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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이야기

홍예문 에서

매루 2018. 10. 5. 05:41









조선인들은 문의 윗머리가 무지개처럼 둥글기에 ‘무지개 문’이란 뜻의 ‘홍예문’이라 불렀지만

일본인들은 이문을 산의 혈(穴 : 구멍)을 뚫었다고 하여 ‘혈문(穴門)’이라 불렀읍니다

영문으로는 제물포의 관문으로 소개되어 있읍니다


  홍예문은 일제강점기 때 인천의 남북 간 교통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분(실제로는 영역확장과 원활한 물자수탈 목적)으로

 일본 공병대가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동원하여

 암벽을 폭파하는등의 난공사로 3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1908년에 완공한

도로 4.5m, 높이는 13m, 통과 길이는 13m의 터널 입니다

난공사의 흔적은 조선인들의 거주지가 있는  홍예문의 북쪽입구에 쪼아내다 내버려둔 거대한 암석의 뿌리로 지금도  남아 있는데

축대를 쌓아  깨끗이 정돈을 해놓은 일본인들의 거주지쪽인 홍예문의 남쪽벽과 비교가 됩니다






제가 사진찍기에 취미를 갖기 시작하던 무렵인 2012년 5월 17일에 찍은 홍예문 사진 입니다





지난 10월 3일 초등학교총동문체육대회에 참석을 했던 성대와 저는

점심식사를 마친후 현장을 빠져나와 동인천으로 나와 오랜벗인 혁재를 만났읍니다

저와 성대는 용현초등학교 동창 사이이고  충남태안출신의 혁재는 저와 동인천고등학교 동창사이 입니다

저희들 일행이 주차를 한 공간은 옛인천경찰서자리인데

지금은 인성여고의 다목적관으로 사용을 하고있는 옛인천시민관이 보입니다




사진 왼쪽에 나무가 울창한 정원에 빨간색 지붕이 보이는 집이 혁재 큰누나의 집 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후 군에 입대때까지 혁재네 집에서 숱한날들을 먹고자고 하였는데

제가 결혼을 한후에 혁재 어머니께서는 저를 아범 이라고 부르셨었읍니다

혁재의 어머니께서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셨고 혁재의 가족도 이건물의 2층에서 거주를 했었읍니다




어머니께서 돌아 가신후 큰누나 부부는 이건물을 수리를한후

혁재네 가족들이 살았던  2층을 세를 놓았읍니다

큰누나 부부가 살고 계시는 1층의 대문에는 2층찻집을 알리는 글이 적혀있는 판이 붙어 있읍니다




2층 찻집의 내부 분위기가 그럴듯 합니다










저희들 젊은날의 숱한 추억들을 지켜보았던 홍예문...

타지역출신(충남 태안)임에도 불구하고 인일여고에서 학생회장을 했던

인천토박이보다 더 인천을 사랑했기에 홍예문옆에 터를 잡고 지내시는 혁재 큰누나

홍예문은 그자리에 그모습 그대로인데

흰머리가 된 저희들은  2층에 있는 찻집의 계단을 오르며 "아구 아구" 소리를 냅니다

홍예문 주변을 둘러보면서 저와 성대만  알고있는 성대의 첫사랑같은 노래 숙녀를 흥얼거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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