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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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이야기

화중이

매루 2020. 3. 22. 01:52

 

 

 

 

 

 

 

 

 

 

인천 용현동 낙섬 바닷가에는 한국전쟁통에 남쪽으로 피난을 왔던 북한주민들 중에서

황해도 출신 피난민들이 전쟁이 끝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자신들의 고향과 가까운 인천 하고도 바닷가인 이곳에 많이 모여살며 전쟁이 끝나길 기다렸었읍니다

하지만 휴전과 함께 남북분단이 고착 되면서 인천은 그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고

제가 다녔고 졸업을 한 낙섬옆 용현초등학교에는

저처럼(아버지 황주, 어머니 장연)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의 2세들이 많았읍니다

화중이 역시 황해도출신 실향민 2세 이기에

마치 피가섞인 동기간 처럼 매우 가깝게 지내는 사이 입니다  

 

 

어제  화중이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영흥섬을 다녀갔읍니다

저와 초등학교 동창 사이인 화중이는 장애(소아마비)를 극복하고

어려운이들을 위한 봉사(밀알 선교재단 행정실장)와 선교에 매진했던 참다운 사람으로

불편한 몸(암 투병중)으로 불원천리 영흥섬을 찾아온 그가 저의 벗 이라는것이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있는 낙섬일사회(용현초등학교 14회 졸업생들의 모임)의 여러 친구들 중에

오화중 이라는 이름의 평범치 않은(?) 친구가 한명 있읍니다

그는 어제(2017년 1월 21일 토요일) 서울에서 그의 딸을 시집을 보냈읍니다

 

화중이와 저는 용현초등학교 동창생 사이 이지만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지는 이제 10년정도 밖에 되질 않았읍니다

화중이가 저를 처음 만났을때 저는 심각한 말기암 환자였고

서로 차츰 가까워 지면서 저는 그로부터 크나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정상인들을 부끄럽게하는 그의 진취적이고 밝고 명랑하며 바른 삶의 모습 때문 이었읍니다 

 

제가 수시로 재발하는 암 수술 또는 항암치료차 원자력병원에 입원해 있을때마다

밤늦은 시간에도 아랑곳않고 퇴근길에 저의 병실을 찾아와 저를 위로해 주었던 그가

몇년전 부터 암환자가 되어 힘겨운 투병을 하고 있기에  많은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던중

어제 그의 외동딸을 시집 보내게 되었읍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화중이에게 가늠키 어려운 커다란 축하의 마음을 전 합니다

 

2017.01.21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이시다.
조만식선생님과 같이 김일성에 대항하여  민주당 황해도 지구당 위원장을 하시다가

6.25에 강제로 인민군으로 끌려나와 포로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시 과감히  북녁 고향을 버리고 남쪽나라를 택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으로 인천에 터를 잡으셨다.

그래서, 나의 고향은 인천이 되었다.
태어 난 곳은 만석동이고 자란 곳은 용현동이다.
초등학교 시절 누가 나의 고향을 물으면 아버지 고향인  황해도 옹진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6,25 이후 옹진은 인천과 황해도 둘로 갈라졌다.
인천시 옹진군 영흥면 앞바다에 서니 아버지 고향 황해도 옹진이 생각이 났다.

나에게 고향은 어떤 곳일까?
아버지 태어나 자란 고향인가?  내가 태어나 자랐던 곳이 고향인가?
그 시간보다 몇 갑절을 더 길게 살아온 곳이 고향인가?
사실 많은 시간, 인천보다 더 보낸 곳이 서울이기에
서울이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빌딩 숲, 서울도 고향이 될 수 있느냐고???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되돌아가는 회귀를 생각한다.
연어에게는 험란한 물결을 거슬려서라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다.
연어들의 늙은 회귀처럼
아버지께서 돌아갈 고향을 늘 그리워하셨는데
나에게도 돌아갈 고향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은 
마당 한복판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자라고
앞에는 낙섬 너머 바다보이고
뒤에는 수봉산과  저 너머 월미도와 자유공원이 있던 곳...

여름이면 저수지로 몰려가서 같이 멱을 감던 친구들이 있고
겨울이면 논바닥에서 썰매를 지치던 친구들이 있는 곳
초등학교 시절 많은 친구들과 추억이 남아 있는 한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은 서울보다는
내 고향은 인천으로 간직하고 싶다  

 

 

오화중

 

 

 




제가 수차례의 종양제거 수술과 항암치료차 원자력병원의 신세를 지던 2005년부터퇴근길에 자의 병실에 둘러서 저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주던 화중이 입니다그러했던 그가 9수에 걸린듯 그의 나이 59에 암환자가 되었고 예전에 제가 그랬던것처럼 여러차례의 종양제거수술과 함께 항암치료중 입니다수술과 항암치료의 위험허고 고됨을 잘알고있는 저이기에 장애의 몸으로 투병을 하고있는 그가 안스럽기 그지없읍니다그러면서도 씩씩하게 투병을 하고있는 그가 무척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분당 서울대병원의 화중이와 가족들(2016.07.27)

사랑한다. 친구야
친구야 우리는 네가 있어 행복하다 떠올리기만 해도 다정한 내 친구 순수했던 어린 시절 어려웠던 날들을 함께해 왔기에큰 기쁨으로 함께할 수 있는 친구 너와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 우리는 행복하다.가장 최고의 사랑은 하나일 수밖에 없듯이가장 진한 우정 하나를 찾으라 한다면 찾지 않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친구 웃음과 쉴만한 공간과 푸근함을 나누어 주는 친구 네가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친구란 이름으로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그대가 있어서 오늘도 우리는 살 수 있단다.오늘이 즐거운 건 우정이라는 뜰에 친구라는 나무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고따가운 세상의 햇살을 막아주기 때문이야구름이 비를 약속하듯이 우리는 영원한 우정을 약속한다.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우정이기를 사랑한다.친구야. 너와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다.남은 날들을 너와 함께 하고 싶다
2009,12,31  오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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