 내 아들 생존을 알고자 합니다.

친정 아버지 박치남(朴致楠) 어머니 朴五仁
시아버지 윤성대
아들 윤용남(55세)

친정 : 황해도 장연군 죽계리 낙산농장(세칭 엄소뿌리)
시가 : 황해도 장연군 선정리 (세칭 장방꼴)

1999년 6월 22일 신청인 : 박연화

 

 

 

 

 

 

어제(3월 16일) 서구 마전동에 계시는 이모님을 뵙고 왔읍니다

이모님은 한국전쟁후에 태어난 저희 형제들의 가계(家系 혈연이나 혼인 관계 따위의, 한집안의 계통)에서

올해 97세로 마지막 1세대 이십니다

 

 

많이 힘들어 하십니다

 

이모님께서 저희 형제들에게 남기실 유서(遺書)가 든 봉투

 

 

 

이모님을 뵙고 근처이 있는 어머니의 산소를 둘렀읍니다

어머니의 산소 들머리인 완정사거리 한켠에 목사동생의 시비(詩碑)가 보입니다

 

 


인천 서구 완정사거리에는 '완정(完井)사거리'라는 시비(詩碑)가 있다.

이 시는 검단4동에 위치한 마전교회 김광후(55) 목사의 작품으로 시비는 지난해 7월 세워졌다.

종교를 초월한 김 목사의 유별난 지역사랑에서 빚어진 작품이다.

10일 오후 마전교회에서 만난 김광후 목사는 "동네마다 좋은 이름이 있고, 전설에 따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데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시화되면서 이런 이야기가 흙더미에 같이 파묻히는게 너무 아쉬웠다"며

"이 시는 내가 사는 동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계양구에서 목회를 하다 1991년 검단으로 왔다는 김 목사.

그는 자연부락이 많았던 서구 검단지역이 점점 도시화 되면서

향토성과 옛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 목사는 검단4동 주민센터에 지역의 향토성을 간직하고

문화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사업을 해야한다고 제안했고,

환경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완정사거리에 시비를 세울 수 있었다.

김 목사는 "완정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완전한 우물이라는 뜻이다.

유래를 살펴보니 이 일대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물이 많아서 주민 모두가 다 마실 수 있는 우물이었다고 하더라"라며 "내가 사는 동네에 완정이라는 아름다운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시비에 특별히 교회 이름이나 목사 직함을 쓰지 않은 것은

목사가 아닌 주민 '김광후'로 평생 살고 싶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김 목사가 지역사회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은 지난 2007년 여름 아프가니스탄 한국인선교단 피랍사건 때부터다.

당시는 국내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높을 때였다.

그는 "한국교회가 국내외에서 정말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하는데 왜 국민들은 이를 몰라줄까 생각해보니

지역사회와의 밀착이 없었다"며 "이때부터 모든 목회 방향을 지역주민과 함께하자고 정하다보니

진짜 지역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이때부터 '주민함께 검단사랑 바자회'라는 바자회를 매년 개최, 수익금을 지역에 기부하고 있다.

최근엔 바자회 수익금 1천500만원을 검단의 각 지역 청소년 장학금으로 사용해 달라며 검단4동 통장들에게 전달했다.

김 목사는 "우리 지역의 이름과 분위기, 조상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라며

"이것을 지키는 것이 바로 지역 학생들에게는 말 없는 교육이 될 것이고,

지역의 자산가치는 올라가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2.01.11 경인일보/김민재기자

 


 

황해도 장연에는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33년 장연읍의 독지가들이 뜻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고 향토와 황해도 내의 농업 발전에 기여하고자 설립한 장연공립농업학교가 있다.

한편, 이 군은 황해도의 서단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상

몽금포·비석포(碑石浦)·구미포·아랑포 등 배가 닿을 수 있는 포구가 많아

향리에서 초등 교육과정을 마치고는 해상 교통을 이용하여 진남포·평양·인천·서울 등지로,

육로로는 해주·개성 등지로 유학하는 진취적 기상이 일찍부터 조성되었다.

이와 같이 대부분 외지로 유학하는 이유는 군내에 걸출한 대부호가 없었다는 점도 복합적 요인의 하나였지만

전반적인 군세(郡勢)에 비하여 장연농업학교를 제외하고는 중등 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육세(敎育勢)가 저조한 반면,

문화면에서는 중국과 인접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불교 및 기독교의 선착지가 되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군민의 의식 개혁이 다른 지역보다 앞서갔다.

무엇보다도 문향(文鄕)으로서의 전통과 긍지를 지니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우리 나라 현대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양주동(梁柱東)·강경애(姜敬愛)·노천명(盧天命) 등의 문인이 배출되었다

 

 

 

 

 

2017 한가위때 어머니 산소 입구의 경치(제아내와 작은딸의 뒷모습)

 

 

 

아파트신축 공사 때문에 어머니의 산소가 있는곳으로 들어가는 길도 바뀌고

 

 

 

산소 주변의 지형도 많이 달라졌읍니다

 

 

 

어머니께서 저희들의 곁을 떠나신지도(향년 69세) 어느덧 24년이 지나

맏아들인제가 당시 어머니의 연세에 닥아서고 있읍니다

 

 

 

 

재작년(2019. 9. 13.)한가위때

어머니의산소아에 모인 이모님과 가족들

 

 

 

 

어머니의 산소 바로 뒤에는 둘다섯 영철씨의 부모님께서 영면해 계십니다

 

 

 

2016년 한가윗날 영철씨 가족

 

 

 

어머니의산소 들머리에있는 아느 아파트의 화단에 목련꽃이 피어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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