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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다

김홍일

매루 2019. 4. 23. 22:19





김홍일과 유튜브

CBS노컷뉴스 문영기 논설실장


김홍일 전 민주당 의원이 별세했다. 올해 일흔 둘이다. 
요즘의 추세로 볼 때 장수했다고 볼 수는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돌아가시기에 너무 이른 나이라고 아쉬워 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병마와 싸워온 그의 인생 후반부를 감안하면 안타까움이 적지 않다. 
김 전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맏아들이자 정치적 동지다.

 DJ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했던 정적(政敵)이었고,

그래서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훨씬 모진 핍박과 음해가 가중됐다. 

김홍일 전 의원은 본인이 스스로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선 탓도 있지만,

정치인 DJ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더 큰 시련을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김 전의원은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이어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가해진 고문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책상에서 시멘트 바닥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고,

그 후유증으로 그는 평생을 병마에 시달렸다.

건장했던 그가 아버지 DJ의 장례식 때 몸조차 제대로 못 가누는 초췌하고 상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가 만일 DJ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혹독한 고초를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적의 목숨을 위협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아들까지 잡아다 고문한, 엄혹한 독재와 야만의 시절이었다.  
그 후 수많은 희생과 투쟁으로 어렵게 얻어낸 민주화된 이 땅위의 정치현실은 어떤 모습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말조차 맘대로 할 수 없고 책조차 맘대로 읽을 수 없었던 시대가 끝나고,

두려움 없이 정치적 주장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지금 정치권 주변에서는 어떤 말들이 쏟아지고 있는가.
국정농단으로 정권을 잃은 세력과 그 전직 대통령을 옹호하는 극우세력은

소통의 장이 된 유튜브라는 공간에서 거친 비난과 검증되지 않은 거짓 뉴스를 멋대로 퍼뜨리고 있다.

일부 정치세력은 극우세력의 막말에 가까운 표현과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악용하고 있다.  
정치판은 이제 예의도 사라지고, 지켜야 할 금도도 사라진 막말의 경연장이 된 느낌이다.

김홍일 전 의원은 단순히 DJ의 아들로만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정적의 아들까지 탄압한 이성 잃은 독재의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 온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살던 시절보다 훨씬 자유롭지만 그때보다 훨씬 야만스러운 언어가 넘실대는 지금의 정치현실을 보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DJ 장남' 김홍일 전 의원 별세

"대통령 아들에겐 멍에 뿐"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민주당 의원이 420일 향년 71세로 별세했다

 김 전 의원은 1990년대부터 뇌질환의 일종인 파킨슨병을 앓아왔다.

80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3년형을 받고 수감됐을 당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주변의 말이다.

 

김홍일 전 의원은 2009819일 아버지(DJ)의 장례식 때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빈소에서 휠체어를 탄 채 조문객을 맞이하는 김홍일 전 의원은 뺨이 홀쭉해질 정도로 여윈 얼굴이었다.

풍채가 좋았던 그를 기억하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1972년 공군중위로 만기 전역한 김 전 의원은 그 전까지는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 활동을 돕다가 건강을 잃은 맏아들에게 항시 애틋한 마음이었다고 전해진다.


대학원 1학년 때인 71,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온갖 고초를 당했다.

알고 보니 서울대생들이 주축이 된 학생운동조직체인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의 배후 조종자란 혐의였다.

그는 이때의 고문으로 허리를 다쳤다고 한다.

19805월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신군부로부터 고문을 받았다.

당시 책상 위로 올라가 그대로 땅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떨어질 만큼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이때 목을 크게 다쳤다.

 

그후로도 1987년 정치적 사면복권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정권의 감시를 받았다.

 김홍일 전 의원은 이 책 등에서 친구나 외부인사를 만나면 기관원이 바로 옆자리에 앉아 누구를 만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를 감시해 가까운 친구들조차 만나기 꺼려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김홍일 전 의원은 1974815일에 윤혜라씨(김구 선생의 경호실장 윤경빈씨의 딸)와 결혼했다.

하지만 마흔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장사를 시작하면 바로 세무조사가 들어왔다.

아버지에 대한 역대 집권자들의 견제와 적대감이 그에게까지 뻗친 것이다.
















이희호는 눈물 속에 김대중·김홍일의 한복 수의를 지었다

고명섭 입력 2016.01.25. 11:06 수정 2017.01.09. 10:56 

  

1980년 8월 들어 전두환과 신군부는 본격적으로 집권 절차에 들어갔다.
특히 언론 장악을 통해 ‘김대중 죽이기’와 ‘전두환 띄우기’ 작전을 각본대로 진행했다.
80년 8월7일 스스로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며 군복을 벗은 전두환은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 하야에 이어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만장일치 추대됐다.
 대통령 취임식은 9월1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8월에 시작된 ‘김대중 내란음모’ 재판은 결론을 정해놓고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놀음이나 다를 바 없었다.

 대다수 국선변호인들은 신군부 하수인 노릇만 했다.

그러는 중에도 변호사 소종팔은 다른 변호인들과 달리 양심껏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소종팔은 검사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내란 사건이라고 하는데, 피고인들은 각목이나 화염병은커녕

부지깽이나 박카스병 하나 가지고 다녔다는 증거는 물론이고 사실 기록조차 기소장에 없다.

도대체 뭘 들고 내란을 하려고 했다는 말이냐?”

소종팔은 재판 중간에 쫓겨나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소종팔 대신 들어선 변호인은 변호사인지 검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검사 편을 들었다.

송기원이 보다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야, 네가 변호사냐, 검사냐? 아무리 조작이라고 해도 그렇지, 도저히 못 들어주겠으니 그만해.”

고성이 오가는 중에 문익환이 벌떡 일어섰다.

 “재판부 기피 신청을 하겠소. 우린 이런 재판을 받고 싶지 않소.”

김대중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재판정을 나갔다.

1980년 8월 ‘내란음모’ 재판 시작
검사도 변호사도 각본대로 ‘착착’
비공개 공판에 필기도구도 ‘금지’
구속자 가족들 한사람씩 맡아 ‘암기’



신군부 권력장악 절차도 ‘착착’
8월27일 전두환 11대 대통령 선출
기자 등 933명 쫓아낸 언론들
앞다퉈 ‘전두환 장군 찬가’
판결 앞서 ‘김대중 죽이기’ 경쟁



9월11일 1심 ‘김대중 사형’ 구형
“이땅에서 다시는 정치보복 없기를”
최후진술에 법정 가득 ‘김대중 만세’
“그날 방청 못해 남편에게 무척 미안”

<조선일보>는 대통령 추대 전인 80년 8월23일
 ‘인간 전두환-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와 행동’ 특집 기사를 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구속자 가족들은 재판정에 들어갈 때 필기도구를 빼앗겼다.

재판정에서 나오는 말들을 기록할 수 없으니 머릿속에 기억해야 했다.

이종옥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한 사람씩 배정했다. 재판관이 하는 말만 외우는 사람, 검사가 하는 말만 외우는 사람,

변호사가 하는 말만 외우는 사람으로 나누었던 것이다.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이 되면 얼른 밖으로 나와서 잊어버리기 전에 자기가 외운 것을 읊어내고 그걸 받아 적었다.

이렇게라도 해야만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김대중의 최후진술은 문익환의 아들 문성근이 방청석에서 외워 기록한 뒤 외국의 언론과 인권단체에 알렸다.

김대중이 남산 지하실과 육군교도소에 갇혀 있는 동안 밖에서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력 장악 절차가 마무리돼 가고 있었다.

신군부는 의식 있는 언론인들을 권력 장악의 걸림돌로 보고 일거에 쓸어버리는 작업을 했다.

6월9일 계엄사는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국론통일과 국민적 단합을 저해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경향신문> 기자 서동구·이경일·홍수원·박우정·표완수, <문화방송> 기자 노성대·오효진,

<동아일보> 기자 심송무를 구속했다.

이어 신군부는 7월30일 언론사 사주들을 협박해 ‘언론계 자율정화 결의’를 끌어냈다.

이 결의를 신호탄으로 하여 보안사·치안본부·중앙정보부가 합작해 작성한 336명의 언론인 명단이 언론사에 내려왔고

그중 298명이 해직됐다.

언론사 사주들은 이 명단에 이런저런 핑계를 붙여 600여명을 더 끼워 넣었다.

쫓겨난 사람은 933명에 이르렀다.

군부와 사주가 합작한 ‘언론학살’로 민주 언론인들은 거리의 낭인이 됐다.

신군부는 <창작과비평> <뿌리 깊은 나무> <씨알의 소리> <기자협회보>를 비롯한 정기간행물 172종도 폐간했다.

정론의 씨가 말랐다.

8월7일 신군부 우두머리 전두환은 스스로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다음날 미국 언론은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의 회견을 실었다.

위컴은 전두환이 곧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면서

 “각계각층 사람들이 마치 들쥐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고 말했다.

 8월11일 <문화방송>은 전두환 인터뷰를 특집으로 꾸며 방송했다.

 대담자는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 이진희였다.

이진희는 <서울신문> 주필로 있던 중 신군부의 눈에 들어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으로 발탁된 사람이었다.

이진희는 전두환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국보위가 발족된 이후 괄목할 만한 사회개혁 작업의 전개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그동안 국보위를 만들고 맡으셔서 노고가 크신데

전 위원장께서는 새 시대를 영도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좋든 싫든 맡으셔야 할 위치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낯이 뜨거워질 곡학아세였다.

<경향신문>은 9월11일 ‘내란음모 사건’ 1심 공판에 맞춰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김대중을 벗긴다’ 특집 기사를 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8월16일 대통령 최규하는 특별성명을 통해 “대통령을 사임하고 권한 대행자에게 정부를 이양한다”고 밝히고 하야했다.

9개월 동안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신군부에 끌려다닌 무력한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국무총리 서리 박충훈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다.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단일후보 전두환을 총 투표자 2525명 중 2524명의 찬성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했다.

<조선일보>는 이튿날 사설 ‘새 시대의 개막-전두환 장군의 대통령 당선에 대하여’를 써

 “우리는 우선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온 국민과 더불어 축하하며 그 전도에 영광이 있기를 희원해 마지않는다”고 찬양했다.

 다른 신문들의 태도도 <조선일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의식 있는 언론인들이 모조리 축출된 언론계에는 학살자에게 빌붙는 세력만 남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기도 전부터 마치 ‘영광의 카펫’을 깔듯 신문과 방송이 앞다투어 전두환 우상화 보도를 쏟아냈다.

<한국방송>은 8월22일 밤 60분 동안 <전두환 장군의 이모저모>를 내보내 전두환을 ‘한민족의 영도자’로 띄워 올렸다.

이진희가 이끄는 <경향신문>은 8월19일부터 4회에 걸쳐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이라는 시리즈를 내보내

 “서릿발 같은 결단력 뒤에는 훈훈한 인정을 느낄 서민풍”이 있으며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청렴결백을 몸소 솔선수범해온 표본”이라고 찬사를 바쳤다.

<조선일보>는 8월23일치 3면 머리기사로 ‘인간 전두환-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을 실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적인 결단은 그를 군의 지도자가 아니라

온 국민의 지도자상으로 클로즈업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12·12 사건만 해도 그렇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쪽에 서면 개인의 영달은 물론이고 위험부담이 없다는 걸 그도 잘 알았으리라. (…)

그러나 그가 배워오고 익혀온 양식으로는 참모총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상관일지라도

 국가원수의 시해에 직간접적인 혐의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혐의가 규명되어야 바른 일이었다.”

12·12 군사반란을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적인 결단’으로 추어올리는 지록위마의 극치였다.

80년 9월11일 예정된 ‘사형 구형’에 이어 9월17일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은 “다시는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최후진술로 법정을 감동시켰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뛰어든 언론은 신군부의 사냥감이 된 김대중에게는 냉혹한 말의 비수를 들이댔다.

<한국방송>은 8월2일 ‘김대중과 한민통’이라는 특집프로그램을 꾸려 김대중을 간첩이나 다를 바 없는 인물로 묘사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는 이중인격자로 만들어냈다.

 저열한 허위보도였다.

<경향신문>은 9월11일치에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제하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김대중, 그는 어떤 인물인가.

달변과 간교한 지략을 내세워 한국의 케네디라는 허상 속에 철저히 가려졌던 그의 참모습은 어떤 것인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화신’ 바로 그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이중인격과 위선에 가득 찬 그의 인생경로는

급기야 자신을 환상적 사이비 지도자로 착각토록 하는 망상증에 사로잡히게 했던 것이다.”

학살자들의 올가미에 걸려 사형당할 상황에 처한 사람을 글로 먼저 죽이는 추악한 인격살해 보도였다.

 전두환 신군부와 양심 없는 언론이 합작해 만들어낸 이 극악한 이미지는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남편을 죽을 곳에 둔 이희호에게는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80년 9월11일 예정된 ‘사형 구형’에 이어 9월17일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은
“다시는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최후진술로 법정을 감동시켰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9월 초 이희호는 둘째아들 홍업이 붙잡혀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홍업은 두 달이 지난 11월5일에야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풀려나 집으로 왔다.

5월18일 이후 다섯 달 만에 만난 모자는 새벽 먼동이 터 올 때까지 이야기했다.

 “그 반년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데 밤을 새워도 모자랐어요.

 홍업이를 숨겨준 분들 중에 세 분이나 구속돼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어요.

김태랑씨도 그때 잡혀가서 짐승처럼 두들겨 맞아 허리를 다쳤어요.

우리 집안을 도와준 분들이 그렇게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한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요.”

9월8일 이희호는 큰아들 홍일을 서울구치소에서 처음으로 면회했다.

“그날 큰며느리를 넉 달 만에 처음으로 만났어요. 출입을 금지하니 우리 집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던 거예요.”

 홍일은 죄수복을 입고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뒤에는 헌병이 지키고 있었다.

이희호는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왜 이 아이가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몸조심해라. 아버지는 면회했다. 건강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이셨다.”

그 말을 들은 홍일의 입에서 “아, 천주님! 감사합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하는 말이 나왔다.

 “홍일이는 모진 고문을 당해 몸이 성하지 못한데도 아버지 걱정만 했어요.

며느리는 옆에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지요.”

9월11일 1심 재판에서 군검찰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문익환·이문영을 포함해 다른 피고인들에게는 무기징역을 포함해 중형이 구형됐다.

이희호가 면회를 가면 김대중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말했다.

 “이 정권이 타협하면 살려주고 원대로 해주겠다고 하는데 나는 죽음을 택하겠소.

내가 떠나더라도 아이들이 바른 길로 가도록 당신이 지켜 주시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노릇을 못해 미안하오.”

 이희호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면회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느낀 괴로운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이희호는 눈물 속에 기도하면서 남편과 아들의 한복 수의(囚衣)를 만들었다.

1980년 ‘5·17 쿠데타’로 영문도 모른 채 일제히 연행돼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로 묶인 24명은 모진 고초를 겪으며 ‘동지’가 됐다.
사진은 김대중(가운데 줄 오른쪽 다섯째)이 미국 망명에서 귀국한 뒤인 85년 무렵 한자리에 모인 ‘5·17 동지’들.
유인호(가운데 줄 왼쪽 둘째부터)·박용길·김종완 등 이미 고인이 된 인물도 여럿 보인다.

김홍일 자서전 <나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는다> 중에서'> 1심 구형에 이어 피고인들이 최후진술을 했다.

이해동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마침내 나의 최후진술 차례가 되었다. 나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당한 혹독한 고문을 폭로했다.

 법정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방청석의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고인들까지 모두 헉헉 흐느꼈다. (…)

그 지하실에서 당한 처절했던 고문 현장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이해동의 최후진술이 끝나고 설훈이 일어섰다.

피고인들 가운데 가장 젊은 설훈은 광주항쟁 소식을 생생하게 듣고 붙잡혀온 터였다.

“나는 저 광주에서 독재에 항거하던 민주시민들이 무도한 군부독재에 무참하게 죽어간 사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문당한 일 따위를 가지고 찔찔 짜기나 하고 있을 때입니까?”

설훈도 참혹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었다.

설훈은 숨어 있던 반포아파트에서 체포되자마자 수갑에 채워진 채 아파트 화장실 욕조에 처박혀 물고문을 당하고,

다시 경찰서로 끌려가 팬티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맞았다.

유치장에 옮겨질 때는 걸을 수 없어 경찰관에게 업혀 들어가야 했다.

9월13일 김대중은 1심 최후진술을 했다. 마지막에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마도 사형 판결을 받고 또 틀림없이 처형당하겠지만 내가 처형당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는 일입니다.

나는 여기 이 기회를 빌려 공동 피고인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김대중의 진술이 끝나자 피고인들과 방청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와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고 ‘김대중 만세’를 외치며 끌려 나갔다.

 “남편이 정치 보복에 반대하고 용서를 이야기한 것은 정치적 신념이기 이전에 종교적 신념이었어요.

죄는 미워해도 죄를 저지른 사람은 용서해야 한다고 남편은 믿었어요.

나는 지금도 남편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이 최후진술을 하는 법정에 피고인의 한 사람으로 있었던 한완상은 그때 느낀 것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공동 피고인 24명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아마도 디제이(DJ·김대중) 최후진술 때가 아닐까 한다.

끓어오르는 의분심을 가눌 길 없어 평생 처음으로 창자로 <애국가>를 불렀다.

디제이는 1시간40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당당히 자기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의 침착함에 나는 놀랐다.

이른바 세인트의 경지에 들지 않고서는 사형 구형을 받았던 피고인이

그토록 태연하고 침착하게 자기 심경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우리는 비록 힘없이 묶여 있는 처지였으나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이미 승리하고 있었다.”

그날 이희호는 법정에 없었다.

 “남편은 최후진술을 하고 난 뒤 우리 가족을 찾으려고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어서

얼마나 외롭고 서운했는지 모른다고 뒤에 이야기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남편에게 무척 미안했지요.

 나는 남편이 수갑을 차고 법정에 들어서는 모습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최후진술을 하던 그날 나는 집에서 철야기도를 했지요.”

9월17일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김대중에게 사형이 선고된 그날 외신기자들이 이희호를 인터뷰하러 동교동을 찾아왔다.

 이희호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찢어질 것 같은 마음에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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