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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의 추억

뚜아에 무아 그리운 사람끼리

매루 2019. 7. 19. 12:27

 

 

                                

 

 

 

뚜아에무아(1970)

 

 

 

 

 

 

 

 

 

박인희

한국의 통기타음악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세시봉'에서 탄생한 트윈폴리오라는 노래 잘하고 잘생긴 남성듀엣 덕분이었다.
 트윈폴리오가 1969년 말 해체해 버린 후 그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건
 남녀 혼성듀엣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통기타 음악인이었다.
1970년 3월 '뚜아에무아'라는 세련된 불어 팀 명으로 출발한 이 그룹은
놀랍게도 자신들이 작사·작곡한 '약속'이라는 신곡을 갖고 있었다.
1970년 5월 발매한 뚜아에무아의 첫 음반은 한국 통기타음악에서 창작곡이 수록된 최초의 음반이다.
남녀혼성듀엣이 각광 받게 된 것은 당시의 남녀 간의 연애가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할 수야 있었지만 공공장소에서 연인 간에 손도 잡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멋진 선남선녀가 공개적으로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듯한 노래를 부르고 연인처럼 보이는 것은
더욱 자유로운 연애를 원했던 당시 젊은이들이 가진 로망의 대리만족이었다.
사실 남녀 혼성듀엣은 뚜아에무아가 처음은 아니었다.
1969년 초 컨트리음악을 하던 서수남과 현혜정이 '서수남 현혜정'이라는 팀 명으로 출발한 것이 최초이다.
그 이후 뚜아에무아를 거쳐 블루진, 바블껌, 원프러스원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통기타음악의 발전은 남성듀엣을 넘어서 남녀 혼성듀엣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가속되기 시작했다.

뚜아에무아의 남성 멤버 이필원은 고1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68년 귀국해 미키스, 타이거스, 미도파스라는 록밴드를 결성해서 활동했다.
 이필원은 타이거스 활동 시절 우연히 미도파살롱에서 박인희를 만나
같이 'Let It Be'를 부른 것이 인연이 되어 팀을 결성했다.

 

 

 

     
   
풍문여고에 다녔던 박인희는 원래 연극배우가 꿈이었다.
대학 4학년 때 실험극장의 주연배우 모집에 수석 합격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
 1970년 뚜아에무아를 결성할 당시 박인희는 대학을 졸업한 23세였고, 이필원은 24세였다.
게다가 이필원은 1964년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다.
이필원은 데뷔 당시 기혼자임을 밝혔고 박인희와는 먼 친척 사이라고 연막을 쳤지만,
이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누가 봐도 연인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부르는 노래마다 연인 간의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였으니 팬들의 로망에 불을 지필만 했다.

'뚜아에무아'란 팀명은 불어로 '너와 나'라는 뜻이다.
일본에는 한국의 뚜아에무아보다 먼저 결성된 같은 이름의 남녀혼성듀엣이 있었다.
이필원이 한국에서 결성한 록밴드 타이거스라는 팀 명도 일본의 유명 록밴드를 본떠 지은 것처럼,
뚜아에무아도 일본에서 생활했던 그가 일본의 뚜아에무아를 보고 작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한국 매체에서는 생소한 불어 팀 명을 또아에모아, 뜨와에므와, 똬에뫄, 톼에뫄 등으로 각각 불렀다).

뚜아에무아의 음악은 팀 명만큼이나 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차분하고 서늘한 우수가 담긴 그들의 목소리는 대학생다운 지적인 풍모가 가득했다.
그들의 화음은 트윈폴리오만큼이나 환상적이어서
느끼한 기성세대의 음악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대학생 문화를 동경했던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이 수준 높은 음악으로 선호했다.

하지만 뚜아에무아는 활동에 소극적이었다.
1970년 하반기부터 MBC-TV의 '스카이쇼'와 TBC-TV의 '쇼쇼쇼'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지만 업소 출연은 전혀 하지 않았다.
기혼자와 처녀가 연인사이로 비치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기에 활동을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그럴수록 서울 시내 음반상에 뚜아에무아의 2집을 찾으러 오는 팬들은 늘어만갔다

1970년 뚜와에무아 1집. 화교가수 곡충주와 함께 낸 스플릿 음반.

 


박인희는 숙명여대 불문과를 다닐 당시 방송반에서 부장을 역임했던 터라 DJ라는 직업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이에 1971년 1월부터 CBS 라디오에서 청소년을 위해 신설했던 팝송프로 '세븐틴'의 DJ로 일하게 되었다.
5월부터는 DBS의 '3시의 다이얼'까지 맡게 되면서 박인희는 가수보다 전문 DJ로 활동영역을 굳혀갔다.

박인희가 방송에 몰두하며 활동에 소극적이 되자 이필원도 생계유지를 위해 시내에 '약속'이라는 다방을 차렸다.
두 사람 모두 같은 팀이면서도 각자 따로 음악이 아닌 직업으로 생계활동을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서도 두 번째와 세 번째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지만 급기야는 1971년 11월에 뚜아에무아는 해체하고 말았다.

     
 
이필원은 팀을 해체한 이후 1972년 4월 음반을 발매하고 솔로로 활동하다가
 1973년 10월 한인경을 맞아 2기 뚜아에무아로 새롭게 출발했다.
하지만 이필원도 1974년 4월부터 MBC 라디오의 '6시의 희망곡'의 DJ를 맡게 되었고
 7월부터는 '별이 빛나는 밤에'까지 하게 되면서 가수와 방송활동이 주객 전도되고 말았다.
급기야 1974년 8월 2기 뚜아에무아도 해체되고 말았다.

대중음악저술가    
출처 :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6> 속삭이는 밀어, 뚜아에무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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