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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족 이야기

어머니가 뵙고픈 한가위 명절

매루 2019. 9. 13. 22:08








설날이나,한가위 연휴때  저희가족들의 한가하고 여유있는  성묘분위기,,,,,,,,,


맏아들 이었던 제가 어렸을적(1960년대 중후반)에 설이나 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차례음식을 만드시느라 밤잠을 못주무시던 어머니를 도우면서

훗날 제가 가장이 되면 제 아내는 설이나 한가위 명절을 친정에서 보내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읍니다 

훗날 제가 결혼을 하고나서  아버지를 설득하고 허락을 받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제 아내와 제수씨들은 설이나 한가위 명절 전날에

 친정집에서 친정식구들과 함께 잠을 잤고 명절을 친정에서 보낼수 있었읍니다


2019년의 한가위 전날인 어제 저희가족들은 검단에 있는 어머니 산소를 찾은 자리에서

저희가족들의 지나온  명절때의 이야기들을 나누었읍니다

이제는 그녀들의 시부모셨던 저희 부모님들도 안계시고

그녀들의 친정 분위기도 옛날과 많이 달라졌기에

언론이나 방송에서  설이나 한가위 명절때에 제사나 가족모임 문제로

가족들간에 갈등을 빚는다는 이야기를 보고 들을때마다

내심 시아주버니인 제게 고마워 한다는 눈치들 입니다



己所不欲勿施於人 이라는 말이 있지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뜻 이지요

해마다 한가위나 설명절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웃음이 떠나지않는 저희가족들을 보면서

어렸을적 차례음식을 만드시면서 꾸벅꾸벅 조시던 어머니의 안쓰런 모습이 떠오릅니다










  낙섬위에 떠오르던 한가위 보름달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1965년) 저희 아버지 께서는 다니시던 직장(락익동 흥한방적 주식회사)을 그만 두시고

인천 용현동의 낙섬(라디오 교통방송을 듣다보면 들을수있는 낙섬사거리)  이라는 곳에 있었던

부랑아 보호시설의 관리인(요즈음의 행정실장)으로 부임을 하시게 됩니다 

6,25 전쟁통에 부모와 헤어져 거리를 배회하던 부랑아들의 수용시설이 있었던 낙섬....

저와 저희 가족들은 아버지를 따라서 그곳에 마련되어있는 관사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저와 부랑아 보호시설의 어린이들은 자연스럽게 놀이친구가 되었었읍니다

이글은 작년 한가위 즈음에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 총동문 카페에 올렸던 글 입니다

 

 

 

1967년 가을날 낙섬에서

흰점퍼 차림의 안경을 쓰고 게신분이 저희 아버지(당시 낙섬 부랑아시설 책임자)

검은양복차림의 고선생님 께서는 재미있는 진행으로 어릴적 우리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켜주셨읍니다 

사진속 코스모스 뒤로 부랑아 숙소의 지붕이 보입니다

 

 

 

비에 젖은채로 지나가버린 여름이 있었대나 어쨌다나 하며 계절은 시치미를 떼고 맑고 화창한 하늘과 볕을,

그리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기운이 우리네 몸과 마음을 달래주려는듯 정겹습니다

제가 대부분의 낮시간을 보내고있는 이곳 영흥도의 바닷가에도 가을색이 완연하여

구름한점없는 새파란 하늘색에 비치는 선명한 코스모스 꽃색깔들이 아름답습니다

여름내내 비가 내리는 짖궂었던 날씨임에도 피서철 이랍시고 적지않은 인파들이 휩쓸고 지나간 바닷가에는

갈매기들과 파도가 백사장 위에서 어울려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한적 해서인지 웬지 쓸쓸해 보이는군요

이제 몇일후면 우리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 입니다

가을만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때문에, 광 에서 인심이 난다고 했듯이 서로간에 오가는 정들이 후하고 정겨웠기에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 처럼 예로부터 이 시기를 中秋佳節(중추가절)이라 칭송을 하며 즐겼읍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한가위의에 대한 어릴적 추억들이 무척 많이 떠오릅니다 

우선 먹을것이 많아서 좋았읍니다

그때문에 한가위가 지나고 몇일동안 학교에서의 휴식시간에는  

한가위 과식의 후유증 때문에 화장실마다의 급한 노크소리는 따발총 소리처럼 요란 했었지요

명절 이라고 어머니께서 설빔 이라며 새옷을 사 주시기도 했는데

성장이 빠른 시기였던지라 어머니께서는 키보다 터무니없이 큰옷을 입게 하셔서 불만스럽기도 했었고요

소풍때에도 그러했지만 한가위가 다가오면 여학생들은 교실마루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한가위때 입을 새옷 이야기들을 하곤 했었던것 같은데

제 기억이 정확 한지는 모르겟지만 제 옆분단이 여학생끼리 앉아있던 분단 이었기 때문에 틀리진 않을겁니다

반면에 남학생들에게 한가위때 최고의 놀이는 폭음탄을 비롯한 단연 화약놀이 였읍니다

심지에 불을 붙인후 3~4초후에 굉장한 폭음을 내는 폭음탄을 터뜨리며 또래여학생들 이나 아녀자들과  

죄없는 동네 강아지들을 놀래키며 괴롭혔였는데

폭음탄과는 다른 지금의 미사일처럼 불을 뿜으며 허공을 가르는 로켓폭음탄 놀이도 무척 신기하고 재미 있었읍니다

그런데 폭음탄 종류는 가격이 비싸서 거의 일회용으로 그쳤었지만 딱총 이라는 화약총는

종이에 딱지처럼 붙여놓은 화약이 다 떨어질때까지 가지고 놀수 있어서 한가위가 한참 지나서 까지도

동네 이곳저곳에서는 심심챦게 딱총의 화약 터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읍니다

제가살던 낙섬의 고아원(부랑아 보호시설이 정확한 명칭)에는 한가위가 닥아오면

사회의 여러군데에서 옷가지 라던가 밀가루 따위의  선물이 들어오곤 했는데

저나 부랑아들이 가장 반기던것은 뭐니뭐니해도 먹는것들 이었읍니다

인원수가 많다 보니까 사탕이나 과자는 고작 한두개 밖에 차례가 돌아오질 않았었고

쌀겨가 담긴 나무상자에 담긴 사과는 아직 제철이 아니어서 시었지만 새콤달콤한 맛 때문에

쌀겨가 피부에 닿아 가렵고 깔깔한 불편함을 무시하고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사과상자속에 손과 팔을 넣어 뒤적거리도 했읍니다

한가위 전날 밤이면 고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앉아서 송편을 빚었읍니다

일년내내 쌀한톨 섞이지 않은 보리밥만 먹던 그들은 쌀가루의 흰빛이 마냥 좋았었는지

송편을 빚기위해 뭉쳐놓은 쌀반죽을 한주먹씩 슬그머니 주머니나 허리춤에 감추어 가지고 나와서는 

비밀리에 보관해놓았다가 몰래 불에 구어먹곤 했었는데

저는 이사실을 저희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에게 한번도 고자질을 하지 않았었읍니다

저도 공범 이었으니까요

송편을 빚을때 송편속이 세가지가 있었는데 첫번째가 낙섬에서  직접 농사지어 생산한 콩 이고

두번째가 밤 인지 고구마 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고

세번째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꿀이섞인 고소한 참깨 였읍니다

송편을 만들어 찌고나면 송편속의 내용물이 검은색을 어슴프레 비추는 콩은 골라낼수 있엇지만

참깨와 고구마인지 밤은 도저히 송편의 겉 만으로는 식별을 할수 없어서 찍기를 해야 하는데

귀하고 값이 비쌌던 참깨속 이었던지라 수량이 많질 않았기에 꽝 치기가 일쑤 였읍니다

그다음해 한가위때 송편을 빚을때 저는 제가 빚는 송편중에 참깨를 넣은 송편에 표시를 하여 두었읍니다 

송편의 한쪽 귀를 살짝 떼어 버렸던 것 이지요

한가윗날 함께 모여 송편을 먹을때 참깨가 들어있는 송편을 잘 골라내는 저를

 다른 아이들이 무척 신기해하고 부러워 했었고

저희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셨던 고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너희들도 일후처럼 하나님께 열심히 가도하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저렇게 복을 주시는거야"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선생님 께서는 저의 얕은꾀를 알고 게셨겠지요

그리고 한가윗날 밤 저와 저의 가족이 살았던 관사의 앞뜰에 있던 침상에 앉으면

지금은 제2경인고속도로에 허리가 잘리었지만  옛동양화학옆 문학산기슭에 떠오르는 둥근 보름달을 볼수 있었읍니다

앞뜰 화단에 피어있던 과꽃에 비추던 맑은 달빛의 인자함을 저는 지금도 잊질 못하며

침상위에 앉으셔서 보름달을 바라보시는 제어머니의 볼에 흐르던 눈물방울에 반사되던 달빛 또한

지금도 또렷이 기억 합니다

 막내딸로 전쟁통에 헤어져 생사조차 모르는 그리운 부모형제들과 어릴적 걱정근심없이 띄어놀던

당신고향(황해도 장연)의 들녘과 뒷동산 그리고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흘리시던 눈물 이었겠지요

해마다 한가위, 설 그리고 집안의 큰 행사가 있을때 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시댁식구들과 손님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명절 중후군)들이 많지요

 그러한  희생들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번영을 이룩케한 밑받침 이라는것을 

대한민국 남자들은 잘알고있고 항상 고마워 합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는만큼 우리 딸들이나 며느리들은 

우리세대의 여성들 보다는 좀더  남녀평등에 가까운 분위기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명절을 보냈으면 하는 바램과 아울러 

명절중후군 이라는 덩어리를  낙섬에 떠오르던 한가위 보름달속에 있는  토끼들의 절구에 던져넣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환갑전후의 초로의 모습으로 변해있을 낙섬  부랑아시설의 친구들의 모습을

낙섬위로 떠오를 한가위 보름달속에서 찾아 보렵니다

 


2011년 한가위 둥근달을 바라보며,,,,,



 



동요 따오기는 생전의 저희 어머니께서 좋아 하시던 노래 입니다



 

 


< 따오기 / 선명회 합창 >

 

 

< 따오기 / 어린이 이중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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