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다는 말의 어원은 『용비어천가』(1447년)에서 ‘어리다(愚)’로 등장한다고 한다.
중세국어에서 ‘어리다’의 의미는 이처럼 ‘어리석다(愚)’였다가 ‘나이가 적다(幼)’로 변화하면서
17세기부터는 ‘어린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라 한다.
‘어린 소견’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현대어에서도 여전히 ‘생각이 모자라거나 경험이 적거나 수준이 낮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옛날에는, 뭔가 잘못을 하면 철이 없다고 속이 없다고 핀잔을 들었다.
반대로 듬직하고 조신하다는 말은 칭찬이었기 때문에, 어른스럽다는 말이 오히려 좋은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변화가 생겼다.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1979)에 이르면
‘젊은 여자끼리 몇 살쯤 어리다는 게 우월감이 될지언정 열등감이 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고 당시의 세태가 표현되었다.
어리다는 것이 여자의 우월감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론 젊은 여자들에 한한 이야기였고, 어른은 어른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언제부턴가 봇물이 터지듯 경계가 무너졌고,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서는 도통 나이를 짐작도 못한다.
딸을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가 이모 같다느니, 심하면 언니 같다느니, 그런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게끔
‘어려보이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남자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 아저씨보다는 오빠로 불리기를 좋아한다던가? 어리(석)게도!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 들어 예쁜 얼굴이야 있을까만, 옛날에 우리가 어려서 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괜찮았다.
어려보이는 어른이 아니라 어른 같은 어른들이었다.
그것은 세월을 초월한 조화다.
지금도 기억한다.
적당히 늙고 주름진 얼굴에 적당히 센 머리에 적당히 굽은 등을 하고 널부렁한 옷을 입고 천천히 걷는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이른 나이에 있었을 많은 어려운 순간들을 이기고, 이제 다가오는 종착역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삶은 편안하게 보였다.
가지고 갈 것도 남기도 갈 것도 많지 않아서 뭔가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삶이야말로 넉넉해 보였다.
내가 늙은이가 된 지금은 주변을 돌아보면, 파리하고 살짝 빛바랜듯 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노인들의 자태가 여간해선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초록도 단풍이 들듯이, 황홀한 단풍도 우수수 바람에 날리듯이, 자연을 닮은 노인들이 그립다.
왜 지금은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른스러운 어른되기가 힘들까.
거짓과 우격다짐으로 불린 명성과 재산이 많으면 잃을까 걱정이고, 없으면 없어서 분통나고 그러는 것일까.
통계수치로 보면 옛날보다 잘들 사는데, 어른들도 젊은이들 따라서 헬조선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새 달력을 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다르다.
이런저런 이유로 도중하차하지 않고 나이를 먹는 것은 축복이다.
지구가 아직은 허락한 또 한 번의 봄을 맞게 되다니!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어려서 골목 양지바른 곳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또래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제 손녀들은 고무줄놀이 같은 것을 모르니 노래를 가르쳐줄 수도 없게 되었나?
할 수 없게 되는 일은 어차피 많아진다.
다만 한 계단 더 오른 어른으로서 덜 어리(석)자고 다짐할 일이다.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