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유관순과 정동교회 본문
이화학당 1918년 졸업사진으로 추정 (뒷줄 오른쪽 끝이 유관순)
1902년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지금의 오창 부근)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감리교도로 흥호학교를 세워 국권회복과 민족계몽운동에 나섰던 선각자였였던 아버지와
선교사들을 통해 독실한 신앙심과 근대적인 여성의식을 갖추었던 신여성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나가 자유와 평등의 정신과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감리교단이 서울에 설립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한 유관순은
1919년 우수한 성적으로 보통과를 수료한 그녀는 이화학당 고등부로 진학하였읍니다
( 교비생 :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면제받는 대신 졸업 후에 본교의 교사가 되기로 약정한 학생)
이시기에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강요하는 등 동화정책에 전력을 기울이고며
이에 반항하는 사람들에게는 1912년 개정된 신태형령에 따라 순사들의 재판 없는 구금과 구타가 일상화되고 있었읍니다
신태형령(新笞刑令 :종래와 같이 태형이 주형(主刑)으로서의 독립된 형이 아니고,
필요할 때 징역(懲役)ㆍ구류(拘留)ㆍ벌금(罰金) 대신 집행할 수 있는 대용형(代用刑)으로 고친 것이다.
즉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나 100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科料)에 처할 자에게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 이를 참작해서 태형으로 처벌토록 하였다.
따라서 그 집행 방법도 훨씬 완화되었으며, 1920년에는 폐지령(廢止令)이 내려 아주 없어지게 되었다.)
3·1운동에 참여해 종로에서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에 대한 민족지도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조선사람들의 분노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천명과 맞물려
반발과 저항의지가 거세게 끓어오릅니다
민족자결주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전승국의 대표 주자였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전후 처리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했다.
그것은 세계 피압박민족들이 자발적인 노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재일조선유학생학우회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후 도쿄에서 일으킨 2,8독립선언 을 시작으로
국내 에서는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 등 교파와 계층을 초월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 되었고
거사( 독립만세운동)일자가 고종황제의 국장일과 3월 2일의 일요일을 피하면서 3월 1일로 정해집니다.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유관순이 3,1운동 이후 심해진 일제의 감시와 검거를 피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일으킨 운동 이었으며
아우내장터의 독립만세운동현장에서 유관순의 아버지 께서는 일경의 칼에 머리와 배를 찔려 즉사를 하고
유관순은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천안헌병대에 구금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검사국으로 송치 됩니다
일경은 그녀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하여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내 한 몸 편하자고 부모를 학살한 흉적들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라며 거절을 합니다.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된 유관순은 항소심에서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 일본인은 우리 땅에 몰려와 숱한 동포를 죽이더니 마침내 나의 부모님까지 죽였다.
대체 누가 누굴 죄인으로 몰아 심판한단 말인가?”라며 재판관을 꾸짖습니다
유관순이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의 여감방 8호실에는
독립운동가 노백린 장군의 딸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였던 노순경, 개성의 전도부인 어윤희,
구세군 사관 부인 엄영애, 정신여학교 학생 이애주 등이 있었다. 유관순의 죄수번호는 1933번이었읍니다
서대문형무소의 1930대 모습
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 기념으로 유관순의 형기가 1년 6개월로 감형되었지만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형기를 3개월 남겨둔 1920년 9월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2013년 11월 19일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으로부터 이관 받아 공개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에는
‘3.1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되어 옥중에서 타살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유관순은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다음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1937년 이태원 공동묘지가 택지로 조성되면서 유골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정동제일교회의 애국청년운동은 기미년 3.1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거사전인 2월 26일 기독측 인사 10명이 정동제일교회 담임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 모여 독립선언문 초안에 동의하고,
이 자리에서 기독교측 민족대표 16명을 확정했으며
또한 3.1 독립운동 당시에는 시위대의 주동력인 배재학생 동원을 김진호 전도사가 이화학생은 하란사 교수가 맡아 주도했으며,
선언문과 격문의 등사와 전달은 정즉성 전도사가 전담하는 등 거사의 주거지가 되었습니다.
이팔주 목사와 복동완 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의 반열에
현순 목사와 손정도 목사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을 주도하여
각각 외무차장, 의정원 부의장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자 정동제일교회에 열심히 출석했던 유관순의 일화는
오늘 대다수의 국민들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태극기를 품에 안고 정동(문화재)예배당의 파이프 오르간 뒤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던 유관순의 모습에서
신앙과 조국의 운명을 끌어안았던 정동(문화재)예배당의 기품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독립선언의 이념과 내용, 3.1 운동의 진행 방향 등이 모두 정동예배당에서 시작되었고,
정동제일교회의 정신과 함께 살아 움직였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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