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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석과불식의 인문학> 본문

가슴에 손을 얹고......

신영복 교수<석과불식의 인문학>

매루 2016. 1. 17. 20:52

 

 

 

 

 

 

 

 

 

 

 

 

 

신영복 교수의 <석과불식의 인문학>

2011년 11월 25일 오후7시 서울 한양대학교 백남음악관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의미

 

지금 같은 늦가을,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가지 끝에 남아있는 과실을 석과(碩果)라고 합니다.

 씨 과실입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씨 과실을 먹지 않고 땅에 묻는다’는 의미입니다.

 

 

 

인문학의 길

 

석과는 참 어려운 상황을 상징합니다.

삭풍에 잎사귀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목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빨간 감 한 개는 ‘비극의 표상’입니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엄정한 역경의 전형입니다.

반면에 ‘희망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 속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으로 돋아나고 나무로 자라고 그리고 숲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불안’입니다.

청년들로부터 엄청난 대기업 재벌 총수에 이르기까지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지속 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안을 극복하고 숲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인문학의 길입니다. 대단히 먼 길이죠. 

 

 

 

석과가 숲이 되려면

 

첫 번째 단계는 엽락(葉落), 잎사귀를 떨구는 것입니다.

거품을 빼야 합니다. 거품, 환상 이런 것들을 청산하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합니다. 

 

다음 단계가 체로(體露), 몸을 노출하는 것입니다.

잎사귀를 떨구면 나무의 뼈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개인이던 사회이던 자신을 지탱하는 진짜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본분(糞本), 뿌리를 거름해야 합니다.

접히지 않게, 바르고 튼튼하게 키워내야 합니다.

 

한 알의 씨앗이 숲으로 가기 위해서는 욕망과 환상을 청산해서

그 사회를 튼튼하게 지켜주는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뿌리에 거름을 주고 북돋아야 합니다. 

 

 

 

■ 그럼 한 사회를 지탱하는 뼈대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정치적 주체성입니다.

한미FTA의 경우, 싫으면 안할 수 있는 주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경제적 자립성입니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능력 26%입니다. 에너지는 제로입니다.

식량자급마저도 기름으로 짓는 농사입니다. 대단히 불안정한 구조입니다.

GDP중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80%가 넘습니다.

불안정한 미국 금융위기가 바로 직격탄으로 날아 들어옵니다.

그걸 거를 수 있는 장치가 없는, 대단히 비자립적인 구조입니다.

 

셋째는 문화적 자존심입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존심,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한 사회가 온전히 지탱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한 사회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한 사회의 뿌리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 엄청나게 구조조정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합니다.

그런데 경제 성장은 왜 하죠?

경제 살리기 위해서?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사람이 뿌리니까요. 뿌리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위상은 어떻습니까?

 

저는 의자를 들고 서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자를 만들 때는 그 의자위에 편안하게 앉으려고 만듭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힘겹게 의자를 들고 벌을 섭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받습니다.

 자기가 승인한 권력으로부터 억압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구조인가요?

 

제일 꼭대기, 1%의 뿔만 멀쩡하고 대부분이 균열돼있는 피라미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소수의 부자만 멀쩡하고 그 아래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져있는 피라미드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이 균열된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닙니다.

최상위층이 이식한 이데올로기와 남의 문화로 인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것도 균열의 이유입니다.

최상위층은 사회의 위기와 모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피하기 위해 근거 없는 환상과 불필요한 욕망을 유포합니다.

그런 것들이 경제적인 이유와 맞물려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 알의 씨앗이 숲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과 환상을 청산해서

그 사회를 튼튼하게 지켜주는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사람의 위상이나 사회의 구조가

이런 인문학적 가치를 실현하기 대단히 어려운 구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생의 가장 먼 여행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성과 감성의 거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고

지식과 품성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수능시험의 모범 답안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밑줄 긋고 암기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지식을 자기의 인간적인 품성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굉장히 먼 여행이 필요한 일입니다.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이 또 하나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삶의 현장이며, 땅이며, 숲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하는 여정이란 결국 개인으로서의 완성을 넘어 숲으로 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완성이 명목(名木)이나 낙락장송(落落長松)이 아니라 수많은 나무가 함께 살아가는 숲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발까지 가는 것이 인문학

 

공부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한 장면처럼 책상 위에 올라서는 겁니다.

 텍스트에 밑줄 긋고 암기하는 게 아니고,

올라서서 넓게 우리 사회의 뼈대도 통찰해내고,

100년 후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고……. 이런 것이 공부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은 대단히 먼 여행입니다.

석과(碩果)에서 숲으로 가는 여행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을 검토해보면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서 발까지 가는 그런 먼 여행입니다.

 

 

 

머리

 

먼저 우리 머리가 갇혀있는 틀을 자각하고 깨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안 갇혀있다고 생각하시죠?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시죠?

 

1450~1750년 중세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수십만, 수백만의 마녀가 교살당하고 불태워져 죽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흑사병, 인구증가, 경제위기, 종교개혁, 전쟁 같은 사회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 지배자들은 ‘마녀’ 라는 허상을 유포했고

일반인들은 불행의 원인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욕망을 자극받아 마녀사냥에 동참했습니다.

중세문맥, 마녀문맥에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가 갇혀있는 문맥은 없나요?

 마녀문맥보다 더 완고한 문맥에 갇혀있지는 않을까요?

 

흔히 여러분 세대를 개성세대라고 합니다만 사실 자기 아이덴티티라는 게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알튀세르는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 호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대학생, 너는 40대의 외국인 노동자…….

그럼 누가 호명합니까.

한 사회에는 엄청난 포섭 기재들이 있습니다.

 감옥, 군대, 병원, 학교, 공장 등의 근대적인 시스템을 통과하면 누구나 근대문맥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저희 동네에 아주 잘 나가는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외모도 뛰어났습니다. 반면 그의 아내는  정 반대에 가까웠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저 두 사람이 부부가 됐을까?

그러다 결론이 났습니다.

 “그 부인 친정이 굉장한 부자다”, 라고요.

 

사실 학창시절에 두 사람이 아주 운명적인 사랑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부인이 굉장히 따뜻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거 다 버리고 ‘친정이 부자인가보다’ 결론을 내린 겁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우리의 머리가 상품문맥에 갇혀있는 겁니다.   

먼저 우리 머리가 갇혀있는 틀을 자각하고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으로 가야합니다.

 

 

 

가슴

 

머리가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은 가슴이 하는 겁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라고 하지, 머리에 손을 얹고 생각하라고 하지 않잖아요.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생각이라는 것은 자기 세계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김연아가 트리플 점프를 할 때는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하지만 아사다 마오가 점프를 할 때는 조마조마하지 않지요.

그 사람은 우리 세계에 들어와 있지 않으니까요.

 

가슴이 생각하는 겁니다.

가슴이 자기의 세계를 조직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슴은 용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야하는 겁니다.

 

 

 

“만약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셔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감옥 안에 있고 당신이 밖에 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감옥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우리 방에 마흔 살 쯤 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접견 호출을 받았습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친구였습니다.

남매를 삼촌 집에 맡겨놓고 돈 벌겠다고 떠난 어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은 친구였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접견 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접견장으로 나갔습니다.

 

접견실에 가보니 생면부지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냐고 묻고 대답하다보니 어머니가 재혼 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어린 남매만 남겨놓고 어머니가 죽은 가정이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키운 남의 집 아들이 40년 만에 묻고 물어서 자신을 접견 온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이 친구는 왜 왔냐고, 누구 속 뒤집을 일 있냐고 소리쳤답니다.

 

그러자 접견 온 사람이 굉장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답니다.

 “만약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셔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안에 있고 당신이 밖에 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목수가 집을 그리는 순서

 

어느 날 나이 많은 목수가 뭔가를 설명하다가 땅에다가 집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목수는 주춧돌을 먼저 그리고 기둥을 그리고 맨 마지막에 지붕을 그렸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붕부터 집을 그리던 나하고는 정 반대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와 같았습니다.

학교에서 키워낸 나 같은 먹물들의 인식 틀은 얼마나 창백하고 관념적이었던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의(大義)라는 이름의 친구

 

대의(大義). 이름이 아주 좋죠.

그런데 나이 서른이 안 된 이 친구가 벌써 절도전과 3개였습니다.

 이름 지어준 아버지가 얼마나 속상해할까, 얘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 물었습니다.

그 좋은 이름 누가 지어줬냐고.

그러자 그 친구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그런 소리한다고 그래요.

 자기는 이름 지어준 부모가 없었답니다.

돌이 채 되기 전에 버려진 고아였는데 버려진 장소가 광주 도청 인근에 있는 대의동 파출소 앞이었답니다.

그래서 고아원에 대의라는 이름으로 입적됐다는 겁니다.  

 

문자를 통해서 한 사람의 험난한 인생을 재단했던 것이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충격이었습니다.

 

 

 

똘레랑스(관용)

 

20년간의 감옥 생활 동안 수많은 만남을 통해 도달한 이해와 공감의 단계가 아마도 똘레랑스,

 관용의 단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똘레랑스는 어느 정도의 이해와 공감일까요?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리겠습니다.

” 이렇게 목수를 용인하되 바깥에 세워두는 것은 진정한 똘레랑스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시혜 같은 이해와 공감에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똘레랑스는 ‘변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현대철학에서 이야기하듯 

주체를 해체하고 자기 변화를 이루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똘레랑스입니다.

차이와 다양성은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를 변화시키는 대단히 반갑고 감사한 기회인 것입니다.

 

 

 

‘나’

 

다른 사람들과 완벽하게 단절된 배타적인 ‘나’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내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내 속에 들어오고,

내가 겪은 수많은 사건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그런 관계성 속에서 ‘나’라는 정체성을 만들어집니다.

 

그런 면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것이 주체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천박한 인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나’를 배타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타자보다 경쟁력이 있는,

보다 강한 존재로 키워내려고 애씁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남의 것을 빼앗아 ‘나’의 존재를 키우는 근대사회의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보수적인 사회

 

우리 사회는 타자를 배제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막강한 지배블록이 완고한 보수 구조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언론…….

 

이것을 깨고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찾아가는 인문학의 길은 대단히 힘든 것입니다.

 

 

 

변방(邊方), 변화의 핵심적 공간

 

중심부는 틀 속에 갇혀 있습니다.

중심부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으로 타자를 동화시키려고 할 뿐입니다.

 

이와 달리 변방은 변화의 핵심적 공간입니다.

변화의 키워드입니다.

설령 중심부에 서게 되더라도 부단히 자기 영토를 버리고 탈주해야 합니다.

부단히 변화하는 그런 유목주의, 노마디즘(nomadism)에 충실해야 합니다.

생명의 지속가능성 자체가 변화에 있는 것입니다.

 

 

 

변방의 역사

 

변방은 다음 시대의 중심부를 반드시 만들어 냅니다.

인류의 역사도 그랬습니다.

 변방의 역사입니다.

 

그리스 로마라는 고대문명은 그리스 로마에서 볼 때 변방인 갈리아 북부의 산골짜기로 그 중심이 옮겨갑니다.

 바흐, 모차르트, 세잔느가 모두 여기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근대문명의 중심지는 중세유럽에서 볼 때 변방인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옮겨갑니다.

 그 다음의 중심지인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중국의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다 변방이었습니다.

 

 

 

변방의 창조성

 

문명의 중심부가 이처럼 부단히 변방으로 옮아가는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변방의 창조성, 변방의 가능성입니다.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사상가 또는 문필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 연암 박지원 선생입니다.

연암은 우리나라 최고의 문필가이면서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16세 결혼할 당시만 해도 연암의 학습은 대단히 불충분하고 빈곤했습니다.

당 시대의 문체나 성리학의 기초가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처삼촌이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3년간 글을 가르쳤습니다.

 결국 연암은 우리나라 최고의 문필가로 변화했습니다.

갇혀있는 문맥이 없었기 때문에 연암의 창조적인 글쓰기가 피어난 것입니다.

 

정조는 조선조 말기의 부패한 봉건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규장각을 만들고

일꾼으로 이덕무, 유덕공, 서이수, 박제가를 임명했습니다.

 네 명 모두 첩의 아들입니다.

 이들은 당시 구조에서는 벼슬을 할 수없는 변방이었습니다.

마침내 이들 백탑파를 중심으로 개혁이 일어납니다.

 

변방과 마이너리티의 창조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여러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논리에 따른다면 문맥에 갇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새롭고 창의적인 구상이 가능했던 겁니다. 

 

 

 

콤플렉스

 

그러나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됩니다.

 콤플렉스가 있는 경우에는 조선 성리학과 같이 중심부보다 더 완교한 교조주의에 빠집니다.

변방이 중심부보다 더 완고한 교조주의가 됩니다.

 

콤플렉스가 없는 문화가 없고,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이 없죠.

대부분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콤플렉스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콤플렉스는 당사자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무섭습니다.

단어 하나 고를 때에도, 넥타이나 가방 또는 헤어스타일까지도 콤플렉스가 작용합니다.

개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만 한 사회의 문화가 콤플렉스로 구조화되어 있다면

그 사회는 합리적인 가치를 정립할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됩니다.  

 

 

 

변방에 숲을 만들자

 

허망한 짝사랑, 환상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리고 변방으로 가세요. 그래서 숲을 만드세요.

창조적 숲, 탈 문맥의 숲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을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변방에 숲을 만드는 겁니다.

 

물의 마음으로 가야합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갑니다.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다 ‘공부’라고 생각하고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가세요.

그러면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이게 인문학의 길입니다.

바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물이지만 가장 큰 물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바다’ 아닙니까. 

 

인문학은 바다로 가는 먼 여정입니다.

 숲으로 가는 여정이기도 하고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발로 가는 여정이기도 하고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바다로 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 먼 여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길의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도로와 길

 

도로와 길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밀란쿤데라는 <불멸>에서 도로는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시간을 단축시키는 효율성이 높아야 합니다. 직선이면 제일 좋지요.

존재성이 없어지는 게 제일 좋은 도로입니다.

도로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입니다. 속도와 효율성입니다.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은 그 자체에 존재의미가 있습니다.

 구불구불한 모습 그대로가 자기 삶입니다.

동물들 대부분은 소변도 보고 냄새도 맡고 하면서 길을 갑니다.

다만 맹수에 쫒길 때는 직선으로 달려갑니다.

우리도 뭔가 쫒기니까 직선을 선호하는 겁니다.

 

길의 마음으로 목표보다는 그 자체가 가치고, 보람이고, 자부심인 그런 삶, 그런 과정을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여럿이 함께

 

감옥을 나와 처음 기부한 붓글씨가 ‘여럿이 함께’입니다.

연대라는 시대적인 과제하고도 맞아떨어져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럿이 함께’라는 글 속에는 방법만 있고 목표가 없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목표는 ‘함께’속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향해야할 목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는 목표에 이르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목표 그 자체입니다.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나는 법입니다.

 

먼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로부터 당면의 실천적 과제를 받아오는,

이른바 건축의지는 거꾸로 된 구조입니다.

목표와 성과에 매달리게 하고 그에 이르는 전 과정을 수단화하고 황폐화합니다.

설계와 시공은 부단히 통일되어야 합니다.

‘여럿이 함께’는 방법이면서 목표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패러다임에서는 누군가가 지시해야 합니다.

 지시가 없으면, 모델이 없으면 스스로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누군가의 지시가 있어야만 안심하고 갈 수 있다’는  사고는 문화적인 주변국, 종속적 사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길을 가는 건 ‘여럿’인데 도대체 누가 명령을 한단 말입니까.

 ‘여럿’이 스스로 결정하는 겁니다. 아픈 다리 서로 기대고 먼 길을 가면서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버섯이야기

 

네덜란드의 외과의사이기도 하고 동화시를 쓰는 반 에덴이라는 작가의

<어린 요한>이라는 동화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다가 길섶에 나 있는 버섯들을 봅니다.

그중에 하나를 스틱으로 가리켜요.

그리고 아들한테 가르쳐줍니다.

 “얘야 이 버섯이 독버섯이다.”

 

독버섯이라고 지목받은 버섯은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옆에 있던 버섯이 위로합니다.

“너는 절대로 독버섯이 아니야. 네가 얼마나 다정하고 의리 있는데....”

그래도 위로가 안 됩니다.

정확하게 자기를 스틱으로 지목했으니까요. 

 

옆에 있던 버섯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랬습니다.

“네가 독버섯이라는 건 사람이 하는 말일 뿐이야.”

 

버섯인 우리가 왜 나는 먹는 버섯, 너는 못 먹는 버섯이라는 인간의 논리로 우리 자신을 판단해야 하냐는 버섯의 항변입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의 이유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사회가 굳건한 문화적 자주성, 주체성이 있는 사회도 아니고, 오

히려 우민화라는 굉장히 막강한 포섭 기제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사는 것이 바로 자유(自由)입니다.

자기의 이유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맺음말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시가 있습니다.

민영규님의 <지남철>입니다. 

 

바늘 끝이 고정된 나침반은 무용지물입니다.

여윈 바늘 끝의 떨림처럼 고뇌하고 방황하면서도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고 먼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무리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 대단히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의자를 높이 들고 있기도 하고 막강하고 완고한 보수구조 속에 계란처럼 깨지기도 하고...

 

그렇지만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납니다. 여러분들이

힘들더라도 정말 인간다운 길에서 여러분의 끈질긴 고뇌와 노력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참고=<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처음처럼> 랜덤하우스
정리=박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