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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다

1968년 1월의 한반도

매루 2018. 1. 23. 22:07



19681 21사태 (김신조 사건)


1967년 4월에 북한의 민족보위성은  정찰국 산하에 유격전 특수부대인 124군부대를 만드는데

이 부대는 각 부대의 정예요원 2400명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8개 기지에 300명씩 분산되어 고강도 특수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1968년 1월 16일 황해도를 출발한 124군부대원 31명은 다음날 오후 11시에 고랑포 일대로 침투한후

18일 자정무렵에  미군 2사단이 철책선을 담당하던 서부전선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루를 보내고

19일 밤 8 30분경 경기도 고양군 법원읍 삼봉산에 도착을 하였고

이곳에서 나무를 하던 우씨 3형제와 마주칩니다

이들은 생포한 우씨 3형제를 풀어준후(풀려난 우씨 3형제는 곧바로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를 함)

8시간만(시간당 10km의 속도의 구보)에 북한산 비봉에 다다릅니다

당시 한국군 유격대의 산악지대 이동속도가 시간당 4km라고 하니 가히 초인적인 능력 입니다


"우씨형제들을 풀어준 지점에서 서울 진관외동의 진관사까지 산악코스로 행군하면

해병대도 족히 이틀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진관사를 거쳐 북한산 비봉의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해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기겁했지요.

중무장하고 야간 산악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 건

제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ㅡ 당시 국방부장관 이었던 김성은의 회고 ㅡ

 20일에 앵무봉을 통과한 이들은 비봉,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내려와

21일 밤 10시 청와대를 불과 500m를 남겨둔 지점인 세검정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서

처음으로 검문을 받게 되고  전투가 벌어집니다


  

 


 22일 새벽에  인왕산 기슭에서 김신조가 생포 됩니다.






1968. 1. 22, 오후 7시부터 30분간 육군방첩부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김신조

TV가 귀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당시 저희집에는 TV이 있었고

저는 TV로 중계된 이날의 기자회견 모습과 내용이 지금도 눈과 마음에 생생 합니다

김신조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남파 임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내래 청와대 까부수고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라고 대답을하여

온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넣습니다




사살된  무장공비의 시신들을 확인하기위해 끌려나온 김신조


경기도 일대에 걸친 대대적인 수색작전 끝에 당국은 남파된 유격대원 총 31명중 

 28명 사망(김춘식은 치안국에서 자폭), 1명 생포, 2명 월북(추정)했다고 발표 하면서

우리 측은 군 장병 25명과 민간인 7(심지어 신고를 받은 경찰의 늑장 출동 때문에 사망한 민간인도 있었다!)

 총 32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발표를 하면서

군 병력 1 9,213명이 동원된 작전은 종료가 됩니다


이 사건후 태극연습(1969년 을지연습으로 개칭)을 그 해 처음 실시하였고

대한민국에는 주민등록번호 제도와  향토 예비군제도가 시행이 되고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 됩니다

대학생들은 물론 청소년인 남녀고교생들에게까지 교련 이라는 군사교육을 받게 합니다

1971년 가을 인천시내 고등학교 교련실기대회때 열병식에 기수로  참석한 모습(당시 동인천고등학교 2학년)

저와 초등학교때부터 내리 12년동창사이인 연대장 민병철은 현재 중국에서 목회활동을 하고있읍니다



고등학교 졸업(1973년)후 38년만에 다시 만난 병철이와(2011년 2월 14일 낙섬일사회 정기모임)



당시 현역 사병의 복무기간이 축소되던 과정에 있었는데 이 일로 육군과 해병은 6개월, 해군과 공군은 3개월씩 복무기간이 연장되어

자신이 근무했던 부대의 부대장에게 전역신고를 하고  고향으로 가던 제대병들이 다시 부대로 돌아왔는가 하면.

유사시 대간첩작전 등에 동원할 경찰 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전투경찰제도가 생겨납니다 

전투경찰들은 나중에 학생 시위 진압에 동원됩니다


그리고  경기도 양주시와 서울 우이동까지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일명 소귀고개) 6.8Km가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이 됩니다

`서울의 DMZ` 또는 '김신조 루트'라 불리던 이 길은 41년만인 2010 227일 민간인에 개방 됩니다


당시 군사정권은 이사건의 보복(김일성을 암살)을 위해 19684월에  실미도에  특수부대인 684부대를 만들지만

그러나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작전 자체가 불확실해진데다가

가혹한 훈련과 장기간의 기다림에 불만을 품은 훈련병들이

1971823일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빠져나와 인천에서 탈취한 버스로 서울로 향하다가

오류동에서 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대부분이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310일에 사형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 호 피랍 사건


푸에블로호 미군 수병들이 나포되어 북에 끌려가는 모습과

영해를 침범하여 간첩행위를 했음을 인정한 미군들의 자필 진술서


1968년 1월 34일 미 해군 소속 정찰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 원산 앞 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되어
82명의 미 해군 인원이 11개월이나 붙잡혀 있다가 풀려난 사건으로
 소련을 통한 외교교섭이 소련의 거부로 실패하자, 미국 측은 한국정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2월 2일부터 판문점에서 북한당국과의 비밀협상에 들어갑니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협상을 진행이 어려웠던 미국은  협상 주도권을 북한에게 넘겨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라는 단어가 6번이나 들어있는 사죄문을  북한에 넘겨줍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앞

미합중국 정부는 196812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서  여러 차례 불법 침입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중요한 군사적 및 국가적 기밀을 탐지하는 정탐행위를 하였다는 승무원들의 자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제시한 해당 증거 문건들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이 미국 함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엄중한 정탐행위를 한 데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과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실히 담보하는 바입니다 

이와 아울러 미합중국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의해서 압수된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의 승무원들이

 자기들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청원한 사실을 고려하여

이들 승무원들을 관대히 처분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간절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본 문건에 서명하는 동시에 하기인은 푸에블로호의 승무원 82명과 시체 한 구를 인수함을 인정합니다.

미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 육군소장 길벋 H 우드웓

1068년 12월 23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당시 판문점에서 사죄문에 서명하는 미국 대표의 침통한 표정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동해안에 정박되어 있던 푸에블로호 1999년에 평양 대동강변에 전시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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