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통일벼와 쌀막걸리의 추억 본문
1978년 1월24일 ‘혼식 도시락’ 폐지

![[오래전 ‘이날’]1월24일 쌀밥만 먹어도 돼요?](http://img.khan.co.kr/news/2018/01/23/l_2018012301002974600233862.jpg)
전체수요의 5분의1을 차지 하던 1960년도 우리나라의 곡물수입은 1970년에는 전체의 3분의 1까지 늘어 나자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주2회 실시하던 혼분식을 1972년 12월부터는 주 5회로 늘렸고
학교에서는 밀가루나 보리의 영양가가 쌀보다 좋다는 교육과 함께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를 벌였으며
식당에서는 담당공무원들이 주방으로 들어와 밥솥뚜껑을 열어 보고
혼식 비율 (10%이상 보리를 섞기)을 어긴 업소는 영업정지등의 강력한 행정처분을 받았는데
쌀로 만드는 경주법주는 청와대의 외빈접대용외의 제품전량을 수출하는 조건으로 쌀 사용이 허용된 유일한 사례 입니다
1972년부터 우리나라농가에서 재배하기 시작한 생산성이 높은 신품종벼(통일벼)는
기존의 벼품종들보다 병해충에도 강하고 30% 정도 생산성이 높아(23가마를 수확하던 논에서 53가마 수확 )
1966년에 392만t이던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은 1976년에 521만t(3621만석)으로 증가하였고
그다음해인 1977년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 4천만석 돌파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는데
전국평균 10a당 수량(494kg)도 당시 세계 최고기록 이었던 일본의 447㎏보다 많았고
1984년에는 10a당 1006㎏ 수확 이라는 세계기록을 수립한 농부가 나오기도 하면서
우리나라는 1977년에 쌀자급률 113%(600.5만 톤 생산)를 기록하며 단군이래 최초의 쌀자급자족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처럼 쌀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진 1977년에 우리나라 에서는
그동안 시행되어오던 무미일(無米日)을 비롯하여 혼분식 장려등 여러 쌀 수요 억제책들이 폐지되었으며,
쌀로 술을 빚는 행위를 금지 한다는 1963년의 양곡 관리법레 의해 제조가 금지 되었던 쌀막걸리가
14년만인 1977년 12월 8일에 시중에 다시 등장을 하였는데
쌀막걸리의 등장은 그 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만큼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였읍니다
이렇게 수확량이 높았던 통일벼는 찰기가 없어 맛이 없다는 이유와
1978년 이후 도열병과 냉해의 타격을 입으면서 농민들의 외면을 받으며 재배면적이 줄기 시작 하다가
결국 1991년에는 우리나라의 논에서 통일벼 재배가 중단이 됩니다
막걸리 양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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