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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폭약집단'

매루 2019. 1. 29. 20:50

 




폭발물, 화약, 폭약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Explosive.......제 개인적으로는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령을 마치고  부산에 있는 병기학교에서 폭발물교육을 받은후 군생활 3년동안 탄약관리병으로 근무를 했었읍니다부산에서의 병기학교 교육병 시절에 매일 보고 듣고 배웠던 Explosive 입니다

 

 

인터넷 검색중 우연히 "남조선폭약집단"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기에 자세히 보았더니

1993년도에  한국화약그룹에서 한화그룹으로 그룹명칭이 바뀐 배경에 대한 이야기중에 나오더군요

한국화약그룹의 영문명칭인<Korea Explosive Group>이 서양 에서는 테러집단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고

한국화약그룹의  임원들이 중국을 방문할때면 중국의 공항에는

<歡迎 南朝鮮爆葯集團 : 환영 남조선 폭약집단>이라는 현수막이 펼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Korea Explosive Group>의 중국어 번역 이지요

 

이렇게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 인천의 한국화약공장 이야기를 보고듣다보니

저의 고교시절(문제아 학우)과 군대시절(이리역 폭발사고)의 추억들이 떠올랐읍니다

 

 

 

고등학교 2학년 6월께에(1971년)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일요일에 고잔에 있었던 박X문 이라는 학우의 집을 찾아갔었읍니다

박X문이 오랜동안 무단결석을 하자 담임선생님께서 저에게 그의집을 찾아가보라고 하신것 입니다

당시에는 저희집이 있었던 구월동을 비롯하여 소래, 남동등 지금의 남동구와 

 연수구, 송도구 지역들도 모두 행정구역상 인천의 남구에 속해 있었읍니다

담임선생님 께서는 구월동의 저희집과 박X문의 집이있는 고잔동이 가까운 동네인걸로 알고 계셨던 모양 이지만

일요일날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서서 자전거로 수차례의 고개와 바닷가를 1시간여를 넘고 달려야

박X문의 집에 다다를수 있었던 먼거리 였읍니다

그때에 제가 자전거로 달렸던길이 소래나 고잔에 살던 주민들이 자동차등의 수송도구로 바깥세상과 소통하던 길 이었고

고잔에 있었던 한국화약의 화약제품들이 커다란 트럭에 실려 밤시간에 외부로 수송이 되던  길 이었읍니다

 

 

 

옛 인천남구 지도(1965년)

구월동 저희집을 출발하여 남동삼거리(지금의 남동구청옆그때 그길의 일부가 지금도 남아있음)를 지나 
수산동 도림동도 지나 논현고개를 넘어 논현 사거리에 이르면  
곧바로가면 고잔이요 우회전하면 범아가리(호구포)와남동염전이고  좌회전하면 소래 인데
저는 박X문의 집과 한국화약이 있는 고잔으로 직진을 했읍니다
 
 
 

 

한국화약 정문(1955년)

 

군수용 화약, 광산 개발, 철도, 도로 부설, 수력 개발 등에 쓰이는  글리세린을 만들던 

함경도 흥남의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1935년 설립)의 유지공장은

인천의 가장 끄트머리 구석진 바닷가에  인천화약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공장은 김종희(한화그룹 창업주)씨가 1955년에 인수 합니다

 

 

 

 

저의 문제아 반친구였던 박X문의 집은 한국화약 정문에서 그리멀지 않은곳에 있었읍니다

 

 

 

 

사진 속 가운데에 숲으로(검은색) 위장처리된 곳이 한국화약 자리입니다 (1986년 지도)

 

 

 

 

 

한화 인천공장은 1956년 1월 초안폭약(질산 암모늄으로 된 가장 간단한 형태의 폭약)을 시작으로

58년 자체기술로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다이나마이트 제조에 성공하여

국가기간산업 건설(고속도로 등) 및 경제발전에 기여해 오다가

51년만인 2006년 10월에 충북 보은에 있는 새로운 공장으로 이전을 하고

고잔벌 한국화약터에는 국내 최대의 단일민간택지개발에 이은  한화에코메트로등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읍니다

 

 

 

 

 

 

 

70년대 이리역

 

 

 

 

 

이리역 폭발사고(1977년 11월 11일)

 

 

1977년 가을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의  육군 김일병

 

제가 육군 일등병시절 이던 19977년 11월 11일

인천의 한국화약에서 생산된

화약 30(다이너마이트용)을 싣고 광주로 가던

열차가 이리역(익산역)에서 폭발을 하여

59명이 숨지고 중상자 185, 경상자 1158명 등 모두 1402명의 인명피해와

 1천674세대 7천873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발생을 하였읍니다

일역 폭발사고후 현역군인들 중에서 이리가 고향인  장병들에게는 특별휴가가 주어져

내무생활이 어렵고 힘들었던 그시절의 졸병군인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읍니다

 

 

 

폭발사고 1년만에 새로 지어진 이리역 역사

 

 

 

 

이리역 폭발사고는 

폭발사고당시 이리의 삼남극장에서 공연을 하고있던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와 가수 하춘화의 사연이 알려져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읍니다

이리역폭발사고전 하춘화쑈가 진행중이던  이리 삼남극장 모습

극장간판에 화춘화,박근형,선우혜경,박우철,진송남의 모습이 보입니다

 

 

 

 

현재의 익산역(구 이리역)

 

 

 

1912년 3월 6일 호남선 강경∼익산(27.2㎞) 구간과 군산선(24.7㎞)이 동시에 개통하면서 문을 열고 

일제의 수탈을 위한 역(驛)으로 이용 되기도 했던 이리

이리는 1949년에는 전국 도시중 규모 15위에  오르는등

이리역은 서울·대전역 다음으로 승객이 많았던  호남선·전라선·군산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 입니다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면서 익산역으로 이름이 바뀌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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