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1,21 본문

韓半島

1,21

매루 2021. 1. 21. 22:51

 

 

1. 청와대 습격시간은 밤 8시이며 당일로 복귀한다.

 

2. 습격 소요시간은 3∼4분간이며 증원군의 추격을 받지 않도록 한다.

습격 전날 북악산 부근에 숙영하여 청와대를 관측, 정찰한다.

 

3. 전원 사복으로 갈아입고 취객(醉客)을 가장하여 접근,

유격대원끼리 시비를 걸다가 기회를 포착, 청와대 초소를 기습한다.

 

4. 제1조는 청와대 2층을 기습, 기관단총으로 무차별 사격하여 인원을 살상하고 수류탄을 투척한다.

제2조는 청사 1층, 제3조는 경호실, 제4조는 비서실,

제5조는 정문 보초 및 기타 보초 등을 맡아 살상, 파괴한다.

운전조는 차량을 탈취하여 탈출 준비를 완료한다.

 

5. 습격이 끝나는 즉시 분승하여 문산 방면으로 도주, 그날로 복귀한다.

 

 

1.21 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를 목표로 휴전선을 통하여 침투,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한 사건으로

 무장공비 31명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청와대 뒤편인 세검정까지 침투하여

 아군과 교전하다 29명이 살해되고 한 명은 북으로 도주하고 김신조만 투항함


이 사건을 계기로 3사관학교가 생기고 향토예비군 창설과 학생군사훈련(교련)이 실시됨

 

 

 

풀린 혁대로 손을 묶인 채 인근 홍은동 파출소로 연행되어온 김신조

 

 

 

1968년 1월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124군 부대.

영하 25도로 떨어진 초강추위 속에

남파 특수공작원 31명을 태운 버스가 어둠을 타고 부대를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개성 남동부에 위치한 남파공작원 초대소.

얼어붙은 표정의 20대 초중반의 청년 장교들은 24kg에 달하는 꽉찬 배낭을 저마다 하나씩 울러멨다.

모두가 하사관에서 하루 아침에 소위로 임관되는 파격적인 계급승진을 며칠 전 경험한 뒤였다.

그 중 2명은 대위와 중위로 승진했다.

배낭 내용물은 다양했다. 사단 마크가 달린 남조선 군복 일습, 일제 바바리코트에 신사복 한벌,

운동화, 손목시계, 망원경, 트랜지스터 라디오, 지도,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

비상 약품,찹살가루를 섞은 엿, 오징어 등 비상식품, 그리고 30발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련제 기관단총,

8발이 장전되는 소련제 권총, 방어용 수류탄 8개, 대전차 수류탄 2개, 단도…

당초 대원은 76명이었으나 돌연 31명으로 축소됐다.

공격 목표가 청와대만으로 압축된데 따른 조치였다.

원래의 타깃은 청와대 외에 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 5개소였다.

가히 휴전 이래 최대라 할 만한 초특급 작전이었다.

 

 

1968년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이 1,24군 부대원들에게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림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


17일
- 20:00 북방한계선 돌입
- 23:00 남방한계선 돌파

18일
- 02:00 임진강 북쪽에서 1숙영지를 편성.
- 21:00 1숙영지 출발
- 22:00 임진강 빙판위를 걸어서 도섭

19일
05:00 파평산 부근 삼봉산 능선에 2숙영지 편성

14:00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침

19:00 나무꾼들을 풀어줌

21:00 공비들 2숙영지 출발.

나무꾼들이 파출소에 신고.

이 시점부터 대한민국의 대응시작

 

21일
 05:00 비봉 동쪽에 4숙영지 편성[19]
19:00 공비들 사복 환복 후 서울시내 돌입
21:55 이각현 서장이 발견
22:05 종로경찰서원이 검문실시, 이어 교전발생

 

 

 


 

올 해로 1.21사태 52주년. 서울 성락교회 원로목사로 활동 중인 김신조 목사 

 

 

김신조의 증언

 

전날 밤 환송회에서 대취했던 대원들은 최전성기의 체력을 과시라도 하듯,

이미 평소의 모습으로 말끔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추위 속에서 더욱 맛을 내던 소련제 보트카에 북한 인삼주, 박하술에 생강주,

생맥주…먹다 남긴 닭고기, 돼지고기가 다시 눈앞에 삼삼했다.

『남조선 해방을 위해 남조선 수괴를 처단하는 막중임무』를 강조하던 124군 부대장의 말이

청년엘리트 전사 김신조의 폐부에 아직도 비수처럼 꽂혀있었다.

그 부대장은 불과 1년반 전 남파돼 경기도 송추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려다 군경 포위망에 걸려 도주,

복부에 총상을 입고 5일만에 임진강을 건너 귀환한 경력을 가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다음날 새벽, 한때 개성경찰서장의 관저이기도 했던 남파공작원 초대소에 도착했다.

대원들이 남파직전 잠시 대기하거나 귀환한 다음 하루를 자고 가는 곳이었다.

인삼차를 마시며 40분 휴식을 취한 후 바로 남으로 향했다.

북방 분계선 초소에 도착하자 초병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이 「특수전」의 사나이들을 바라보았다.

부대장의 제의로 즉석에서 『수령동지의 명령대로 임무수행할 것을 맹세함』이란 혈서를 썼다.

『임무 . 1조는 청와대 본청사 2층, 2조는 1층, 3조 경호실, 4조 비서실 공격.

5조는 정문 보초 제거 및 청와대 차량 탈취 후 탈주 준비』

 

​중략

청운중학교 조금 못미처 내리막에서 지프 하나가 길을 막아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종로경찰서장』이라며 대원들의 신분을 추궁했다.

『귀대중인 방첩대』라고 하자 『나를 모르는 방첩대원이 어디있느냐』고 심문하듯 말했다.

누군가가 서장에게 총을 발사했고 대원들은 길 양쪽으로 흩어졌다.

김신조를 따라 도주하던 대원 2명이 홍제동 길에서 처참하게 사살되는 광경을 코 앞에서 목격한 뒤였다.

그보다 나이가 어린 그 두 대원은 노련한 군경력을 갖고 있는 그를 본능적으로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적진 속에서, 특히 시가지 전투에서는 여럿이 몰려다니는 것이 위험하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흩어져 뛰라』는 그의 말도 아랑곳 않은 채 따라붙었다. 홍제동 쪽으로 접어드는 큰 길이 앞에 열렸다.

길 건너에는 수색대가숨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그러나 그 길을 건너야만 진로가 열리게 돼있는 상황이었다.

좌우로 나눠 건너뛰라고 지시했다.

길로 나서는 순간 집중 사격이 쏟아졌고 대원 둘은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다.

김신조는 언덕바지 숲 사이로 뛰어내려갔다.

경복고 후문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인왕산으로 튀어올랐다.

가는 데까지 북으로 튀자는 생각이었다 . 다행히 아직 총은 한 발도 쏘지 않았다.

붙잡히더라도 살인누명은 쓰지 않는다.

 무기를 모두 산에다 버리고 위협용 수류탄 하나만 남겨 간편한 몸으로 뛰었다.

인왕산 능선에서 바라보니 시내전역이 수경사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환했다.

당시 청와대 경비를 맡았던 수경사 예하 30대대의 지휘관은 67년부터 전두환 대대장이었다

인왕산 서북쪽 8부 능선을 타고 올랐다. 새벽 3시. 차가운 밤 하얀 초생달이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흥건하게 젖은 땀이 채 마를 새도 없이 연신 새로운 땀이 솟아올랐다.

일이 성사됐다면 지금쯤 임진강을 넘어섰을 시간이다.

틀린 것 같다. 자폭할까, 항복할까.

3년 넘도록 한번도 보지 못한 가족들의 얼굴이,그리움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문득 눈앞이 아득해지며 허깨비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위 뒤편에 잠복하고 있던 군인과 마주쳤다.

수류탄을 들고 잠시 대치했다. 찰나의 시간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듯 느껴졌다.

투항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순간적인 결정이었다.

뭐라고 외치는 상대의 말을 귓전으로 스치며 맥없이 수류탄을 땅에다 떨궜다.

풀린 혁대로 손을 묶인 채 인근 홍은동 파출소로 연행됐다.

머리 속이 멍해올 뿐, 마음도 몸도 무감각했다.

파출소 안이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이 쏟아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