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남원 금지와 김주열 본문
1980년대 초중반에 저는 전라남도 곡성 이라는곳의 섬진강변(압록 유원지 군처)에서 3년여 생활을 했었읍니다
승용차가 없는 제가 인천에서 그곳을 가려면 호남선열차로 광주에 가서 그곳에서 구례행 버스를 탄후 곡성에서 내리거나
지인들의 승용차를 타고 갈때에는 호남고속도로 전주에서 임실~오수~남원을 지나 곡성에 다다르곤 했었지요
승용차를 타고갈때마다 제가 꼭 둘르던곳이 남원의 금지라는곳 이었읍니다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원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원을 가로지르는 요천(蓼川)의 벚꽃 십리길
전라북도 장수의 장안산에서 발원한 요천(蓼川)은 남원의 광한루원을 지나면서부터
전라남도 곡성에 이를때까지 드넓은 남원 세전들을 적시며 흐르다가 남원시 남서부의 금지면에서 섬진강에 합류를 합니다
남원 대강
진안에서 발원을 한 섬진강은 임실~순창~남원~곡성~구례~하동~광양을 지나 남해에 이르는 우리나라 5대강중의 하나 인데
섬진강이 남원의 금지를 흐를때에 만큼은 대강 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제가 곡성생활을 할적에 섬진강으로 은어낚시를 하러오는 일본인들을 안내를 하곤 했는데
금지의 대강은 경치도 좋고 상류에 속해 은어의 씨알도 비교적 굵은곳 이어서 자주 왔었읍니다
남원의 금지에서 대강에 접근을 하려면 김주열 열사의 산소를 지나야 했읍니다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생. 남원 금지중학(金池中學)을 졸업하고, 1960년 마산상고(馬山商高)에 입학을 한 김주열은
그해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실종이 됩니다,
한 달 후인 4월 10일 최루탄(催淚彈)이 눈에 박힌채 유기되었던 그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고
당시 그의 눈에서 추출된 최루탄은 직경 5㎝, 길이 20㎝에 탄피가 알루미늄으로 된 미제 고성능 최루탄으로,
꼬리 부분에 프로펠러가 달려 있었으며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대무장폭도용 최루탄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또다시 폭발하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읍니다.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매년 3월 15일과 4월 19일이 되면 김주열 열사의 이름이 기념행사장에서나마 거론되지만
정작 열사의 죽음을 혁명의 상징으로 승화시킨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이름은 듣기 힘들다.
권 여사는 열사가 실종된 뒤 마산 시내를 떠돌며 아들을 찾아 헤맸다.
이를 통해 '김주열'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마산시민들은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이 떠오르자
권 여사가 애타게 찾던 그 '아들'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는 곧 4·19혁명의 시작이었다.
"
나는 시체를 못 받겠으니 부정선거로 당선된 이기붕한테 갖다 주시오!"
1960년 4월 11일 오전 10시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3월 15일 시위 때 실종됐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올랐다.
경찰은 3일 뒤 시신을 빼돌린 뒤 전라북도 남원 고향집에 있는 어머니 권찬주 여사에게 시신 인수증을 내밀자
여사는 단호하게 이를 거절했다. 이는 당시 자유당의 서슬에 눌려 험악하던 세상 분위기 속에서 아무나 할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은 김주열 열사가 제 2차 마산의거를 일으키고 이것이 4·19혁명으로 연결된 것은 모두 권 여사 때문이라고 말한다.
1960년 3월 15일 당일 실종된 사람은 모두 5명. 이 중 4명은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단 한명 김주열 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권 여사는 그길로 마산으로 향했다. 당시 마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 거리였다.
권 여사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기 까지 아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며 온 마산을 들쑤셔 놓았다.
특히 시청 앞 연못의 물을 다 퍼낸 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진흙 속을 손으로 휘젓고 다닌 것은 마산 시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은 이 때문에 당시 마산에서 '김주열'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 바다에서 떠올랐을 때
특히 시신을 경찰이 바다에 유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마산이 분노로 발칵 뒤집어 진 것이다.
결국 2차 마산의거와 이후의 4·19혁명의 근간을 권찬주 여사가 온 마산을 헤매며 닦아 놓은 것이다.
열사의 시신이 떠오른 4월 11일은 권 여사가 아들 찾기를 포기하고 그 남원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이후 권 여사는 두 번이나 마산시민 앞으로 편지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열사가 죽은 그해 5월 8일 권 여사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자식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남은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중략)
마산시민 여러분의 그 거룩한 뜻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 자식은 신선이 되어 올라갔을 겁니다.
마산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경남도민일보 이균석 기자/ 노컷뉴스 제휴사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이낙연 국무총리가 4.19혁명 58주년인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아
김주열 열사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2018.4.19/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