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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구락부(具樂部)

매루 2019. 3. 5. 10:55

 

 

 

 

 

1950년대 한강 보트장

간판마다 구락부(具樂部)글자들이 보입니다

 

 

 

구락부 (部 club)

영어의 ‘club’을 일본식으로 취음한 ‘kurabu(クラブ)’의 한자 표기인 ‘俱樂部’의 우리 한자음으로

취미 친목, 오락 따위 공통된 목적 가진 사람 조직한 모임이나 단체 그리고 장소를 말하며

 해방 이후에도 널리 쓰였던던 말이었읍니다

지금도 일본에선 우리의 룸쌈롱이나 고급 주점을 크라부라 부르며 그들의 정치사에서 정경유착과 비리의 온상 이었읍니다

이렇게 일본 현대 정치사에서 크라부는 정경유착과 비리의 온상이었듯이

해방후 우리나라 에서도 남산의 외교구락부가 일본의 크라부처럼 존재해 왔었읍니다

 

 

외교구락부는 일제 강점기에 서울 남산의 헌병대장 관사로 쓰이던 건물 이었는데 

 해방 후인 1949년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윤치영 등 거물급 정계인사들이 공동 출자하여 만든 서양식 레스토랑으로

 정치인 뿐 아니라 종교계 원로, 연예인, 체육예술인 등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장소 입니다  

70년대 김영삼의 ’40대 기수론’,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던 ‘민주화추진협의회’결성등

특히 이곳에서 김대중, 김영삼의 회동이 이뤄질때마다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이 일어나며

이나라 민주화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던곳 입니다

 
 
 
 

 

숭의여자대학교의 별관으로 사용되어오던 옛 남산외교구락부는

 2009년 7월 19일  표지석만 남긴 채 모두 헐렸읍니다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을 낭독하는 김종필(1963년 1월 18일 외교 구락부)
민주공화당은 1963 2 26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염

 

 
 
 
 

 김대중(왼쪽), 김영삼(가운데) 등 야권 지도자들이 국민투표 거부 행동강령을 선언(1975년 2월 8일 서울 외교구락부)



 

 
김지미, 나훈아의 약혼발표 (76년 7월 서울 남산외교구락부)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기념식에서 김영삼 공동의장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1984년 8월 15일 남산 외교구락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 망명 중이어서 함께하지 못했다.

 

 

 

 

 

 

신민당 이민우 총재와 김영삼, 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대표의 외교구락부 회동 (1985년 7월 22일).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신동아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 대하여 해명을 하는 기자회견을 하고있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1987년 9월28일, 남산 외교구락부)

 

 

 

 

 

 

 

 

 

 

양김의  야당 후보 단일화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협상

(1987년 9월29일 남산 외교구락부)

 

 

 

 

 

 

 회동중인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2009년 8월 18일 남산 외교 구락부)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한말 서울 정동에 있던 주한 외교관과 조선 고관들의 사교·친목 단체.

 

 

정동구락부는 1894년(고종 31)을 전후하여 사교적 모임을 표방하고 설립되었으며,

주요회원은 조선정부측 고관인 민영환·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서재필(徐載弼)·이완용(李完用) 등과

 미국공사 실, 프랑스 영사 플랑시,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초빙된 르장드르·다이,

선교사인 언더우드·아펜젤러 등 주한 외교관·선교사들이었다.

 

당시 정동은 정치적 사교·외교의 중심지로, 미국 공사관이나 러시아 공사관 등

각국 공사관과 선교사들의 주택, 외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음식점·상점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당시 조선 정계의 인사들도 사교의 목적으로 이곳에 자주 출입하고 모임을 가졌으며,

자연스럽게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세력을 정동구락부 또는 미국파·정동파·영어파라고 불렀다.

한편 구미열강의 힘을 통해 일본침략을 저지하려 했던 고종과 민비가

이들 친러파·친미파 관료들의 정동구락부 출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줌에 따라,

 정동구락부는 일본인을 철저하게 배제한 주한 외교관·선교사들과 조선의 친서구적인 고관들 사이의 외교연락기관·정치단체로 변했다.

 

 

 

고종의 아관파천을 도와주어 유명해진 독일 여성 손탁과 민영익이 함께 한 사진.

손탁 여사는 당시 러시아공사의 처형으로 고종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고종은 그 답례로

집 한채를 하사해서 그것을 개조 손탁호텔이 되고 정동구락부가 되었습니다.

 

 

 

 

손탁호텔

 

 

 

 

손탁호텔 내부

 

 

 

출처 ㅡ daum 백과 ㅡ

 

 

 

 

 

 

 

 

 

 

제물포 구락부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일명 江華島條約)으로 제물포항이 개항된 후,

인천에 거주하는 독일·미국·러시아·일본 등 외국인이 1891년(고종 28) 사교구락부(社交俱樂部)를 발족시킴으로써 건립되었다.

원래 사교구락부의 건물은 다른 곳에 있었으나, 1901년(광무 5)에 현재의 건물을 짓고 회관을 이곳으로 옮겼다.

2층 양옥 구조의 벽돌 건물로 지붕은 양철이다.

내부는 사교실·도서실·당구대·식당 등 각종 시설을 두루 갖추었으며, 건

물 외부에 당시로는 드물게 테니스 코트를 설치하는 등 사교 모임에 적합한 시설로 꾸며졌다.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한국이 일제의 독점적인 식민지가 되면서 각국 거류지가 철폐됨에 따라,

이 건물은 1913년 일본재향군인 인천연합회(日本在鄕軍人仁川聯合會)로 이관되었고, 그 명칭도 정방각(精芳閣)으로 바뀌었다. 그 후 일본 거류민 증가와 더불어 일본 부인들의 친목단체가 결성됨으로써 1934년에는 일본부인회관(日本婦人會館)으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美軍政期)에는 미군사병구락부(美軍私兵俱樂部)로 사용되는 등

 한국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격동과 더불어 많은 애환을 간직한 건물이다.

1952년 7월 미군으로부터 인수하여 인천시립박물관(仁川市立博物館) 설립을 위한 건물로 사용되었고,

잠시 동안은 인천시협회(仁川市協會)의 회의실과 인천시교육원(仁川市敎育院)의 청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출처  ㅡ 인천문화원 ㅡ

 

 

 

 

 

 

 

 


농촌청년구락부(農村靑年俱樂部, 4H )
                                                   4H운동 표석

 

 

 

우리 나라에서 4에이치운동은 1927년 당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를 통하여 처음 소개되었으나 크게 보급되지 못하였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광복 후였다.

1947년 미군정 시기 경기도지사 고문 앤더슨(Charles A. Anderson) 대령이 도지사·군수 및 도내 유지들을 통해 소개하여,

1948년부터 ‘흥농회(興農會)’·‘농촌청년구락부(農村靑年俱樂部)’ 등과 같은 명칭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고,

 ‘경기도 농촌청년구락부연합회’가 결성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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