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화중이 본문
제가 종양제거 수술 또는 항암치료차 원자력병원에 입원해 있을때면
하루도 빠짐없이 퇴근길에 저를 찾아와 위로와 말벗이 되어 주었던 친구 화중이 입니다
요즈음 영흥섬 하수오농장에 옥수수가 알맞게 익기 시작을 하였고 맛을 본 이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기에
직접 만나기 어려운 몇몇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택배 주소록을 정리 하다가
화중이의 집주소가 적혀있질 않아서 화중이에게 전화를 하였읍니다
차분하가게 서로 안부를 나누던중 지난번 정기검진때 구신 이라는곳에 암세포가 전이가 되어있는것을 발견하고
몇일 있다가 종양제거수술을 한다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옵니다
그리고는 "수술받고 지내다 또 생기면 떼어내고 뭐 그렇게 사는거지......."
제가 좋아하는 친구 답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밀알복지재단에서 장애인활동지원센터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가평 설악에 선교사마을(노인복지주택) 건립 사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동영상은 설악 생명의 빛 예배당입니다.감사합니다.
http://tvcast.naver.com/v/496093
2016년 4월 22일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밀알복지재단에서 열린 홍보대사 위촉식에 참석한 배우 박정철
김지영 밀알복지재단 기획조정실장(왼쪽), 양인순 밀알복지재단 지역개발실장(왼쪽 두 번째),
배우 박정철(가운데), 오화중 밀알장애인활동지원센터 소장(왼쪽 네 번째), 정형석 밀알복지재단 상임대표(맨 오른쪽)
밀알복지재단, 배우 박정철 홍보대사 위촉, 소외이웃 권익옹호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예정
○ 지난 22일(금), 배우 박정철 밀알복지재단 홍보대사로 위촉돼
○ 박정철, 지난해 마다가스카르 봉사활동 이후 밀알복지재단과 나눔활동 지속해와
○ 밀알복지재단-박정철, 지구촌 소외이웃 권익옹호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예정
밀알복지재단(이사장 홍정길)이 지난 22일(금), 배우 박정철을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박정철은 지난해 밀알복지재단을 통해 마다가스카르 봉사활동을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재능기부 등 꾸준한 나눔활동을 이어온 바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22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밀알복지재단에서 열린 홍보대사 위촉식에 참석한 박정철은
“밀알복지재단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라며
“지구촌 소외된 이웃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활동에 적극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밀알복지재단 정형석 상임대표는 “박정철 홍보대사와 밀알복지재단이 꿈꾸는 세상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앞으로 박정철 홍보대사와 함께 소외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통합사회를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배우 박정철은 지난 해 SBS 희망TV와 밀알복지재단을 통해 마다가스카르에 방문해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 위로를 전하고 돌아온 바 있다.
또한 지난달에는 밀알복지재단의 미디어모금캠페인에 재능기부로 참여해
열악한 상황에 놓인 아동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나눔문화 확산에 앞장서기도 했다.
2016년7월 5일 작성글
어제 화중이 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읍니다
장애(소아마비)에도 불구하고 항상 진취적이고 명랑하여 낙섬친구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친구인 그가
정년퇴직(밀알제단 행정실장)을 앞두고 연로하신 치매상테의 어머니를 모시면서 많이 힘이 들었었고
과중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간수치가 떨어지면서 암이 발생하여 몇달전에 수술을 마친후
지금은 속리산 부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화중이 입니다
제가 원자력병원에 수술을 위한다거나 항암을 위하여 입원을 해있을때면
거의 매일 빠짐없이 퇴근길에 찾아와주던 다정한 친구인 화중이....
그러했던 그도 장애의 몸에 과중하게 눌려온 스트레스에 저처럼 암환자가 되었기에
몇일전에 돌아가신 제아버지와 지금은 동생집에 게시는 화중이 어머니를 생각해 보면서
조심스럽게 같은 맏아들로서 환갑의 나이에 부모를 모셨거나 모시면서 겪고 느끼는 동병상린의 안타까움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 와중에도 "일후야, 수술 한지 한달 밖에 안된 몸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느라 애썼다"는
위로를 해주기 위하여 제게 전화를 했던 겁니다
화중이나 저나 한국전쟁이 끝난후 인천 끄트머리 바닷가였던 용현동 낙섬주변에 모여 살았던
황해도 출신 피난민들의 2세 이기에 생각과 행동이 마치 친형제 같은 친구 이기에
어서 빨리 화중이가 몸과 마음이 회복되어 예전처럼 늘 웃는 다정한 화중이가 되어 저와 친구들 곁으로 돌아오면 좋겠읍니다
저의 결혼식때 축가로 불리웠던 사월과 오월의 <등불>은
화중이가 노래방에 가면 즐겨 부르는 노래 입니다
2015년 5월 12일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이시다.
조만식선생님과 같이 김일성에 대항하여 민주당에서
황해도 지구당 위원장을 하시다가 6.25에 강제로
인민군으로 끌려나와 포로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시 과감히
북녁 고향을 버리고 남쪽나라를 택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으로 인천에 터를 잡으셨다.
그래서, 나의 고향은 인천이 되었다.
태어 난 곳은 만석동이고 자란 곳은 용현동이다.
초등학교 시절 누가 나의 고향을 물으면 아버지 고향인
황해도 옹진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6,25 이후 옹진은 인천과 황해도 둘로 갈라졌다.
인천시 옹진군 영흥면 앞바다에 서니
아버지 고향 황해도 옹진이 생각이 났다.
나에게 고향은 어떤 곳일까?
아버지 태어나 자란 고향인가?
내가 태어나 자랐던 곳이 고향인가?
그 시간보다 몇 갑절을 더 길게 살아온 곳이 고향인가?
사실 많은 시간, 인천보다 더 보낸 곳이 서울이기에
서울이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빌딩 숲, 서울도 고향이 될 수 있느냐고???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되돌아가는 회귀를 생각한다.
연어에게는 험란한 물결을 거슬려서라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다.
연어들의 늙은 회귀처럼
아버지께서 돌아갈 고향을 늘 그리워하셨는데
나에게도 돌아갈 고향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은
마당 한복판에 커다란 느트나무가 자라고
앞에는 낙섬 너머 바다보이고
뒤에는 수봉산과 저 너머 월미도와 자유공원이 있던 곳...
여름이면 저수지로 몰려가서 같이 멱을 감던 친구들이 있고
겨울이면 논바닥에서 썰매를 지치던 친구들이 있는 곳
초등학교 시절 많은 친구들과 추억이 남아 있는 한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은 서울보다는
내 고향은 인천으로 간직하고 싶다
오화중
팔미도가 바라다 보이는 영흥섬 십리포 바닷가의 화중이
너를 만나면 눈물이 나올것 같구나
오화중
오화중 행정실장은 79년도 제자훈련학교, 일반부 출신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위치한 밀알학교 행정실 실장으로 재직중이다.
그리고 남송교회 안수집사로 봉직하고 있다.
2009년 9월 3일
40년동안 용현초등학교 시절을 잊고 살다가
어제 "화중이 너 배밭에 살던 애 맞지? 하는 신일이 전화를 받고 꿈속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배 밭 !
그 배 밭은 아버지의 작은 꿈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몸이 아프신 아버지는 배 밭의 꿈을 접으시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마을 입구로 이사와 구멍가계를 시작하셨다.
아버지의 예상은 맞아 6학년 때 쯤에는 마을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큰 가계가 되었고
우리 집은 부자가 되었지만 무리하신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 !
나의 집은 용현 1동이었고 학교는 용현 2동이어서 쩔뚝거리는 내 걸음으로 1시간 정도 걸어서 다녀야 할 정도로 멀었다.
몸이 약한 나는 자주 아팠지만 죽을 만큼 아파도 학교는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결석 없이 6년을 개근할 수 있었다.
학교 가는 길 !
쩔뚝거리는 다리로 학교 가는 길은 남보다 먼저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혼자 걸어가는 길이었다.
가끔씩 신일이가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학교가자고 한 것도 같은데
늦잠꾸러기였을(?) 신일이가 일찍 우리 집으로 온 적은 많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큰 길을 2-3개지나 고개 넘어 철길을 만나면 학교가 보였다.
철길은 친구들의 즐거운 놀이터였다.
운 좋게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만나면 긴 못을 철길위에 놓아 납작한 칼을 만들거나
지나간 기차 길에 귀를 대고 멀어져 가는 기차 소리를 듣는 즐거움도 있었다.
철길을 지나면 그 때서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끔씩 친구들이 가방을 들어 주었던 기억이 있는데
신일이도 자주 내 가방을 들어 주었던 것 같다.
“ 너를 만나면 눈물이 나올 것 같구나.”
신일이가 전화를 끝내면서 한 말은 친구들을 더욱 보고 싶게 만들었다.
선표, 세우, 신일이 너네끼리만 영흥도에 가서 술 쳐 먹지 말고 슬 못 먹은 나도 가끔 불러다오.
나, 술은 못 먹어도 회는 잘 먹어!
2009년 12월 11일
신일이와 화중이 (2010년 가을 어진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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