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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족 이야기

피아노 연주곡 소녀의 기도와 인애누나

매루 2020. 2. 17. 18:14

 

 

 

 

 



   
1856년 폴란드의  테클라 바다르체프스카 바라노프스카(Tekla Bądarzewska-Baranowska)가  작곡
 1859년 '소녀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유명해졌다는 곡 입니다
 
 
제 개인적 으로는 저의 이종사촌 누님(1949년생 4살때 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치셨던 )께
종종 이곡의 피아노연주를 청하고 즐겨듣곤 하였읍니다
해마다 2월 중하순이 되면 초중고교 시절 봄방학의 추억들과 함께 떠오르는
그립고 그리운 피아노 연주곡 입니다 






  목사동생 부부의 아들인 알기가 미국 보스톤에서의 유학생활중 고국나들이를 왔읍니다
주일을 맞아(2018년 11월 25일) 여동생부부의 식구들이 목사동생의 교회에가서 주일예배를 드린후
목사동생 부부의 집에서 이모님과 인애누나(저희 형제들의 이종사촌)를 모시고 점심식사를 함께 하였읍니다







 

 

내생애 가장 행복했던 70여일

 

2017년 2월 6일 작성글

 

 

                         

 

 

 

 

 

믿거나 말거나

 

인천중학교(인중)에 합격은 가능 하지만 100% 합격보장은  할수없음.... 

초등학교 6학년 전과정동안 그야말로 스파르타식 수험준비를 마친 

저희 부모님과 저의 담임선생님께서 나누셨던 저의 중학교진학상담 결과 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저의 인중입학을 원하셨겠지만 담임선생님의 하향응시 권유를 받아들이시고는

상인천 중학교와 동인천중학교중에서 한학교를 선택을 하여야 했읍니다

저희 부모님 께서는 역사가 오래된 상인천 중학교(인천고등학교 자동진학)로의 진학을 바라셨읍니다

그러나 저는 교문 바로 옆에 이모님께서 살고 게시던 동인천중학교로의 진학을 고집 하였고 그 고집은 이루어졌읍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이었던 1966년 당시 인천은 경기도에 속해있던 하나의 시(市) 였지만

인천은 경기도의 정치,경제,문화,교육,금융의 중심지로서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경기도내의 각 국민학교에서 내노라하는 수재들은 인천에 있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응시를 하던 시절 이었읍니다

당시 인천에는 서울의 경기,경복등의 일류중학교에도 밀리지않는 전국적인 명문 중학교인 인중(인천 중학교)이 있었는데

경기도내 각초등학교에서 6년수석을 했던 학생 이더라도 인천중학교합격은 보장 보다는 낙방의 위험이 훨씬 클 정도로

 

당시 경기도내의 다른 학교학생들과 인천학생들의 학력 차이는 엄연한 현실 이었읍니다

(그해 치러진 입학시험에서 인중이나 인천여중에 실패한 학생들 중에는 후기(2차)학교에 응시를 하질않고

초등학교 6학년 전과정을 다시 다니는 특별한 재수를 한 학생들도 있었는데

저와 가까은 친구들중에도 그러한 친구들이 있어서

초등학교는 저와 동창 이지만 고등학교는 저의 1년후배가 되어있기도 합니다)

 

 

남학생들의 경우 인중에 응시를 하지못한 경기도내의 수재들은 상인천 중학교와 동인천 중학교로 하향조정 응시를 하였기에

동인천중고등학교 출신인 저에게는 강화,김포를 비롯한 경기도 출신들은 물론이고

인천에서 뱃길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서산,태안등 충청도 바닷가 초등학교출신 동창생들이 제법 많이 있읍니다

 

 

 

 

저는 인천중학교(인중) 입학을 바라셨던 제부모님들의 기대에 부응을 못해 드렸지만

그해 12월에 치러진 동인천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합격을 하고나서부터

중학교 입학식이 있었던 다음해 3월초까지 약 70여일동안은 

입시지옥에서 해방된 즐거움과 합격생 으로서의 여유로

지금까지의 제 인생중에서 손꼽을수 있는 즐겁고 행복하고 여유로운 시간들을 누릴수 있었읍니다

 

 

 

 

 

수험준비생(초등학교 6학년)시절의 추억들

 

- 과외공부 -

 

 

 

수험준비생(초등학교 6학년)시절의 추억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던 1961년에 제 어머니 께서는 선명회(지금의 월드비젼)관련 복지시설에 출근을 하시기 시작 하였읍니다

요즈음은 맞벌이부부의 시대 이지만 그당시에는 드문 경우 였읍니다

그때문에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부모님들께 공부에 대한 간섭은 받질 않았기에

학교에 갔다오면 시냇가나 물가에 가서 물고기와 잠자리잡기,연날리기와 썰매타기등  동네아이들과 놀이에 전념을 했고

교실부족으로 오전,오훗반으로 나누어 등교시간이 달랐던 시절 이기에

오전반은 어머니께서 챙겨 주시기에 정상적인 등교를 하였지만

오훗반 때에는 시냇가에서 놀다가 지각을 하거나 이따금 결석을 하기까지 했었고

그러다 보니 구구단을 외워야했던 초등학교 3학년때에는 반에서 가장 늦게 구구단을 뗀 학생들축에 끼일수 밖에 없었고

방과후에 남아서 교실청소를 마치고 담임선생님 앞에서 웅얼웅얼 구구단을 외워야 하기도 했읍니다

제기억에  5년동안 숙제를 해본적이 한번도 없고 그 벌로 방과후의 교실청소의 고정당번 이었읍니다

제가 6학년으로 진급을 하자마자  자체 학습능력을 치르고

그 결과는  학부모와의 중학진학상담에 참고자료가 되었는데

저의 꼴찌권 성적에 제아버지 께서는 웃음만 나오시던지 허탈한 표정만 짓고 게셨고

어머니 께서는 저의손을 잡으시고 가볍게 흐느끼셨읍니다

그날밤 잠자리에서 저는 제부모님께서 나누시던 대화를 잠자는척하며 숨죽여 들었읍니다

"한푼 이라도 더 벌어볼 욕심에 일후의 초등학교 5년동안 부모로서 공부에 신경을 못 써주었으니

저아이의 지금 성적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하지말고 1년동안 힘 닿는데까지 도와 줍시다"라는

제 부모님들의 결론에 저는 그결론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는 알바 없었고

5년동안 공부 안하고 꼴찌한것에 대하여 야단은 안 맞겠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뿐 이었읍니다

그후 저는 그해 12월초에 치러진 중학교 입학시험 몇일전날까지  학교수업을 마치고나면

 왕복 1시간반 거리에 있던 비밀과외장소에서 밤 11시까지 과외공부를 해야하는 고난의 행군을 해아했읍니다

그 고난의 행군은 주말이나 공휴일도 없었읍니다

 

 

- 달달 외우기 -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은  오로지 암기 였읍니다

그것도 달달 외우기 였는데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의 수도와 기후와 특산물을  모조리 외웠는데

지구의 지도(5대양 6대주)를  책을 안보고 직접 그릴수 있을 정도 였읍니다

음악책에 나오는 노래들은 작사작곡가의 이름, 몇분의 몇박자는 물론이고 음계를 모조리 외어야 했읍니다

심지어는 김대현, 모짜르뜨. 슈베르트, 베토벤, 브라암스등의 자장가들의 음계를 모두 외웠읍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다가온 11월이 되면 저희들의 사회,자연 교과서의 중요 단어들은

 모조리 검정 색연필로 지워야 했는데 처음에는 그책을 들고 읽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글의 제목만 이야기 해주면 책을 들지 않고서도 중요단어는 물론 서술어와 형용사까지  달달 외웠읍니다

그시절의 달달 외우기는 나이 60이 지난 지금도 TV의 각종 퀴즈프로에서 위력을 발휘하여 상식퀴즈 프로는  물론이고

도전골든벨 같은 경우 역사와 지리 부문에서 제아내나 딸들이 저의 실력(실은 외우기)에  많이 놀라곤 합니다

 

 

 

- 수많은 시험과  공포의 쪽지시험  -

 

 중학교 입학시험부터 대학입학시험까지 때까지 입학시험이란 입학시험은 모조리 치른 불행한 세대에 속했던 불행...

 그중에서도 초등학교 6학년시절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치르던 쪽지시험이 있었읍니다

담임선생님 께서는 전날 배웠던 것들을 중에서 10문제를 저희들에게 질문을 하시면

저희들은 손바닥 크기의 쪽지에 10문제의 답을 적어야 했고

이 쪽지시험이 끝나고나면 옆자리의 친구와 쪽지를 바꾸어 채점을 했고

칠판 앞으로 나가서 틀린 갯수대로  종아리나 손바닥 또는 발바닥에 매를 맞아야 했읍니다

 

 

 

 

 

 

사진 오른쪽 위에 자유극장의 포스터가 보입니다

 

 

90년대의 자유극장 모습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을 한 저는 그해 12월 부터 2월 하순까지 동인천 중학교 교문옆에 있었던

이모님댁에서 아주 편하고 즐거운 나날들을 보냈읍니다

당시 월미도의 미군부대에 근무 하셨던 이모님 께서는 구경도 못해 보았던 미제초콜릿,과자,사탕등을 떨어지지않게 가져다 주셨고

무엇 보다 힘든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해방감은 자유로 보장되어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읍니다

이모님댁에는 저와 6살 차이인 인애누나(이종사촌누나)가 게셨는데

얼굴도 예쁘고 친절했던 인애누나는 당시 박문여고 졸업반 학생 이었읍니다

제가 이모님댁에 머물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인애누나는 이화여대에 합격을 하는 당시로서는 초대형사고를 저지르게 됩니다

한국전쟁의 전쟁미망인으로 홀로 키우신 딸을 이화여대에 입학을 시킨 이모님 께서는

누나에게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해주셨기에

저는 원님 덕분에 나발을 분다는 속담처럼 인애누나 덕분에 갖은 호사를 누리는 횡재를 하게 됩니다

날마다 저의 주머니에는 용돈이 두둑 하였고 용돈을 어디에 쓰던지 간섭을 해주시는 부모님도 옆에 안게셨기에

동인천 중학교 교문옆에 있었던 분식집에 가서 남비 짜장면도 사먹고

하루종일 군것질을 하면서 인천시내구경을 다니기도 했읍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는 이모님이 가져다 주신 지금의 ABC초콜릿과 똑같은 방울초콜릿 한봉지를 들고

자유극장에 가서 팔도강산 영화를 보고 왔읍니다 

영화구경을 마치고 이모님댁에 돌아오자 인애누나가 저를 맞이하며 제게 묻습니다

"일후야 피아노옆에 있던 초콜릿 어디있는지 모르냐"라고요

"그거 오늘 내가 다 먹었다"라는 저의 대답에 인애누나는 눈이 휘둥그레 지시며

"얘 너 그많은걸 다먹고도 속이 아무렇지도 않니?"라시며 걱정을 하셨읍니다

지금도 초콜릿의 값은 그다지 싼편이 아닌데 그때 제가 해치운 커다란 봉지의 그시절 미제초콜릿 가격은 무척 셌겠지요

그다음날 인애누나는 이모님께 퇴근을 하실때에 초콜릿을 사다 달라는 요구를 하시고

"초콜릿이 무척 많았는데 그걸 벌써 다먹었냐?>는 이모님의 추궁(?)에

"학교 친구들이 놀러와서 나누어먹었다"며 저의 이야기를 감추어 주셨읍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쁜건 무조건 용서가 되는 모양인지

그날 이모님 께서는 들기 힘들 정도의 초콜릿,과자와 사탕은 물론 따끈따끈한 군밤을 잔뜩 들고 오셨읍니다

 

지금도 어쩌다 최희준씨의 팔도강산 이라는 노래가 들리면

지금까지의 저의 생애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1966~1967년 사이의 약 70여일이 떠오릅니다

 

 

 

 1967년 2월 9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32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음악과 함께 각지의 명승과 산업현장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박정희정권의 경제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정부 산하기관인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되었다.

선거를 앞두고 전국 무료 순회상영을 하여 박정희정권의 선거운동용 영화로 선거법 위반이라는 야당의 비난과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자유극장이 당시에 개봉상영관 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위의 설명(선거운동용 영화)처럼 개봉상영을 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개인적 으로는 저의 이종사촌 누님(1949년생 4살때 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치셨던 )께

종종 이곡의 피아노연주를 청하고 즐겨듣곤 하였읍니다

해마다 2월 중하순이 되면 초중고교 시절 봄방학의 추억들과 함께 떠오르는

그립고 그리운 피아노 연주곡 입니다

 

 

 

목사동생 부부의 아들인 알기가 미국 보스톤에서의 유학생활중 고국나들이를 왔읍니다

주일을 맞아(2018년 11월 25일) 여동생부부의 식구들이 목사동생의 교회에가서 주일예배를 드린후

목사동생 부부의 집에서 이모님과 인애누나(저희 형제들의 이종사촌)를 모시고 점심식사를 함께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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