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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금척리 고분, 박목월

매루 2019. 2. 19. 19:07

 

 

 

 

 

 

 

Daum 블로그 유의자연(有爲自然)에서 빌려온 사진 입니다

이사진을 보는순간 저의 마음은  사십년전 청춘군인시절로 돌아가고 말았읍니다

국도 영천~경주 사이의  건천 이라는 곳을 지날때 도롯가에 보이던 금척리 고분군 입니다  

40년전 군생활때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보았던 풍경 거의 그대로이기 때믄 이었읍니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의 김일병

 

신병훈련(논산), 후반기교육(부산 반여동의 병기학교)을 마치고 약 30개월 동안의 자대근무(경북 영천의 탄약창)...

영천의 자대에서 함께 근무를 하던 방위병들, 문관(요즈음의 군무원)들과 친해지게 되고 

다시 생각하고 싶지않은 힘든 졸병신분에서 벗어나 신상이 자유로지면서부터

거의 매주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가깝게 지냈거나(제대한 방위병) 지내는(문관이나 방위병)이들의 호의로

그들의 집에서 외출이나 외박을 하였었고

좋은계절인 봄이나 가을이면 영천에서 버스로 편도 1시간 거리의 경주로 외출이나 외박을 참 자주 다녔었읍니다

영천과 경주 사이에는 건천 이라는곳이 있었는데

버스가 그곳을 지날때면 차창밖으로 규모가 제법 커다란 무덤들이 보여 시비로움을 느끼곤 했었는데

그곳이 바로 금척리 고분군 이었고 그옆 모량리가 박목월 시인이 태어난곳 이라는것을

같은 내무반의 손씨 성을 가진 건천출신 선임병으로부터 자주 듣곤 했었읍니다

건천(모량리)은 경주손씨의 시조인 손순의 묘가 있는곳 이기도 합니다

 

 

 

 

 

 

박목월

 

 

건천은 고향

역에 내리자

눈길이 산으로 먼저 간다.

 

아버님과 아우님이 잠드는 先山.

거리에는 아는 집보다 모르는 집이 더 많고

간혹 낯익은 얼굴은 너무 늙었다.

 

우리집 감나무는 몰라보게 컸고

친구의 손자가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전한다.

 

눈에 익은 것은 아버님이 거처하신던 방.

아우님이 걸터앉던 마루.

내일은 어머니를 모시고 성묘를 가야겠다.

 

종일 눈길이 그 쪽으로만 가는

누구의 얼굴보다 친한 그 산에 구름.

그 산을 적시는 구름 그림자.

 

 

 

 

 

아버지는 경주 근처 모량에서 자라 십여 리 떨어진 건천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는 대구계성중학교로 갔다. 벌써 이때쯤 시인 박목월의 마음에는 자연을 노래하는 마음이 움트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어렸을 때 고향에 가면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고향집 앞 야트막한 야산에 올라 기차역으로 난 논둑길을 가리키며

 "아버지는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매고 저 논둑 길을 따라 건천에 있던 초등학교를 걸어다녔다.

네 할머니는 이 야산마루에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어느 눈보라 치는 밤이었지.

학교에서 학예회 준비를 하고 돌아오는데 너의 할머니가 산마루 나무 밑에 짚단을 둘러쓰고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니.

 눈이 짚단에 내려 하얗게 되어 할머니인 줄 몰랐지."

그리고 나서 할머니의 얼어붙었던 차디찬 손을 잡았던 기억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박동규 교수(박목월 시인의 아들)

 

 

 

목월 부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들어진 자(금자 金尺)을 숨기기 위하여

이곳에 40여개의 가짜부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에 의해

이마을이 금척리(경상북도 경주군 건천읍 금척리)라 불리운다고 합니다

일제는 그들의 한반도 강점기때에 공동묘지라고 할수있는 이곳에 관통도로를 만듭니다


 

 

 

 

 

 1916년 경주 건천읍 단석산 아래  모량(毛良)리에서 태어난 목월(박목월 본명 박영종)은

어린시절에 왕복 30리를 걸어서 건천초등학교(1921년 개교,박목월 6회졸업)를 다녔는데

왕릉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모량들과 형산강을 보며 지낸 이시절에

이웃집 소녀와 첫사랑의 연정을 품었기도 했답니다

목월은 대구의  계성중학교에 진학을 하였고 그의 나이 15세 무렵에 

그의 어머니로부터  첫사랑의 소녀가 결혼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심을 하다가

   경주동부금융조합의 서기(오늘날의 은행원)로 취직을 하며 고향으로 돌아 오는데

그 무렵 첫사랑 소녀는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에 와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박목월도 결혼을 하게되고 몇해후에 첫사랑의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해를 거듭함에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첫사랑 소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연륜(年輪)’ 이라는 제목의 시로 표현을 합니다

 

 

 

 연륜(年輪)

1940년

 

 슬픔의 씨를 뿌려놓고 가버린 가시내는 영영 오지 않고
한 해 한 해 해가 저물어 질(質)고운 나무에는

가느른 피빛 연륜(年輪)이 감기었다.
(가시내사 가시내사 가시내사)

목이 가는 소년은 늘 말이 없이

새까아만 눈만 초롱 초롱 크고
귀에 쟁쟁쟁 울리듯 차마 못 잊는 애달픈 웃녘 사투리

륜(年輪)은 더욱 새빨개졌다.
(가시내사 가시내사 가시내사)

이제 소년은 자랐다.

구비구비 흐르는 은하수에 슬픔도 세월도 흘렀건만
먼 수풀 질(質) 고운 나무에는

상기 가느른 가느른 피빛 연륜(年輪)이 감긴다.
(가시내사 가시내사 가시내사)

 

 


  1950년대 초반에 목월은 구구문학을 전공하던 여학생의 구애를 뿌리치지 못하고 

1954년에 그 여인과 제주도로 도피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목월의 부인인 유익순 여사가 그들이 동거하는 곳에 찾아와 생활비를 놓고 가자

목월과 그여인은 이에 감동하게되고 둘의 동거도 끝을 내고 얼마후에 그여학생은 사망을 하게 되는데  

목월은 유부남이었던 자신을 사랑했던 여대생 그리고 이별에 대한 슬픔을 <이별의 노래>라는 시로 표현을 하고

이 시는작곡가 김성태에 의하여 <이별의 노래>라는 가곡으로 발표 됩니다

 

 

 

‘이별의 노래’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에 사랑도 저물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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