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간석 감리교회 본문
제가고등학교 1학년때 저희가족은 용현동을 떠나 지금의 상인천중학교 앞으로 이사를 왔읍니다
지금은 교통의 요충지로 변한 간석5거리는 그당시 석촌입구라고 불리우던 한적한 삼거리 였었는데
약사사(당시에는 약사암)라는 절에 가기위해서는 이곳에서 차를 내려야 했기 때문에 약사암 입구라고 불리우기도 했읍니다
인천에서 수원을 가려면 경인국도를 달리다가 이곳에서 우회전 진입을 해야했고 이곳부터 수원까지는 비포장도로 였었읍니다
제가 다니던 동인천고등학교가 있었던 제물포에서 저희집을 오려면 버스안내양이"주안,석바위,석천입구,남동,운연동"을 외치며
호객을 하던 22번 시내버스를 타야 했읍니다
저희가 그곳에 이사를 온후 몇년이 지나자 그곳으로 이사온 상인천중학교(예전에는 인천고등학교와 함께 있었음)가 생기기전 까지
제가 22번 시내버스를 타고 내리던 정거장 이름은 문약국앞 이었읍니다
이제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문약국집의 아들이 제 목사동생과 친구 이기도 했었읍니다
저희 가족이 새로 이사한 집은 계란을 생산하는 닭이 아니라 갓부화한 병아리를 2개월간 키워 출하하는 육계(肉鷄))마을 이었는데
흔히들 양계단지라고 불렀읍니다
마을주변은 陸稻라고 불리우는 밭벼가 심겨져있는 진흙성분의 찰진 토양 이어서 비가 온후면 신발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고
그무게에 신발이 벗겨지곤 하였읍니다 그러한 찰진성분의 황토흙 때문에 마을 입구에는 옹기공장이 있었읍니다
진흙을 모아 물에 푼후 점토성분을 추출해내는 써레질 이라고 불리우는 작업을 비롯해서
써레질로 만들어진 진흙을 가지고 발로 틀을 돌리면서 손으로 빚어내는 옹기제작과정은 언제 보아도 신기하고 즐거운 구경 이었읍니다
여름방학이 되면 마을옆 수녀원으로 포도를 사러 가면서 돌아오는길에 지름길 이라는 핑계로 과수원(배밭)을 관통해 오다가
바람에 떨어져잇는배(지금은 남동배 라고하는 특산품이 되어있음)들을 실컷 줏어 오기도 했었고
지금은 목사가 된 바로밑의 동생과 훗날 인천대공원이 조성된 장수천에 가서 소쿠리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기도 했었읍니다
그곳으로 이사를 간후 제가 먼저 찾았던곳이 교회 였엇는데 처음에는 지금의 간석3동 사무소 부근의 성결교회를 갔었읍니다
어느날 세례를 받지않은 신자라는 이유로 불평등한 대우가 느껴지기에 옮긴교회가 간석감리교회 였읍니다
인천등지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올겨온 철거민들이 모여살던 판잣집들이 모여있는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있었던 교회는
그당시 동네에서 가장 높은곳에 있는 건물 이었읍니다
훗날 저희 어머니와 동생들도 이교회의 신자가 되었고 제 바로밑의 동생 광후는 감리교신학대학에 진학후 현재는 목사가 되어있고
여동생 혜경이는 그교회에서 흥진이와 교제후 결혼을 하였는데 흥진이는 지금 그교회의 장로님이 되어 있으며
그들의 자식들인 상돈이와 진경이까지 대를 이어 그교회의 성도 입니다
저는 어제 오랫만에 영흥도에 들어가서 제 花室의 창에 쳐있던 방풍비닐도 제거하고 화초에 물을 주느라 한나절을 보냈읍니다
영흥도의 제 친구 신일이의 부동산 사무실에 잠간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중 노부부(?) 한쌍을 만나게 되었읍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남자분은 제가 간석감리교회에 처음 나가기 시작할때 그교회의 청년 이었읍니다
그분은 훗날 지금의 만수시장쪽으로 나와 개척교회를 열었는데 당시 중학생이었던 저희 막내동생은
그분을 따라서 교회를 옮기는 바람에 저희 아버지에게 38선을 넘어 다니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었읍니다
현재나이 65세라는 그분은 목사직을 은퇴하고 바닷가에서 노후를 보내려는 생각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 하려고
영흥도에 왔다가 저를 만난것 이었읍니다
저나 제 형제들보다 먼저 간석교회에 나오시던 그야말로 간석교회의 역사인 셈인 그분께서는
제동생들의 이름을 듣자 너무도 반가워 하시며 옛추억들을 한참동안 이야기 하였읍니다
저희 형제들이 간석교회에 다닐때 20대 후반 이었을 그분(65세)의 얼굴 주름들에서
언제적 이야기야 라고 말할 만큼의 세월의 흔적과 추억이 느껴지고 떠올랐읍니다
저희 형제들이 이교회에 다니던 70년대에는 이부근에서 가장 높은곳에 있던 건물 이었읍니다
저희 형제들이 교회에 가기 위하여 오르던 이곳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판잣집들 사이의 골목길이 눈에 선 합니다
공원조성 사업으로 교회주변의 주택과 건물들이 모두 헐리고 그와함께 우리들이 오르던 골목길의 자취도 함께 사라졌읍니다
저희 가족들이 이사와 살던 양계단지에도 재개발 분위가 느껴집니다
지금 이곳에 살고있는 주민들 대부분은 양계마을 명칭 만으로 이곳이 옛날에 닭을 키우던 양계단지 였을거라고 추측만 할수 있을뿐
옹기 항아리를 만들던 곳이 있었던 인천 끄트머리의 시골 이었다는것은 모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