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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

차이나타운 나들이와 뙤놈의 추억

매루 2022. 12. 20. 23:07

 

지난 화요일(12월 20일) 이웃인 마래모래 부부와 함께 인천 차이나타운 나들이를 하였읍니다

 

차이나타운에는 여러곳의 중국음직점이 있는데

그중에 태화원은 제가 20년 넘게 즐겨찾는 단골 중국음식점 입니다

 

우리 일행은 양장피와 탕수육 그리고 고추잡채를 주문하였고 저는 하얀짬뽕을 주문 하였읍니다

 

 

 저와 이곳에 자주 왔었던 제 아내와 달리

마래모래부부는 중국음직점에 자주 다니질 않기도 했지만 중국음식점 요리가 이렇게 맛있는줄은 몰랐다며

무척 좋아하며 앞으로 자주 오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어린시절 학익동 뙤놈들의 추억

 

1964년도 학익동 인하공대(인하대학교의 전신) 상공 사진 입니다

사진  오른쪽쪽 아래의 학익국민학교에서

학교뒷산의 소나무숲길을 넘으면(사진속에 흰색으로 나타나 있읍니다)

사진 위쪽의  문학에서 독쟁이고개 쪽으로 난 도로(이 길은 아직도 그대로 있습니다)가 나오는데

그 일대가 모두 화교들이 농사를 짓는곳 이었고 이길을 이용하여 등하교를 했었읍니다

그시절 등하교길에는 그 주변에 살고있던 화교 어린이들과 학익초등학교 학생들간의  다툼이 벌어지곤 했었읍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가을 어느날 담임선생께서 학예회 준비로 저와 몇몇친구를 방과후 남게 하셨읍니다

학예회때 발표할 율동연습은 아직 해는 남아 있지만 곧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끝이 났고 

율동연습이 끝나고 아직 해는 남아 있지만 곧 땅거미가 질 무렵 이었기에

어린 저 혼자 학교뒷산을 넘어 집으로 갈 생각을 하니 무척 무섭고 난감 하였읍니다

그때 학익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는 나도는 괴담 몇개가 있었는데

해마다 봄이면 <몇학년 몇반의 누구가 학교 뒷산에 사는 문둥이(나환자)에게 붙들려 가  간을 빼먹혀 죽었다더라>,

,<뙤놈 또는 때궁놈이 몇학년 몇반 누구를 붙잡아다 짜장면집에 팔았는데

짜장면에는 사람고기가 들어가야 맛이있기 때문이다>라는등의

어린아이들이 듣기에는 소름 끼치고 무서운 이야기들이 돌던 곳 이기에

땅거미가 질 무렵에 겁 많은 어린 저 혼자서 이 고개를 넘는다는것은 무척 어려운 일 이어서

세월이 무척 많이 지나 노인이된 지금도 그때의 공포가 잊혀지질 않고 남아있읍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뙤놈이나 때국놈 이라는 말은 사실 욕도 아니었지요

어찌보면 우리민족의 뿌리깊은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중국사람들을 흉보거나 폄훼할때에

고작 큰나라 사람(대국 놈)으로밖에 표현을 못한것 이지요

 

훗날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는데

저의 초등학교 등하교길에 우리나라 어린이들과 마찰을 밎었던 중국어린이들은 

대부분 화농(華農 : 화교 중에는 농업에 종사한 이)의 자식들 이었읍니다

 

 화농(華農) 

1884년 맺어진 제물포조약 이후  인천에 청의 조계지가 설정되자  청나라에서 여러 사람들이 건너왔는데,

그 중에는 산동지역에서 건너와 채소를 기른 화농(華農)들이 있었다

이들이 길러낸 채소를 파는 시장을 낸 것이 신포시장의 기원이다.

화농은 당시 조선에서는 기르지 않았던 양퍼, 당근, 토마토등을 들여왔고

이후 이 작물들이 전국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학익동의 화농(華農) 

948년 4월말 인천의 화농 호수는 215호였고 22만2천평의 밭에서 채소농사를 지음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됐던 화농들의 채소농사는 해방 후 1970,8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주로 주안동, 용현동, 숭의동, 석바위, 도화동, 송림동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곳은 당시만해도 도시의 외곽으로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던 동네였다.

그들은 맹지를 개간해 밭농사에 적합한 땅으로 만들었다.

화농들이 지었던 농산물은 시금치, 우엉, 배추, 무, 토마토, 양배추, 오이, 부추 등

지금도 우리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채소들이다.

제가 어렸을적에 중국밭 근처에서 많이 보았던 중국인들의 똥지개 입니다


화농들은 농사에 쓸 퇴비를 구하기 위해 이웃동네 집들의 '푸세식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처리하기도 했다.

동네 화장실 인분을 치워주고 그것으로 퇴비를 만들었다.

인분은 그들에게 중요한 농사의 자원이었다.

 인천화교 학교 용현분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 직업은 대부분 농부였다.

이런 이유로 화농의 아이들은 한국인들로부터 ‘똥냄새’ 난다며 놀림을 받곤 했다.

참고로 중국인들의 똥지게와 우리나라의 똥지게는 모양이 다릅니다   

1948년 부평 중앙로입니다.

멀리 계양산이 보입니다.

 

아래사진에 화교학교가 표시되어 있읍니다

사진 좌중간  아래에 학익초등학교와 학교뒷산 소나무밭을 지나  저의 등하굣길이 하얗게 보입니다

 

 

1960년대 초로 추정

오른쪽에 보이는 산이 만월산이고..그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삼각산이 되겠습니다.

왼쪽 가까이 보이는 산은 수봉산입니다.

아래쪽은 학익동 공장지대이고..

오른쪽 중간에 학익국민학교가 보입니다.

이 때만 해도 인하대는 지금의 정석고등학교와 인하전문대가 있는 곳에

대부분의 교사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는 인하전문대가 없던 때이고..

정석고등학교는 그 전신인 한독실업학교가 있을 때였습니다.

나중에 왼쪽에 보이는 터에 지금의 본관이 들어서게 됩니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작은 학교는 용일국민학교가 되겠습니다.

수봉산에서 동쪽으로는 이때만 해도 전부 농지였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흐르는 개천이 승기천이지요.

[출처] 인하대학교 상공에서|작성자 kkkk8155

 

 

 

 

인천화교학교 학익분교

 

인천의 화교들의 교육기관 으로는 자유공원 옆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산중,소학교가 유일 하지만

7,80년대 까지만해도 3군데의 중산 중소학교의 분교(용현, 주안, 부평)가 있었읍니다

이중 용현분교는 세 곳의 분교중 학생수가 가장 많았고 가장 늦게까지 운영을 했었읍니다.

1965년 용현분교 졸업사진입니다.

용현분교는 평산분교라고도 하였는데 1987년 7월 폐교가 되었습니다.

일제시대 때 용현동에 평산..이라는 일본인의 농장이 있어

평산이라는 이름이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습니다.

[출처] 인천의 화교 분교|작성자 kkkk8155

 

 

 

1975년 용현분교사진 입니다.

[출처] 인천의 화교 분교|작성자 kkkk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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