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서 전국 최대 민속 오일장으로 현존하고있는 ‘성남 모란장’이
28년 만에 새 장터로 이전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내고장 인천의 수인시장을 생각해 봅니다
위 두사진의 장소는 수인곡믈 시장 입니다
윗사진의 촬영년도는 2010년도으로 되어있고 아랫사진의 촬영년도는 정확치 않습니다
저희들 어렸을적에는 사람들도 많고 굉장히 활기롭던 시장 이었는데
두사진 모두 시장 이라고 이야기 하기엔 무척 한산 합니다
촬영시기가 1960년대로 추정된다고 설명되어있는 수인역(남인천역)사진 입니다
임금님께 진상을 하는 여주,이천의 질좋은 쌀은 일제 강점기때 철로 수려선(수원~여주 1931년 개통)에 실려 수원까지 온후
경부선~부산항~일본으로 수탈이 되었었읍니다
일제는 경기지역에서 쌀뿐만이 아니라 소래(蘇來)·남동(南洞)·군자(君子) 등의 염전지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수탈하기 위하여
철로 수인선(수원~인천)을 1937년에 개통을 하는데
1960년대 수인역 앞 곡물시장의 1960년대 사진 입니다
해방과 한국전쟁 후에 경기도 내륙의 질좋은 쌀을 비롯하여 곡물들과 참기름,들기름,면실유,마른고추등의 농산품들이
수원, 고색, 오목, 어천, 야목, 빈정, 일리, 성두, 원곡, 신길, 군자, 소래, 논현, 남동, 송도를 거쳐
수인선의 인천쪽 종착역인 남인천역(수인역)에 모여지기 시작을 하면서
수인역 주변에는 무척 활기찬 장이 형성이 됩니다
저의 모친 께서도 생전에 수인시장을 많이 이용을 하셨는데
쌀과 잡곡 그리고 면실유등의 식용유와 마른고추(태양초)는 반드시 수인시장에서 구입을 하셨읍니다
그때 어머서께서 상인들과 흥정을 하실때
지금처럼 kg이 아닌 관, 근, 대두 또는 소두 한말과 한되등의 계량단위들이 생각이 납니다
수인선(안산역 ~송도역 구간) 답사 영상 (1991년)
1986년 12월 12일에 방영된 대한뉴스 제1623호 영상
수인선 철도 외에 갯벌, 군자염전, 소래포구의 옛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읍니다.
남인천역 광장에 ‘반짝시장’이 열렸다
수인선 협궤 철로의 총연장은 52킬로미터였다.
협궤열차의 역들을 수원을 기점으로 짚어보면
‘수원-고색-어천-야목-사리-일리-고잔-원곡-군자-달월-소래-남동-송도-용현-남인천’ 등으로 이어진다.
기차역마다 승객들이 가지고 타는 물품들이 달랐다.
야목역은 조그만 간이역이었으나 농산물을 팔러 인천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몰려서 이용객이 가장 많았다.
보릿자루나 콩자루 등을 가지고 타는 경우 화물운임을 따로 내야 했다.
“곡식 자루를 갖고 타면 당연히 화물표를 따로 끊어야 되거든,그런데 그거 몇 푼 안 내겠다고 보따리를 치마 속에 숨기는 아주머니들이 있어요.
차장이 그걸 모르나?
다 알지. 그렇다고 여자의 치마폭을 들출 수는 없어서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고…허허, 참, 볼만 했어요.”
왕년의 협궤열차 기관사 박수광씨가 들려준 얘기다.
하지만 협궤열차를 이용하여 보따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열차 승무원들과 너나들이로 지낼 만큼 친근했기 때문에,
작은 곡식자루 한둘의 운임은 눈감아주기도 했다.
기차가 소래역에 닿으면 풍경이 달라진다.
새우나 조개나 꽃게 따위의 해산물을 양푼에 담아 머리에 인 아낙들이 줄줄이 올라타고,
객실은 순식간에 비릿한 갯내음으로 채워진다.
군자역의 화물은 단연 소금이었다.
일제 통감부에서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1925년 군자 지역에 575정보(570.3㏊)의 염전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올라있다.
이후에는 소래에도 염전이 개발되었다.
그래서 협궤열차를 ‘꼬마열차’라 부르는 한편으로 ‘소금열차’라 칭하기도 했다.
일제가 수인선 협궤철로를 건설한 목적이 거기 있다.
일찍이 인천의 주안에 대규모 염전이 조성돼 있었음을 감안하면 일제는 협궤철로를 개설하여 ‘군자-소래-인천’으로 이어지는,
소금 수탈을 위한 벨트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이와는 별도로 만들어진 수여선(수원-여주 간)협궤열차의 경우 여주, 이천 지역의 쌀을 수탈해가기 위해서 깔았던 철로이고.
기차가 남인천역에 도착하면 장사꾼들의 움직임은 두 편으로 갈린다.협궤열차의 화물칸에 쌀을 몇 가마씩 운반해온 쌀장수들은 제법 규모가 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화물칸에서 내려진 쌀가마는 손수레꾼에 의해서 역사 바깥으로 운반되고, 거기서 다시 용달차에 옮겨 싣는다.
쌀장수 아낙네들도 자신들의 쌀가마니와 함께 용달차에 올라탄다.
이 쌀장수들은 인천의 주택가를 여기저기 돌면서 쌀을 몇 되 씩, 혹은 몇 말 씩 나눠 팔고 돌아온다.
그렇다면 야채 몇 단이나 콩 몇 됫박, 또는 생선이나 조개 따위를 이고 진 소규모 보따리 장사꾼들은
그런 물건들을 어디에다 처분했을까?
평시엔 텅 비어있던 남인천역 광장은 수원 발 협궤열차가 도착하자마자 북적거리는 시장판으로 변한다.
남인천역 인근의 주민들이나 식당주인들도 때를 맞춰서 광장으로 몰려든다.
“싱싱한 배추가 왔어요. 풋고추 사세요! 시금치도 있어요!”
“이거 봐, 펄펄 살아 있지? 싱싱한 소래 꽃게 사요! 새우도 있고 조개도 있어요!
“마늘쫑 이거 얼마 안 되니까 다 들여가지 그래!”
“아주머니, 내가 단골인데 꽃게를 딴 사람한테 팔면 안 되지!”불과 30여분, 길면 한 시간 동안 섰던 이 장을 ‘반짝시장’이라고도 했고 ‘깡시장’이라고도 했다.
한 시간 쯤이 지나면 역전광장은 거짓말같이 텅 비어버리고, 물건을 판 시골 사람들은 인근 식당에서 국밥이나 국수로 요기를 한다.
물론 남정네들은 막걸리 한 잔씩을 곁들이고.
수원행 꼬마열차가 다시 기적을 울리고 출발한다.
돌아가는 협궤열차의 승객들 손에는 떠날 때와는 사뭇 다른 물건들이 들려 있다.
“뭘 그렇게 많이 샀어?”
“빨래비누가 떨어져서 몇 개 샀고, 주전자하고 세숫대야는 큰집에서 부탁한 것이고, 냄비는 이웃집 할머니네 거야.용남이 엄니 보따리엔 뭐가 들었는데?”
“애기들 양말 몇 켤레하고, 큰 맘 먹고 시엄니 겨울 쉐타 한 벌 샀구먼.”
“효부 났네. 아이고, 내 정신! 순임이 엄니가 베개 호청 사오랬는데 깜박 했네, 쯧쯧쯧.”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국 최대 민속 오일장 ‘성남 모란장’ 28년 만에 새 장터로
전국 최대의 민속 오일장인 경기도 성남시 모란장 전경.현재 복개천(사진 오른쪽) 장터에서 여수공공주택지 안 공영주차장(사진 왼쪽 건물 앞)으로 옮겨 24일 첫 장이 열릴 예정이다.전국 최대 규모의 민속 오일장인 경기도 성남시 모란장이 28년 만에 새 장터로 옮겨 문을 연다.
성남시는 현 모란장터 바로 옆 중원구 성남동 4929번지 일대 여수 공공주택지구 내 주차장 부지로의 모란장 이전작업이 마무리돼오는 24일 개장한다고 연다고 22일 밝혔다.모란오일장은 날짜의 끝자리가 4일과 9일이 되는 날 열리며 새 장터에서는 상인 680여 명이 영업하게 된다.
새 장터는 현재보다 1만375㎡가 더 넓은 2만2천575㎡ 규모다.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다목적지원센터, 화장실, 공연장, 휴게 공간, 야간 조명탑,장날 상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수도·전기 시설 등을 갖췄다.
시는 이전할 장터가 현 장터보다 성남대로로부터 70∼100m 더 먼 곳에 있어주변 노점상들에게 고객을 빼앗기면 매출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장터 상인들의 우려에 따라새 장터로 이전하면 노점 단속을 강화할 방침이다.
앞서 시는 판매대 위치 선정을 둘러싼 상인회와의 갈등, 새 장터로 활용할 주차장의 시설 하자 등으로장터 이전 일정을 지난해 10월 말부터 두 차례 연기하고, 상인들과 협의를 해왔다.
시는 2016년 9월 한국토지주택공사와 ‘모란 민속 오일장 겸 공영주차장 조성사업’ 협약을 맺고 모란장 이전사업을 본격화했다.장터 이전과 공영주차장 조성을 위해 토지보상비 536억원을 포함해 모두 63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했다.모란장이 이전하면 현 장터는 용도가 주차장에서 도로로 전환돼 성남 하이테크밸리와 탄천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망 기능을 하게 된다.
모란시장은 1964년 경기도 광주군 대원천변(현 성남대로 주변)에 난전이 모여들면서 형성됐다.초기 이주자 김창숙씨가 주민의 생필품 조달과 소득 증대를 위해 1964년 시장을 열면서그의 고향인 평양 모란봉 이름을 따서 모란(牡丹)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현 장터는 1990년 9월부터 대원천 하류 복개지를 정비해 쓰고 있으며 장날이면 10만명까지 몰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