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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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8대 대통령

강화도령과 수첩공주

매루 2016. 12. 4. 07:24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런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 플라톤 ㅡ






철종 어진

아랫글은 진주민란에 충격을 받은 철종임금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글 입니다


내가 이번 진주의 일에 대해 실로 개연(慨然)하고도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대령(大嶺) 이남은 옛날에 이른바 추로(鄒魯)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군현(群賢)들이 배출되었고,

풍속도 순후(淳厚)해 비록 집집마다 봉(封)할 만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런데 근래에 탄식과 원망과 수심이 깊어 백성들이 잘 살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지금의 이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본심(本心)으로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첫째는 내가 부덕(否德)한 탓으로 도솔(導率)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로는 백성을 다스리고 적을 막는 신하가 조가(朝家)에서 백성을 어린아이 보살피듯 하는 뜻을

잘 대양(對揚)하지 못한 탓이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얼굴이 붉어져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 《철종실록》 권 14, 철종 13년 3월 10일 -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의 불찰로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깊이 사죄드립니다.
이번 일로 마음 아파하시는 국민 여러분의 모습을 뵈면서 저 자신 백번이라도 사과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 해도 그 큰 실망과 분노를 다 풀어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제 가슴이 더욱 무너져 내립니다.
국민 여러분, 돌이켜 보면 지난 18년 동안 국민 여러분과 함께했던 여정은 더없이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1998년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부터 대통령에 취임하여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단 한 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들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던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저의 큰 잘못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경위는 가까운 시일 안에 소상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그동안 저는 국내외 여건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길인지 숱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이 자리에서 저의 결심을 밝히고자 합니다.

저는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국정의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주시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저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하루속히 대한민국이 혼란에서 벗어나 본래의 궤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정치권에서도 지혜를 모아주실 것을 호소드립니다.


2016년 11월 29일




  



조선의 중흥을 꾀했던 영조와 정조임금때부터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까지

약 80여년간의 조선조정을 정리해 보았읍니다

당시의 무능했던왕들과 지금의 대통령

당시의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정치와 지금 이나라에서 진행되고있는 친일잔당들의 국정장악

당시의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지금의 권력형 비리와 사회곳곳에 만연되어있는 무질서

그중에서 강화도령이라 불리웠던 철종임금과 지금 수첩공주라 불리우는 박근혜 대통령이 닮은꼴로 여겨 집니다

하지만 철종임금은 자기자신이 부덕한 소치 이기에 얼굴이 붉어져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이야기한 반면에 

박근혜 대통령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단 한 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왔다며

자금의 현실을 남의탓으로 돌리고 있어서 같은듯 전혀 다릅니다





영조(재위기간 1724~1776)와 정조(재위기간 1776~1800)시대를 조선의 중흥기라 말을 합니다 

조선시대에 영조는 탕평책(당파싸움을 막아 세력균형을 추진하여 와권을 강화 하려는)을

정조는 각종 개혁(인사,경제,군사,사회)을 시도, 실행을 하였읍니다

이시대를 조선의 중흥기라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정조의 개혁정치는 기득권자들의 반발과 죽음으로 미완에 그쳤고

정조위 뒤를 이어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순조(재위기간 1800~1834)가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를 왕비로 맞이 하면서

조선은 이후 60년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폐해에 빠져듭니다


순조시대때부터 조선은 안동김씨 일가의 세도정치로 인해 정치기강이 극도로 문란해 지는데 

과거제도의 문란과 매관매직의 풍토아래 관리와 이서들의 탐학과 지방 토호들의 무단행위가 성행하게 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수취체제인 삼정이 문란해지게 됩니다

(삼정(三政)의 문란 : 탐관오리의 중간수탈이나 토호(土豪)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그렇지 않아도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삼정(三政)은 국가 재정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던 전세, 군포, 환곡을 거두어 들이는일을 말함)


그러한 혹독한 수탈에 1811년의 홍경래의 난(평안도 지역에서 홍경래(洪景來) 등이 부농(富農)·사상(私商)을 규합하여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사건)을 비롯하여

 삼남지방(충청,경상, 전라)에서 계속 민란(농민항쟁)이 일어나 조선은 혼란기가 이어집니다


순조기 죽고난후 8세 어린나이의 헌종(재위기간 1834∼1849)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조선은

세도정치의 여파인 과거제도 및 국가 재정의 기본이 되는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국정이 더욱 혼란해졌고

그의 임금 재위기간 15년 중 9년에 걸쳐 온나라에 수재(水災)와 전염병이 발생하는등  백성들이 민생고로 인하여 민심이 흉흉해졌고

각종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1845년(헌종 11)에는 영국의 사마랑호를 비롯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양의 군함(이양선異樣船)들이

한반도의 연해안에 나타나 행패가 심해 민심이 어수선하였는데,

이 같은 움직임은 천주교의 유포와 더불어 불안해 하고 있던 당시의 민심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읍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23세의 나이에 후사 없이 죽자 

조선은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서자)의 아들인 이원범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 하는데

강화도령으로 불리운 이원범(당시 19세)이 조선의 25대 임금 이었던 철종(재위기간1849∼1863)임금 입니다

철종시대에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더욱 문란해진 삼정과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거기에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까지 망치게 되면서 백성들의 불만은 고조에 다달으면서

 1860년에는  경주 지방의 잔반인 최제우의 신흥 종교인 동학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하였읍니다

1862년(철종 13), 마침내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그해에 도합 37회에 걸쳐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민란을 일으키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은 2월 18일에 일어난 진주민란 입니다

이러한 민란의 원인은 세도가의 발호, 수령의 부정이 민란의 직접적인 동기라 생각 합니다




강화도령 철종이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때

 안동김씨들의 득세와 학정으로 조선왕실의 권위(안동김씨들의 학정등)는 이미 땅에 떨어졌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조선의 국운도 서서히 기울어져 갑니다.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1863년)

이하응은 (신정왕후 조씨, 익종의 비)와 협력하여 자신의 둘째아들을  조선의 26대 왕위(고종)에 올립니다.

조정이 가장 혼란한 시기에  12살의 어린나이에 왕이된 고종(재위기간 1863∼1907)은

 명성 황후 대원군 정치 싸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운동, 을사조약 사건 시달리디가

 1910 주권 일본에게 빼앗기고 1907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왕의 자리를 빼앗긴후

1919 1 21 일본인에게 독살된 으로 전해집다.



 1860(철종 11) 최제우()  창건한 민족 종교인 동학(學)은

대중적이고 현실적 교리(제세구민 )로 당시 사회적 불안 질병 크게 유행하였던 삼남 지방에서 급속히 전파 되었고

고종시대에 전봉준 지방 동학 조직 통해 농민운동 펼쳤읍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고부(古阜: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군수 조병갑의 탐학 이 발단이 되었는데

고종 29년(1892)에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은

고부(古阜 지금의 전북 정읍)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대해 소장을 내어 저항하다가 모진 매를 맞고 사망을 합니다

고종 30년(1893)  조병갑은 재직 당시 관내의 만석보(萬石洑)를 개수하면서

임금도 주지 않고, 농민을 강제동원하고 추수 때 수세(水稅)로 700여 섬을 착복한 것을 비롯,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지낸 부친의 공덕비 건립 명목으로 1000냥을 거두는 등, 부당하고 악질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거둬 착복함으로써

 형편이 어려운 농민들의 원성을 삽니다.

그의 탐학행위에 참다못한 농민 1000여 명이 1894년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봉기하였는데,

이것이 갑오농민전쟁으로 운동의 발단이 되었고

당시 조선의 조정은 갑오농민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과 일본을 끌어들였고
후에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해 독점적이고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 이에 반발한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살해당하고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고

1910년에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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