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라면 이야기 본문
전체수요의 5분의1을 차지 하던 1960년도 우리나라의 곡물수입은 1970년에는 전체의 3분의 1까지 늘어 나자
정부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주2회 실시하던 혼분식을 1972년 12월부터는 주 5회로 늘렸고
학교에서는 밀가루나 보리의 영양가가 쌀보다 좋다는 교육과 함께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를 벌였으며
식당에서는 담당공무원들이 주방으로 들어와 밥솥뚜껑을 열어 보고
혼식 비율 (10%이상 보리를 섞기)을 어긴 업소는 영업정지등의 강력한 행정처분을 받았는데
무미일(無米日)을 비롯하여 혼분식 장려등 여러 쌀 수요 억제책들은
통일벼에 의한 쌀 자급자족이 이루어진 1977년도에 폐지 됩니다
이렇게 진행이 되었던 혼분식장려운동의 중간에는 라면이 있었읍니다
엊그제 경향신문의 <1978년 1월24일 ‘혼식 도시락’ 폐지>기사를 보다가 라면이 떠올랐읍니다
[숫자로 알아보는 국내 最古 36] '제2의 주식(主食)' 라면…
현존하는 국내 최초 라면 '삼양라면'

-76.1개 (2016년 기준 국민 1인당 연간 라면 소비량)
-1963년 9월 15일(국내 최초, 최고 역사의 라면 '삼양라면' 출시)
-10원(삼양라면 출시 가격, 당시 커피 한 잔은 35원)
-100g(최초 삼양라면 중량, 당시 일본 라면은 80g)
-1965년 7월(누적판매량 100만개 돌파)
-1969년 1월(국내 최초 베트남에 라면 수출)
<국내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 사진=삼양식품 제공>
우리나라 국민의 라면 사랑은 유별나다.
지난 2016년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WINA)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 1명이 1년에 먹는 라면은 76.1개에 달한다. 세계 1위다.
세계 최초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가 선보인 '낫싱 치킨 라멘'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년 7월 7일~1945년 9월 2일) 당시 이미 중국 군인들이 건면을 튀겨서 휴대했으며
이를 타이완 출신인 그가 응용해 상품화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1963년 삼양식품의 라면 제조 모습. 사진=삼양식품 제공>
우리나라 라면 역사는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1963년 9월 1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54년 전 이날 삼양식품㈜ 전신인 삼양식품공업㈜이 선보인 '삼양라면'이 국내 최초다.
1961년 설립된 이 회사가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삼양'이라는 이름은
'하늘'과 '땅' '사람'을 뜻하는 '삼(三)'자와 영양 '양(養)'자를 통해 '영양을 공급해 성장을 돕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삼양라면 탄생은 이처럼 가난했던 우리나라 근대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삼양식품 창업자인 故 전중윤 명예회장은 1960년대 초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먹을 게 없어 버린 음식으로 만든 일명 '꿀꿀이 죽'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노동자들을 보고,
식량난 해결을 위해 일본에서 라면을 들여와 만들기로 결심했다.
전 회장은 정부 관련 부처를 설득한 끝에 어렵게 5만달러를 배당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낫싱 치킨 라멘의 창시자 안도 모모후쿠가 자사의 라면 제조특허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삼양식품이 삼양라면 생산을 위해 최초로 도입한 라면 생산기계. 사진=삼양식품 제공>
하지만 원천기술이 전무한 상황에서 일본 업체는 기술지도와 관련해 까다로운 조건과 많은 금액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
향후 한국 수출을 위해서 라면 제조 전수를 꺼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중 전 회장은 '묘조(明星)식품' 오쿠이 기요스미 사장과 만나 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963년 첫 제품인 '삼양라면'을 생산할 수 있었다.
최초의 삼양라면은 '닭고기' 육수를 베이스로 만들었다.
현실적으로 소나 돼지를 사용해 육수를 낼 만큼 원료를 조달하기가 쉽지 않았고, 생산 원가 측면도 고려된 것이다.
최초 라면에 포함된 전중윤 회장의 결단력은 현재 한국 라면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 회장은 초심을 잃지 않고 국민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당시 일본 라면 중량은 봉지 당 85g이었지만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삼양라면은 100g으로 늘렸다.
가격도 꿀꿀이죽이 5원이었던 것을 감안해 많은 사람이 라면을 먹을 수 있도록 최대한 낮춘 10원으로 책정했다.
이 때 커피는 35원, 영화는 55원, 담배는 25원 수준이었다.
진 회장은 라면으로 돈을 벌기보다는 이웃의 배고픔을 해소하고 식량난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삼양라면이 나왔지만 소비자 반응은 냉담했다.
오랫동안 쌀 중심의 식생활이 하루아침에 밀가루로 바뀌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라면의 '면'을 옷감, 실, 플라스틱 등으로 오해한 사례도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삼양라면 무료 시식행사 모습. 사진=삼양식품 제공>
삼양식품 측은 전 직원과 가족을 동원해 직접 극장이나 공원 등에서 무료시식 행사를 열어 라면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낯설고 꺼려하던 이들도 직접 맛을 본 후 라면이라는 새로운 맛의 매력에 빠지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삼양라면은 1963년 12월 월간 출하량이 20만개였으나 1974년 5월에는 73만개로 3.5배 신장률을 보였다.
1965년 7월에는 판매량 100만개를 돌파했다.
1966년 11월 240만 봉지에서 경품 행사 등의 영향으로 1969년에는 월 1500만 봉지로까지 신장했다.
이로 인해 삼양식품 매출액은 초창기 대비 무려 300배까지 뛰었다.
분식장려운동 등과 맞물려 삼양라면에 대해 특집 기사를 작성한 매일경제신문 1967년 6월 3일자 2면.
196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분식장려운동, 식생활 개선운동 영향으로 라면 먹기가 권장됐고 호황을 누리자 경쟁제품도 속속 출시됐다.
1967년 9월 20일자 신문 기사(매일경제 참고)를 보면 이때 삼양라면 이외에
롯데식품공업의 '롯데라면', 스타식품공업의 '스타라면', 신한제품의 '신한라면' 외에도 '러키라면' '해표라면' 등이 있었다.
도매가격은 16~17원(개당), 소매가는 18~20원 정도였다.
같은 신문 1968년 2월 14일자를 보면 삼양라면은 월 1400만 봉지, 롯데는 700여만 봉지, 신한은 200여만 봉지를 생산했으며
1봉지에 20원으로 첫 출시 때보다 봉지당 중량이 150g으로 늘어나면서 가격도 20원으로 올랐다.
1967년 당시 라면 삼양, 롯데(현 농심라면),
1965년 롯데라면을 선보였던 롯데공업은 현재 업계 1위인 농심의 전신으로 1974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삼양라면 월남(베트남) 수출 내용을 다룬 1967년 9월 5일자 매일경제신문 기사.
국내 인기에 힘입은 삼양식품은 1969년 국내 최초로 베트남에 150만달러에 달하는 라면을 수출하며 라면의 세계화를 열었다.
현재 우리나라 라면의 위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발표한 '2017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라면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라면 수출은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2007년 3만375톤에 불과했던 수출량은 지난해 7만9586톤으로 162.0%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수출액은 1억1567만달러에서 2억9037만달러(약 3100억원)로 151.0% 늘었다.
수출대상국가도 이미 130여개 국가를 넘었다.
정영일 넥스트데일리 기자 wjddud@nextdaily
서민들 허기 달랜 라면, 이 땅에 들어온지 40년
식량위기로 관심 끌고, 입맛 들자 인기 ‘끓어’
힘든 훈련을 마치고 반합에 라면을 끓어 깡소주 한잔으로 고된 군 생활을 달랬던 시절,
군에 갔다온 남자들이라면 지금쯤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점심때는 끼니용으로, 논일을 할 때는 세참으로, 막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깡소주 안주로 피로회복의 벗이 된 라면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지도 벌써 40년이 됐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서민들의 식탁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게 크다.
초창기에는 식량부족으로 굶는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국민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일상생활의 필수적인 간식용으로 자리잡았다.
60~70년대에는 신발과 전자제품을 수출하기 위해 밤낮 없이 일하던 산업역군의 밤참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밤을 하얗게 새우며 가발과 신발을 만든 그들에겐 불어터진 면발이었지만 더 없는 먹거리였다.
오늘의 풍요로움을 가져오게 한 것은 저임금에 피 땀흘린 산업역군 이었지만
그들 못지 않게 그들의 배를 든든하게 해준 라면이‘제2의 산업역군’이라는 것을 중·장년 층 이라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근대화의 에너지’였던 라면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게 된 동기는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당시 보험회사를 운영하던 전중윤 회장이 점심시간에 남대문시장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전 회장은 시장 한 모퉁이에 5원짜리 ‘꿀꿀이죽’(미국인들이 먹고 남은 음식쓰레기를 모아 끓인 것)을 먹겠다고 수 백 명의 막일 노동자는 물론
시장 상인들까지 들이 비좁은 시장통로에 꼬불꼬불하게 늘어선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겠다고 날뛰는 모습은 인간이라고 하기보다는 완전히 동물의 본능 그대로였던 것이다.
좁은 시장 길을 빠져나가던 전 회장은 뭔가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대단한 발견을 한 듯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하고 가슴은 갑자기 쿵덕 쿵덕 뛰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불쌍한 우리국민들이 부담 없이 한끼를 해결하고 우리나라의 식량을 자급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남대문 시장을 급히 빠져 나왔다.
전 회장은 회사에 돌아와서도 꿀꿀이 죽 속에 든 이물질을 골라 내가며 맛있게 뚝딱 한 그릇 해치웠던
‘하루살이 인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은 더 괴로웠다. 전 회장이 그 짧은 순간에 대단한 발견을 하게 된 것은
60년대 초에 보험회사의 경영연수를 위해 일본을 갔을 때 포장마차에서 먹었던‘꼬부랑 국수’가 번개같이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 회장은 포장마차에서 끓여 팔던‘꼬부랑 국수’가 너무 맛있고 한편으로는 너무 신기해
그것을 사다가 호텔 방에서 끓여먹어 보기까지 했었다는 후일담도 전한다.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그 얼큰한 맛을 기억해내고 이것이야말로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하고
정부를 찾아다니며 설득을 한다.
상공부로부터 5만달러를 빌어 일본의 한 식품회사로부터 2대의 기계와 기술을 도입,
마침내 1963년 9월 15일 ‘삼양라면’을 탄생시켰다.
한 기업가의 끈질긴 노력 끝에 탄생한 라면은‘제2의 쌀’로 위치를 잡으면서 식량자급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탄생 40여년을 넘긴 지금 라면을 떠나서는 우리의 식탁을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다. 우
리나라에서 1년에 소비되는 라면의 수는 36억개로 1인당 1년에 84개를 먹는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그러나 대박을 기대했던 당초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삼양라면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쌀과 보리의 식생활에 길들여진 입맛을 하루아침에 밀가루로 만든 인스턴트 식품으로 끌어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라면이 나오자 사람들은 양복점 개업 정도로 대부분 인식했다.
또 건축자재나 나일론 끈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판매점이나 점방에서는 사람들이 쉽게 알도록‘꼬부랑 국수’로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 팔았다고 한다.
당시 신문과 방송을 듣고 볼 수 있는 것이 특수층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광고를 하여도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물건이 잘 팔리지 않자 다급해진 회사의 직원들이 솥 단지를 들고
직접 대로변이나 역, 공원 등에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라면을 끓여 사람들에게 떠 먹이며 홍보를 펼쳤다.
처음에는 생소하여 꺼려하던 사람도 얼큰하고 한국적인 양념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새로운 맛에 매력을 느끼면서
입에서 입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특히 서민들의 깡소주에 찌든 속을 풀어주면서 인기는 급속도로 오르게 된다.
국물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식생활에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라면이 급속하게 국민들의 식생활 속으로 파고 들 수 있었던 것은
보리 수확 철에 비가 내려 보리를 논에 두고 썩혔던 1963년 계묘년 보릿고개 때문이었다.
이 계묘년 보릿고개는 사상최악의 식량부족사태를 촉발시켰다.
식량위기에 몰린 정부는 1965년 강력한 혼분식 장려 정책을 들고 나온다.
이 혼분식 바람을 타고 라면은 이 땅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삼양라면은 저소득층을 겨냥해 처음 라면의 가격을 정할 때 100g에 10원으로 출발했다.
라면 1봉지 10원이라는 가격은 1963년 당시 우리나라 서민층으로서는 결코 작은 돈은 아니었다.
그 후 7년만인 1970년에 라면 값이 20원으로 인상됐다.
하지만 용량이 100g에서 120g으로 늘었고 1960년 소비자 물가 인상률이 400%였던 것을 감안하면 인상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1981년 8월에 100원으로 올랐다.
당시 자장면은 한 그릇 600원, 곰탕 1300원, 냉면 1500원, 정식 800원 수준에 비하면 현격히 낮았다.
라면이 꼬불꼬불한 데에도 이유가 있다. 곧게 만들면 좁은 공간에 길다란 면발을 담을 수가 없어서였다고 한다.
또 지방 등 영양가를 높이면서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서는 튀길 때 빠른 시간에 많은 기름을 흡수해야 하므로
나선형이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라면을 끓일 때 꼬불꼬불한 사이로 뜨거운 물이 쉽게 들어가 끓이는 시간을 보다 짧게 해주는 과학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과 가계 경제를 최대한 고려한 것이다.
라면 한 봉지의 면발은 75가닥이고 한 가닥의 길이는 약 65㎝로 총 길이는 49m가 정도가 된다고 한다.
또 라면이 노란색인 것은 면의 주원료인 소맥분이 가지고 프라보노이드 색소와 영양강화를 위해 첨가된 비타민 B2 때문이다.
배고프고 가나한 시절 그 당시의 라면은 그야말로 특별요리와 같았는데 손님이 오는 날 외는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사연도 많았다.
마산에 사는 진상기(44)씨는 어릴 때 라면을 서로 많이 먹겠다고 동생과 뜨거운 그릇을 밀고 당기다가 쏟은 바람에
지금도 동생의 허벅지에 그 상처가 흉터로 남아있어 동생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자취를 한 김동근(48)씨는 라면이 너무 너무 맛이 있어 아침저녁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마침 집에서 가져온 생활비가 떨어져 라면을 먹을 수 없게 되자 쌀
을 팔아 라면을 박스로 사다 놓고 먹다같아버지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며
그때 라면을 하도 많이 먹어 지금은 쳐다보기도 싫다며 고개를 흔든다.
올해 일흔 두 살인 이정순(76) 할머니는 집에 귀한 손님 왔는데 쌀이 없어 보리밥을 해 줄 수가 없어 라면을 끓였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며 얼굴을 붉힌다.
글도 모르는 데다 끓이는 방법을 몰라 큰 냄비 솥에 물을 가득 붇고 2봉지를 넣었는데
손님까지 일곱 식구가 한 그릇을 담고도 남더라는 것이다.
면발이 퍼져 우동처럼 큼직큼직 한 것이 젓가락으로는 도저히 먹지 못하고 모두다 그냥 훌훌 마셨다고 한다.
그래도 당시에는 그것이 잘못된 줄 몰랐다며 지금 돌아보니 웃음이 난다고 한다.
서민들의 애환을 간직한 라면은 원래 중국의 ‘튀김국수’라고 한다.
오늘날의 라면은 1958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었다고 하나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지금은 고급화된 입맛따라 라면 종류도 수십가지가 되지만 처음 나온 그 맛은 서민들의 기억에 여전히 남아있다.
한국근현대사전시관
2005-10-19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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