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등사기(謄寫機) 본문
등사원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밀랍(초 또는 왁스)을 입힌 반투명종이인 등사지를
가리방 (쇠로 만든 줄판)위에 올려놓고
철필로 글을 새겨 글씨나 그림의 선 부분의 밀랍코팅을 긁어낸후에
이를 틀(등사판 또는 속사판)에 끼운 다음 잉크를 묻힌 롤러를 굴리면
철필로 새겨 왁스코팅이 제거된 등사지 부분은 잉크가 새어나와 등사지와 비단 스크린을 통과해 종이에 글씨나 그림이 나타납니다.
한 장씩 밀어내고 종이를 제친 다음 다시 밀어야 하는 과정을 연속 해야 했기에 시간이 많이 걸렸읍니다
많이 인쇄하면 등사원고가 마모되어 잉크가 번지거나 인쇄가 희미하게 흐려지기 때문에 인쇄 품질이 나빠지기 마련 이었읍니다
실제로 초중고등학교시절에 치렀던 각종시험때마다 시험지의 문제가 잘 보이질않았기 때문에
해당 시험감독 선생님은 가장 선명하게 인쇄된 시험지를 따로 가지고 오셔서
몇번문제 또는 몇번 보기답이 잘 안보인다는 수험생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시곤 했는데
이과정에서 고도의 컨닝(?)이 이루어지곤 했읍니다
예를 들어서 5번문제의 가나다라 4개의 보기답들 중에서 나번이 정답일 경우에
공부잘하는 학생 한명이 <선생님! 5번 문제의 나번답이 잘 안보입니다>라고 말을 하는것 입니다
그리고 예쁜 여선생님이 시험감독으로 들어오실 경우에는
유독(?) 시험지의 인쇄상태가 불량 하였는지 시험시간내내 글자가 잘 안보인다며 손을 드는 학생들이 많았읍니다
등사기로 만든 1960년대 국민학교(초등학교)시험지
형편이 나은 학교에는 필경사(시험문제 원고를 등사지에 새기고 인쇄(등사)까지 맡아해주는 직원)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교 에서는 담당교사가 직접 하거나 소사아저씨의 도움을 받았읍니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추억의 편린들>
박근혜 정부에서는 찌라시라는 말을 주로 사용을 했지만
일제 강점기때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이나
해방후 독재정권,군사정권에 대항하던 단체나 학생들이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던 불온문서라 불리우는 ‘유인물(油印物)’은
등사용 기름잉크 묻은 롤러를 밀어 등사판으로 인쇄 되었기에 만들어진 말 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등잔불 아래서 등사판을 밀어 항일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는데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는 서울의 인쇄소에서 2만여 장만 인쇄됐지만,
그 몇십 배의 선언문이 방방곡곡에 뿌려진 것도 곳곳의 항일투사들이 등사판으로 복사본을 찍어낸 덕택이었다고 합니다
식민지 시절에 등사기를 구입하면 일본경찰들의 감시대상이 되었기에
독립투사들은 관청을 습격할때마다 그곳에서 무기와 함께 꼭 가지고 나오는것이 등사기 였읍니다
식민지 시절 등사판 도난은 단순 절도사건이 아니라 체제 위협사건인 셈이어서, 발생 즉시 경찰에 초비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1960~1980년대까지의 반정부 학생운동에 뛰어든 학생들에게 등사판은 필수품이었는데
데모 주동 학생들은 대학가 하숙집에서 등사판을 밀어판 반독재 시위 때 뿌릴 유인물을 밤새 찍었읍니다.
19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때 언더우드 등사기가 압수되는 등 여러 시국사건마다 등사기가 증거물에 자주 포함되곤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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