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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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족 이야기

1ㅡ21과 이모님

매루 2020. 1. 21. 10:59























불행(不幸)은  우리말 사전에  행복하지 못하다, 또는 상황 좋지 않음이라고 풀이 되어 있읍니다 



1968년 오늘은 이땅에 정말로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었읍니다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일명 김신조사건)이 그것 입니다


일명 김신조사건이 일어났던 1968년 그날 저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중 이어서 

부평의 이모님댁에서 지내고 있었읍니다

다음날(22일)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이모님께서는 저를 데리고  급히 저희집으로 오셨고

당신의 동생인 저희 어머니께 "빨리 서울에 올라가보자"라며 채근(採根)을 하셨읍니다


1944년도에 저희 이모님(1926년생) 께서는 인천 만석동에 있었던 이천전기 회사에 근무하고 계시던

동향(황해도 장연)출신의 남성과 결혼을 하신후

만석동의 이천전기 간부사택에서 생활을 하시면서 슬하에 남매를 낳고 키우셨읍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전에는  38선이 있었어도 서로 왕래가 가능했었기에

어느해 봄에 이모님 께서는 남매와 함께 친정(황해도 장연)나들이를 가셨고

인천으로 돌아 오실때 외할머니와 헤어지기를 싫어하는 아들을 친정에 두고 인천으로 돌아 오셨는데

얼마 안있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모자(이모님과 용남이 형님)는 생이별을 하게 된것 입니바

1,21 사태가 일어난 1968년은 이모님께서 북에 두고온 아들인 용남이형님의 나이가 23살 이었기에

남에 내려온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 중에 용남이형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셨겠지요


지난 주말에 95세의 고령이 되신 이모님 께서 저희집엘 오셨었고

1,21 을 맞이하여 이모님과 가족들 이야기를 떠 올려 봅니다


   




우리 이모님


목사동생, 제수씨, 여동생, 이모님, 제부(김흥진 장로)

2018년 9월 15일 검단 마전감리교회 주최 검단사랑 바자회장 에서


윗사진과 아래 노란 글상자의 글 내용은 목사동생이 이모님의 소식을 교회 소식지에 올렸던 글 입니다






< 현충의 달 6월입니다. 우리 교회 어느 권사님의 편지글을 읽으면서

우리 민족의 뼈아픈 현대사를 잠시 생각해봅니다. >

MBC 문화방송 ‘이제는 만나야 한다’에서 수고하시는 여러분께 드립니다.

먼저 이산가족들의 숙원인 북의 가족 찾기를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1998년 이산가족 생사확인을 신청한바 있는 고향이 황해도 장연인 1925년생인 박연화 할머니입니다.
문화방송 사장님으로이 두 차례 격려서신을 보내주신데 대하여 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MBC 문화방송 여러분들이 애쓰시어 1500명의 가족이 거처 및 생사가 확인되어

올가을부터 재회할 수 있다는 방송을  접하고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그런데 내 가족은 아직 생사를 모르고 있어 너무나 답답합니다.

남한에는 내 여동생과 6촌동생만이 살다가 두 동생 모두 세상 떠나고 나 홀로 살고 있으며

 저 역시 병노하여 여기저기 다니지 못해 수소문할 수도 없고

제 3 국에 연고도 없고 나의 힘으로는 알길이 없으니

오직 MBC 여러분들만 믿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만남의 그날까지 애써 주시기 바라며 건강하시고 계획한바 일이 다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고향 장연(황해도) 낙도면에는 친인척이 많이 살고 있었고

나의 부친 박치남(朴致楠)씨는 장연군 죽계리에서 사과밭과 전답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생활했으며

1951년 1.4후퇴시 여식을 남하시키고 조카를 설득시켜 남하하시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숙청되어 돌아가셨다는 말을 유격대원들로부터 들은바 있는데

돌아가신 날을 알고싶고 나의 시가인 장연군 선정리에다 시부모 시누이들과

 내 아들(당시 6세)을 놓고 왔는데 시부모 돌아가신 날과 내 아들 생존을 알고자 합니다.

친정 아버지 박치남(朴致楠) 어머니 朴五仁
시아버지 윤성대
아들 윤용남(55세)

친정 : 황해도 장연군 죽계리 낙산농장(세칭 엄소뿌리)
시가 : 황해도 장연군 선정리 (세칭 장방꼴)

1999년 6월 22일 신청인 : 박연화








38 선








 

  





19681 21사태 (김신조 사건)


1967년 4월에 북한의 민족보위성은  정찰국 산하에 유격전 특수부대인 124군부대를 만드는데

이 부대는 각 부대의 정예요원 2400명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8개 기지에 300명씩 분산되어 고강도 특수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1968년 1월 16일 황해도를 출발한 124군부대원 31명은 다음날 오후 11시에 고랑포 일대로 침투한후

18일 자정무렵에  미군 2사단이 철책선을 담당하던 서부전선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루를 보내고

19일 밤 8 30분경 경기도 고양군 법원읍 삼봉산에 도착을 하였고

이곳에서 나무를 하던 우씨 3형제와 마주칩니다

이들은 생포한 우씨 3형제를 풀어준후(풀려난 우씨 3형제는 곧바로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를 함)

8시간만(시간당 10km의 속도의 구보)에 북한산 비봉에 다다릅니다

당시 한국군 유격대의 산악지대 이동속도가 시간당 4km라고 하니 가히 초인적인 능력 입니다


"우씨형제들을 풀어준 지점에서 서울 진관외동의 진관사까지 산악코스로 행군하면

해병대도 족히 이틀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진관사를 거쳐 북한산 비봉의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해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기겁했지요.

중무장하고 야간 산악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 건

제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ㅡ 당시 국방부장관 이었던 김성은의 회고 ㅡ

 20일에 앵무봉을 통과한 이들은 비봉,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내려와

21일 밤 10시 청와대를 불과 500m를 남겨둔 지점인 세검정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서

처음으로 검문을 받게 되고  전투가 벌어집니다


  

 


 22일 새벽에  인왕산 기슭에서 김신조가 생포 됩니다.






1968. 1. 22, 오후 7시부터 30분간 육군방첩부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김신조

TV가 귀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당시 저희집에는 TV이 있었고

저는 TV로 중계된 이날의 기자회견 모습과 내용이 지금도 눈과 마음에 생생 합니다

김신조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남파 임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내래 청와대 까부수고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라고 대답을하여

온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넣습니다





사살된  무장공비의 시신들을 확인하기위해 끌려나온 김신조


경기도 일대에 걸친 대대적인 수색작전 끝에 당국은 남파된 유격대원 총 31명중 

 28명 사망(김춘식은 치안국에서 자폭), 1명 생포, 2명 월북(추정)했다고 발표 하면서

우리 측은 군 장병 25명과 민간인 7(심지어 신고를 받은 경찰의 늑장 출동 때문에 사망한 민간인도 있었다!)

 총 32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발표를 하면서

군 병력 1 9,213명이 동원된 작전은 종료가 됩니다



이 사건후 태극연습(1969년 을지연습으로 개칭)을 그 해 처음 실시하였고

대한민국에는 주민등록번호 제도와  향토 예비군제도가 시행이 되고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 됩니다

대학생들은 물론 청소년인 남녀고교생들에게까지 교련 이라는 군사교육을 받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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