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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室에서1515

명절 가족모임과 어머니의 고향 본문

나, 가족 이야기

명절 가족모임과 어머니의 고향

매루 2020. 1. 1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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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도 황주(아버지)와 장연(어머니)이 고향이신 저희 부모님들 께서는

국전쟁이 끝난후였던 1954년도에  피난지인 인천에서 결혼을  하셨읍니다 

  생활이 안정되어가고 맏이인 제가 중학교 입학이 확정된 1967년의 설명절때부터

아버지 께서는 북의 부모님들을 위한 차례를 지내기 시작을 하셨고

 

지금처럼 물과 조리 가열이 편리하고 충분한 실내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게 아니고

부엌의 연탄아궁이와 마당에 마련한 임시화덕(드럼통 보다 작은 철제 깡통에 나무를 태우는)에

  차롓상에 올릴 각종 음식을 만드시던 어머니의 수고를 저는 또렷이 기억을 합니다

낮에는 선명회(지금의 월드비죤)에서 근무를 하시고

가족들 모두 곤히 잠에든 밤늦은 시간에 만두를 빚으며 꾸벅뚜벅 조시던 모습도 그중 한모습이며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저는 빨리 장가를 가서 제아내에게 어머니를 돕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읍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설과 한가위 명절이 되면 제아내와 제수씨들이

제 어린시절의 어머니처럼 수고들이 많은것을 보게 되었고

그러한 제수씨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저는 제 아버님께 위험(?)이 따르는 부탁을 드리게 됩니다

설과 한가위때 기족들의 모임을 당일을 피하여 갖자는 이야기 였지요

예상대로 아버지 께서는 (자고로 조상을 무시하는 놈 치고 잘되는 놈 없는 법이다)라시며 노 하셨읍니다

그로부터 3년후 우여곡절끝에 아버지 께서는 저의 청에 응해 주셨고

제아내와 제수씨들은 설과 한가위 명절 전날에 친정에 갈수 있었고

그녀들 어린시절의 명절때 처럼 친정부모님과 함께 명절을 보낼수 있었읍니다

 

어제(2020년 1월18일 토요일) 설명절을 앞두고 영흥섬 저희집에 가족들이 모였읍니다

동생 부부들은 올해에도 설연휴에 나름대로 계획과 일정들이 있어서 미리 모인것 입니다

이자리에서 저는 저의 이모님께(올해 95세)  저의 어머니의 사진 몇장을 보여드렸읍니다

 

 

 

 

 

 

 

 

 

 

 

 

 

 

 

 

 

 

 

 

 

 

 

 

 

 

사진속 오른쪽의 3분은 교복(해주 행정고녀)차림이고 왼쪽 저희 어머님만 사복차림 이신걸로 보아

휴일이나 방학때 어머니의 학우들께서 황해도 장연의 저희 어머니댁에 놀러 오셨던걸로 추정을 해오던 사진 입니다

어머니의 고향 주소(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죽계리)에 죽계리(竹溪里)라는 지명이 있기에

사진속에 대나무들이 보이는걸로 보아 이곳이 어머니의 고향마을 일거라는 저의 추측 이었읍니다

 

 

어머니 께서는 고향인 장연에서 그리 멀지않은 해주의 행정고녀를 거쳐

서울의 중앙대학교에 진학을 하셨고

인천의 친정언니(사진속 이모님,만석동의 이천전기 간부사택에 거주)집에 거주 하시며

서울로 통학을 하시다가 한국전쟁을 맞게 됩니다

 

 

 

제가 이모님께 이사진의 장소를 여쭈어 보았더니

이모님 께서는 이 장소가 어디인지 당시의 기억 속에서 정확히 끄집어내지 못하셨지만

저의 추측처럼 사진속의 대나무들 이야기를 하시며

고향 어귀인것 같다며 눈시울을 적시십니다

 

 

 

 

황해도 장연에는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33년 장연읍의 독지가들이 뜻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고 향토와 황해도 내의 농업 발전에 기여하고자 설립한 장연공립농업학교가 있다.

한편, 이 군은 황해도의 서단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상 몽금포·비석포(碑石浦)·구미포·아랑포 등 배가 닿을 수 있는 포구가 많아

향리에서 초등 교육과정을 마치고는 해상 교통을 이용하여 진남포·평양·인천·서울 등지로,

육로로는 해주·개성 등지로 유학하는 진취적 기상이 일찍부터 조성되었다.

이와 같이 대부분 외지로 유학하는 이유는 군내에 걸출한 대부호가 없었다는 점도 복합적 요인의 하나였지만

전반적인 군세(郡勢)에 비하여 장연농업학교를 제외하고는 중등 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육세(敎育勢)가 저조한 반면, 문화면에서는 중국과 인접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불교 및 기독교의 선착지가 되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군민의 의식 개혁이 다른 지역보다 앞서갔다.

무엇보다도 문향(文鄕)으로서의 전통과 긍지를 지니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우리 나라 현대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양주동(梁柱東)·강경애(姜敬愛)·노천명(盧天命) 등의 문인이 배출되었다.

 

 

 

 

 

 

 

   

 

 
 
 
 
우리 이모님
 
 
 

목사동생, 제수씨, 여동생, 이모님, 제부(김흥진 장로)

2018년 9월 15일 검단 마전감리교회 주최 검단사랑 바자회장 에서

 

윗사진과 아래 노란 글상자의 글 내용은 목사동생이 이모님의 소식을 교회 소식지에 올렸던 글 입니다

 
 
 


< 현충의 달 6월입니다. 우리 교회 어느 권사님의 편지글을 읽으면서 우리 민족의 뼈아픈 현대사를 잠시 생각해봅니다. >

MBC 문화방송 ‘이제는 만나야 한다’에서 수고하시는 여러분께 드립니다.

먼저 이산가족들의 숙원인 북의 가족 찾기를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1998년 이산가족 생사확인을 신청한바 있는 고향이 황해도 장연인 1925년생인 박연화 할머니입니다.
문화방송 사장님으로이 두 차례 격려서신을 보내주신데 대하여 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MBC 문화방송 여러분들이 애쓰시어 1500명의 가족이 거처 및 생사가 확인되어 올가을부터 재회할 수 있다는 방송을  접하고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그런데 내 가족은 아직 생사를 모르고 있어 너무나 답답합니다. 남한에는 내 여동생과 6촌동생만이 살다가 두 동생 모두 세상 떠나고 나 홀로 살고 있으며 저 역시 병노하여 여기저기 다니지 못해 수소문할 수도 없고 제 3 국에 연고도 없고 나의 힘으로는 알길이 없으니 오직 MBC 여러분들만 믿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만남의 그날까지 애써 주시기 바라며 건강하시고 계획한바 일이 다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고향 장연(황해도) 낙도면에는 친인척이 많이 살고 있었고 나의 부친 박치남(朴致楠)씨는 장연군 죽계리에서 사과밭과 전답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생활했으며 1951년 1.4후퇴시 여식을 남하시키고 조카를 설득시켜 남하하시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숙청되어 돌아가셨다는 말을 유격대원들로부터 들은바 있는데 돌아가신 날을 알고싶고 나의 시가인 장연군 선정리에다 시부모 시누이들과 내 아들(당시 6세)을 놓고 왔는데 시부모 돌아가신 날과 내 아들 생존을 알고자 합니다.

친정 아버지 박치남(朴致楠) 어머니 朴五仁
시아버지 윤성대
아들 윤용남(55세)

친정 : 황해도 장연군 죽계리 낙산농장(세칭 엄소뿌리)
시가 : 황해도 장연군 선정리 (세칭 장방꼴)

1999년 6월 22일 신청인 : 박연화



 

 

 

 

 

 
 
어머니의고향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죽계리
(현 황해남도 장연군 청계리)
 
장연팔경(長淵八景 장연군이 자랑하는 8군데의 자연경관) 
 

두견의 봄 경치 감상(杜鵑賞春),

마암에서 나그네를 보냄(馬巖送客),

무산의 비가 갠 하늘의 밝은 달(茂山霽月),

죽강의 이슬비(竹江細雨),

불타에 돌아가는 구름(佛陀歸雲),

금사에 지는 해(金沙落照),

아랑에 돌아가는 돛단배(阿郎歸帆),

화굴에서 들리는 거문고 소리(花窟聽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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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고향  황해도 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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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 장연군 청계리

 

1952년 북한의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장연군 장연면의 곡암리와 계리를 병합하여황해도 장연군에 신설한 리로

맑은물이 흐르는 시내를 끼고있는 마을이라하여 청계리라 하였다

1954년에 황해도가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분리 되면서 황해남도 장연군 청걔리로 되었다

이지역은 남부에 불타산(609m)이 솟아있어 다른 지역보디 높을뿐  대부분 장연벌에 위치해 있다

하천은 리 북부로 장연 남대천이,중심으로 그 지류인 청계천이 흐르고있다

산림은 리 전체면적의 약 30%를 차지하며

농경지에서 논이18% 밭43% 과수밭34% 뽕밭 3%를 차지한다

과수업이 특히 발달하여 사과 배 복숭아 감 등이 많이 산출된다

교통은 장연 청걔간 3급노로가 통과하고 북쪽으로 3km 지점레 군 소재지인 장연읍이 위치해 있다

 

2003년 현재 행정구역은 1읍(장연읍) 1구(낙연 노동자구) 19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청계리는 19개 리 중에 하나

 

 

일제 강점기 황해도 장연읍의 13개  리(里)

읍후(邑后)·읍내(邑內)·읍남(邑南)·읍동(邑東)·읍서(邑西)·읍전(邑前), 里

읍외(邑外)·길촌(吉村)·칠북(漆北)·칠남(漆南)·죽계(竹溪)·곡암(谷巖)·선정(仙亭)

 

 

 

 

 

미국민요 (Carry me back to old Virginny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는 

1954년에 결혼식을 치른후 가족들과 가진 피로연 자리에서

저희 어머니께서 부르셨다는 노래 입니다

 

- 저의 고종사촌형님(당시 11세)의 회고담 중에서 -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미국 민요-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떠 지저귀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내 성전 위하여 땀 흘려가며
그 누른 곡식을 거둬들였네
내 어릴때 놀던 내 고향보다
더 정다운 곳 세상에 없도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이 몸이 다 늙어 떠나기까지
그 호수가에서 놀게하여주
거기서 내몸을 마치리로다
미사와 마사는 어디로 갔나
찬란한 동산에 먼저 가셨나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곳에
나 어서가서 쉬 만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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