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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8대 대통령

주인 잃은 백남기 밀밭에서

매루 2016. 11. 1. 07:06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런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 플라톤 ㅡ









지난 29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고 백남기씨 밀밭 소나무에 걸린 펼침막에 가을 햇살이 쏟아졌다.

지난 29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고 백남기씨 밀밭 소나무에 걸린 펼침막에 가을 햇살이 쏟아졌다

 

주인잃은 밀밭은 휑했다. 지난 29일 오후 전남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 부춘마을 들머리에 들어서자

뒷산에서 새 떼들이 ‘퍼드득’하고 하늘로 날아갔다.

부춘마을은 15가구 정도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콩 타작을 하던 한 주민의 안내로 고 백남기 농민이 경작하던 밀밭을 찾았다.

 밭 가운데 버티고 있던 푸른 소나무들 사이에 걸린 펼침막이 늦가을 바람에 휘날렸다.

‘형님! 언능 인나서 밀밭에서 막걸리 한 잔 하셔야죠.’

“못된 것들이 존(좋은) 사람 죽여부렀제.”

밀밭 인근 밭에서 무를 뽑던 선사내(78)씨는 “부검도 안 한디 (정부가) 장례도 못치르게 한다요?”라고 물었다.

 지난 9월25일 사망한 백남기 농민의 주검을 부검하겠다던 경찰은 지난 28일 부검 영장을 다시 신청하지 않겠다고 했다.

선씨는 “몇번을 죽이려고 그 염병을 한단 말이요?

 야물고 똑똑하고, 그 아깐 사람을 어떻게 땅에 묻으까 싶소”라고 했다.

“사람을 쳐 죽여분 것들 나오는 텔레비전도 안보고 싶소….”



지난 29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고 백남기씨의 밀밭엔 박근혜 정부의 국가폭력을 규탄하는 펼침막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지난 29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고 백남기씨의 밀밭엔

박근혜 정부의 국가폭력을 규탄하는 펼침막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백씨는 지난 해 11월 14일 서울 민중총궐기집회에 나서기 이틀 전에 이 밭에서 밀을 손으로 꾹꾹 눌러 심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그는 1982년 감옥에서 나와 아내와 함께 고향 마을에 정착했다.

그리고 집 부근의 산을 밭 5000평으로 일궜다.

그리고 토종 밀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했던 그는 후배 농민들과 전국을 돌며 우리 밀씨를 모아 두루 나눴다.

그 역시 1989년 보성의 첫 우리밀 농민이 됐다.

보성농민회와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후배들은 지난 6월 주인없는 밀밭에서 밀을 수확했다.

전국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백남기 우리밀밭’에서 얻은 알곡을 빻아 만든 통밀가루와 면류를 구매했다



지난 29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고 백남기씨 집.

지난 29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고 백남기씨 집

 

“형님의 정신이 부활하도록 기원하며 씨를 뿌려야지요.”

백씨의 후배 농민들은 2일 ‘형님의 밀밭’에서 파종한다.

 지난 6월 밀 수확 때 남겨 둔 알곡을 주인없는 밭에 뿌리는 이 작업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파종’인 셈이다.

권용식(52) 보성군농민회장은 “참 따뜻한 분이셨다.

형님이 세상에 남긴 좋은 뜻을 잇기 위해 우리들이 밀밭을 맡아 계속 경작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내년 봄엔 이 밀밭에서 수확한 뒤 알곡을 남겨 주변 농민들에게 두루 제공할 계획이다.

 최강은(54)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장은

 “고인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밀을 심었던 밀밭은 돈으로 잴 수 없을만큼의 귀한 가치가 있다.

생명을 가꾸고 우리 농촌을 지켰던 의미가 담긴 ‘백남기 밀밭’을 경작해 가면서 고인의 추모·기념 사업도 해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지난 29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고 백남기씨 집 창고엔 생전 고인이 몰던 경운기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29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고 백남기씨 집 창고엔 생전 고인이 몰던 경운기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밀밭에서 200여 m 떨어진 고인의 집은 적막했다.

 ‘의로운 사람, 헌신하는 삶을 잊지않겠다’고 적힌 노란 추모 리본들이 집 앞 대문 앞에 붙어 있었다.

집 마당엔 고추장과 된장을 담은 장독 100여 개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생전 고인이 앉았던 한옥 툇마루엔 가을 햇살만 쓸쓸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고인은 며칠 뒤 차가운 주검인 채로 집과 밀밭을 찾는다.

‘고 백남기 범국민 대책위’는 1일 고인의 장례 일정과 장지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해괴한 국정농단 사태로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박근혜 정부는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농민의 죽음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보성/글·사진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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