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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무악재 서울여상

매루 2018. 4. 9. 10:39

 

 

 

 1973년도의 어제(4월 9일)는 유고의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 여자부 단체전에서 우리나라가 우승을 한날 이었읍니다

당시 우리나라 선수단 우승의 주역은 정현숙과 이에리사 선수 였읍니다

이에리사가 졸업한 서울여상과 그녀와 서울여상 동창이자 저와 초등학교 동창사이인 문경희가 생각이 났읍니다

 

제가 대학입시생 이었던 1970년대 초반에는 초급대학교들이 있었는데

전문학교처럼 2년제 였지만 예비고사에 합격을 해야만 응시할수 있었읍니다

제가 재수,삼수를 하며 도전을 했던 농협초급대학(지금의 농협대학교)이 있는 고양시 덕양구의 삼송동은  서삼릉의 입구에 세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서  삼송리(三松里)라고 불리웠던 서울의 끝

, 구파발 넘어 고양군의 첫 동네 였읍니다

저는 그학교에 시험을 보거나 합격자발표를 보기 위하여

서울 정동에 있었던 문화방송(지금의 MBC)앞에서 삼송리행 버스를 타면 독립문도 지나고 무악재를 넘고

 당시 서울의 끄트머리였던 불광동을 지나 고양군의 구파발(지금의 은평구 진관동)을 지나

그 버스의 종점인 고양군 삼송리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던 학교에까지 가곤 했었읍니다 

 

그때에 무악재를 넘다보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나 있을법한 기와지붕의 전통호텔같은 건물이 눈에 띄었는데

그곳은 저와 동갑내기인 탁구선수 이에리사와 저와 초등학교 동창인 여성운동가  문경희를 배출한 서울여상 이었읍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慕華館)의 영은문(迎恩門)이 있던 자리에  

청일전쟁 이후 1897년에 독립협회의 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세운 독립문

 1979년 금화터널 공사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7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읍니다

1973년 당시의 무악재

 

 

 

 

 

 

 

무악재(홍제동)시절의 서울여상

서울여상은 1991년에 지금의 교사(봉천동)로 이사를 합니다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는 '전국의 곳간 열쇠를 다 쥐고 있는 학교'로 불릴 정도로 한국 금융회사와 기업 재무팀에 폭넓게 포진해 있다.

 1926년 최초의 여성경제교육기관으로 문을 연 서울여상은 금융권에서 폭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고교 중 하나다.

 서울 무악재에 있던 서울여상은 1991년 관악구 서울대 근처 관악로로 이전했다.

국민 · 신한 · 우리 · 하나 · 기업 · 외환은행 등 국내 6개 시중은행을 비롯해

증권사 보험사 등에 현직으로 근무하는 서울여상 출신은 1000명에 달한다.

시중은행 전체 여성지점장(200여명)의 약 40%인 80여명이 서울여상 출신이다.

 '여성금융사관학교'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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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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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상의 인재 배출은 1960~1970년대 사회적 배경과 맞물려 있다.

당시 남존여비 사상과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대학에 가지 못한 여성 수재들이 금융권 취업이 보장되는 이 학교에 많이 들어갔다. 

시대적으론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과 맞물려 은행들이 급팽창했고 상고 출신 인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문명순 이사는 "당시 가난했지만 공부에 뜻이 있었던 전국의 여학생들 가운데 전교 1~2등을 해야 합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성에 대한 결혼퇴직각서제가 1976년 폐지되고 여성 행원이 은행의 '책임자고시'에 응시할 수 있게 된 것도

 서울여상 출신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당시 은행 지점마다 서울여상 동문이 3~4명씩 근무해 '지점 동문회'를 열 정도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위기를 맞기도 했다.

대학 정원이 크게 늘어 상고 진학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그러나 시중은행 등 금융권이 금융특성화학교로 지정된 서울여상에 눈을 돌리며 각종 협약을 맺고 인재들을 채용하면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

 2011-06-12

 

 

 

 

 

 

탁구선수 이에리사 

 

 

 

서울여상 재학 중 대한민국 체육상을  수상한 이에리사

 

 

대한민국의 스포츠 약사에서 구기종목에서 처음으로 세계대회의 우승을 했던 종목은

1973년에 유고의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여지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했던 여지탁구 입니다 

이대회에서 대한민국 여자탁구팀은 1973년 세계탁구선수권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의 쾌거를 이루며  영광의 코르비용컵을 안았읍니다

 

45년전 오늘(4월 9일)이 바로 그날 이었으며

한국선수단의 주전 이었던 1954년생 이에리사선수는  낙섬일사회의 문경희 동문과 서울여상 동창사이 이기도 합니다 

 

 

 

 

1973년 유고의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 여자부 단체전에서의 이에리사(당시 19세)

 한국선수단의 팀내 막내 였읍니다

 

 

정현숙과 짝을 이룬 복식경기

 

 

 

시상대 맨윗자리의 한국 선수단

당시에는 중공(중국 공산당)이라 불리우던 중국이 2위였고 일본이 3위를 차지 하였읍니다

 

 

 

선수단이 공항(당시 김포공항)을 통하야 개선을 하자 30만 환영인파의 환호속에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읍니다

 

 

최미나(축구선수 허정무씨의 부인)와 명콤비를 이루어  개그나 방송진행(사회)에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임성훈씨의 모습도 보입니다

 

 

 

 

 

 

 

한국전쟁후 피난민(주로 황해도 출신)들이 모여 살았던 인천 끄트머리 바닷가 가난한 동네의 학생들이 다녔던 용현초등학교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 되었고

14회 여자동문들 중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당시로서는 대형사고(?)를 친 학생들이 있었읍니다

당시 졸업후 취업이 보장되던 상업학교는 당시 성적 우수생들 가운데 경제사정이 어려운 집안의 자녀들이 진학을 했던 학교여서

그학교에  입학자체로 가문과 출신학교의 명예를  드높였고  영광 이었는데

남인천여중에 수석입학을 했던 영희와 서울여상에 진학을 했던 경희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 이었읍니다

 

 

 

용현초등학교 14회 졸업생들의 5학년시절 가을 소풍(1965년 수원 용주사)사진들 중에서

고인이 되신 임후규 은사님의 모습이 보이고

뒷줄 가운데 손으로 얼글을 가리고있는 여학생이 그해 겨울에 치러진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남인천여중(인천여상 동교)에 수석입학을 한 영희 입니다

 

 

 

영흥섬 하수오농장의 낙섬친구들 (2013년 6월 28일)

 

 

무슨말이든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나를 위로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상당히 조심스럽고 어렵네.
즐거움 뒤에 이런 아픈 속내가 있었다니,일을 진행시킨 친구들의 애절한 마음씀이 안타깝게 고맙구.
시련을 회피하지않고 직면하면서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일후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밖에는 긴 가뭄끝에 단비가 내리고 있단다.
분명 일후도 열망하는 친구들 마음에도 단비는 내릴꺼야.
모두들 힘내고.
[2006-10-22] [문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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