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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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설날에 즈음하여

매루 2017. 1. 27. 09:33

      

                
 
 
 
 

단기(檀紀)4287년(西紀 1954년)  부모님의 약혼사진

 

 

 

 
황해도 황주가 고향이신 저의 아버지 께서는 한국전쟁때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오셨고
전쟁이 끝났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수 없게돼자  같은고향(황해도 장연)의 여인과 결혼을 하셨고
슬하에 저희 사남매를 두셨읍니다
 
낚시에 대단한 취미를 가지셨던 아버지 께서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이면 당시 다다미가 깔려있던 갑호사택 (학익초등학교옆 흥방직원사택)의 거실에
낚시도구들을 풀어놓고 출어준비를 하셨으며
토요일아침에 낚시가방을 메고 출근 (학익동의 흥한방적 주식회사 서무과)을 하시면
저희 형제들은 다음주 월요일에나 아버지의 모습을 뵐수 있었읍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 께서는 흥방(흥한방적회사)을 그만 두시고
용현동 낙섬근처의 맹아산(지금의 용정공원)에 있었던
흔히 고아원이라 불리우던 부랑아 보호시설과 벙어리학교라 불리우던 농아학교(지금의 동수역 옆 성동학교)에
지금의 행정실장격인 서무과장으로  자리를 옮기셨읍니다
 
우리가족은 그곳 용현동 시절에  설날과 한가윗날 조상께 제사를 드리기 시작을 하였고
제사를 앞둔 이삼일 동안 어머니께서는 음식장만에 고된시간들을 보내셔야 했읍니다
제사를 처음으로 드린 그때 저는 초등학교 5학년 이었는데
나이가 어린 동생들과 달리 저는 어머니의 음식장만을 도와 드려야 했읍니다
 
왕복 1시간도 훨씬 더걸리는 숭의동 독갑다리 부근의 방앗간에서 가래떡과 인절미를 뽑아왔고(아버지의 몫)
전기믹서기가 없었던 시절 이기에
빈대떡의 주재료인 물에 불린 녹두를 갈기위하여 맷돌을 돌려야 했고
김치와 돼지고기를 다진후 물기를  빼기 위하여 그것들을 베보자기에 싸서 멧돌로 눌러 놓기도 했고
으깬두부가 더 들어가는 만둣속의 재료들도 마찬가지 였읍니다
이러한 음식들을 만들기 위하여 연탄 아궁이와 가마솥이 걸린 장작 아궁이의 불도 모자라
아버지 께서는 빈대떡이나 전을 부치기 위한 화덕을 마당에 따로 만들어 주셨읍니다
 
꼬박 밤을 세우기 일쑤였던 어머니의 명절음식들이 제사상에 올랐고
명절날 이른새벽에 아버지와 저와 두명의 남동생들이 아버지의 조상들만을 위한 제삿상을 마주했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방 한쪽에 비켜 게셨읍니다
당시 어린나이의 제마음속에는 그러한 제사풍속이 불공평 하다는 생각이 들었었읍니다 
 
저희집의 제사는 5년여 이상 게속 되다가
부모님의 서울생활(남대문시장내 농협청과물 공판장 중매상인)로 저희 형제들과 이산가족(?)이 되면서 중단이 되었읍니다 
 
세월이 흘러 저희 형제들이 성장을 하여 각자 아내들을 맞이하게되고
1997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신후
아버지 께서는 어머니의 기일과 생일,한식,설,한가위때 어머니의 산소를 꼬박꼬박 찾으셨읍니다
그러하신 아버지와 저의 형제들부부 사이에서 맏이인 저의 역할은 무척 중요했고 그에 따른 심적부담도 무척 컸읍니다
 
어렸을적에 명절때마다 보았던 어머니의 수고를 제수씨들께는 물려드리고 싶질 않았고
설날아침을 친정에서 맞이할수 있도록 해드리려는 저의 속마음을 차마 아버지께 표현을 내세우지 못하면서
아버지의 노한 꾸지람을 각오하고 어머니의 산소참배를 설이나 한가위 당일이 아닌 하루나 이틀전에 하자고 아버지께 건의를 했고
그러한 저의 건의는 몇년만에 이루어졌읍니다
 
이제는 그러하셨던 아버지도 제곁에 안게신 2017년의 설이 찾아왔읍니다
아내는 빈대떡과 갈비찜의 재료들과 고사리등의 나물들의 손질을 하고 있읍니다
그러한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제어린시절 명절즈음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2015년 설날을 앞두고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설날 음식

 

2017년 1월 26일

 

 

설날이다. 음식과 제수 장만을 한다. 지지고 볶는다. 대개 여자들 일이다. 끔찍한 스트레스다.

남자들의 방기가 여전하다.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어른들 눈치에 주저앉는다.

우선 나부터도 그렇다. 어머니 생전에 차례상을 줄이자고 세게 못 나간다.

사람들은 뼛속에 골수처럼 박혀 있는 ‘제사=조상 공경’의 질긴 관념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읽어보기는커녕 표지도 못 본 <주자가례>의 여러 규정을 우리는 지금도 꿋꿋하게 실천하고 있다.

 며칠 전, 한 신문에서 여성 기자들이 설날 스트레스를 털어놓은 기사를 읽었다.

모두 익명이었다. 시댁 식구가 읽으면 곤란하니까.

이런 대목이다. “밥 먹고 상 치우고 TV 보고 다시 차려서 먹고 TV 보고….” 무한반복의 설 연휴 풍경을 그렇게 기억했다.

무엇보다 “할 게 없어서 재미도 없는” 설날이라고 했다. 재미없는 설을 우리는 올해도 보내게 될 것이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서울역과 터미널에서 ‘밝은’ 표정의 귀성객들을 찍어 전할 것이다.

아무도 여자들을 붙잡고 “지금 엄청 스트레스 받고 계시죠? 이런 거 계속해야 할까요?”라고 묻지 않는다.

그러니까 매년 반복되는 뻔한 그림에 가짜 뉴스다. 조상과 부모 공경이라는 거대한 슬로건 아래에서 누구도 거스르기 어렵다.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올해 설도 전국 800만 며느리들 개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앵커 멘트는 없다.

 다 사기다. “길이 밀려도 고향 가는 기쁜 마음에 얼굴엔 함박웃음이 가시지 않습니다”라고 뻥을 친다.

 물론 제 집 가는 남자들 마음으로 보면 틀리지 않겠지만. 

                                 

제사는 남자들의 혈통을 유전하는 행위다.

당대의 사정에 비추어보면, 제사도 곧 명맥이 끊어질 판이다.

딸 하나 있는 집이 수두룩하며, 아예 자식이 없거나 결혼조차 포기 또는 안 하는 사람이 좀 많은가.

지구 멸망을 앞두고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심정이 아니라면, 영속하지 못할 이 제사에 그리 무겁게 우리를 걸 일이 무엇인가 싶은 것이다.

제사는 위로 모시고 다시 아래로부터 ‘받아먹는’ 것을 염두에 둔 행위일 텐데,

미구에 자손도 없을 우리가 무슨 기대로 제사를 지내는가 자문할 일이다.

누구 말마따나, 조상 잘 둔 사람들은 죄다 해외여행 가고, 덕이라고는 하나도 못 본 이들이 제사 지낸다고도 하지 않는가. 

 

그래도 굳이 지내는 제사, 당장 내용이라도 바꿔보자.

전 없는 차례는 큰일날 일일까. 언젠가 고등어 한 마리 구우면 초미세먼지가 몽골 황사 수준이라는 뉴스를 내보낸 게 언론이다.

전은 고등어보다 더 위험하다. 전도 기름에 지지므로 초미세먼지가 엄청나게 발생한다.

고등어는 후딱 굽기나 하지, 전은 서너 시간 연속으로 지진다. ‘고소한’ 전 부치는 냄새가 바로 초미세먼지다.

 가정에서 환기나 되는가. 추워서 창문도 꽁꽁 닫고 있다.

역학조사까지는 안 했겠지만, 명절 전 부치기가 호흡기에 미치는 영향 같은 연구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전이 필요하면 남자들이 앉아서 부쳐보도록 하자.

한 시간만 부치면 인간의 허리가 전 부치기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아, 하여튼 설날이여. 여자들만 괴로운 날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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