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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다

한홍구 교수가 말하는 '한국의 보수, 내일은 있는가'

매루 2017. 12. 25. 11:04







제18대 대통령선거를 3일 앞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 앞에서

시민사회단체 국민연대 주최로 열린 '미치도록 투표하고 싶은 유권자들의 스케치북 띠잇기'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투표참여 캠페인을 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영화배우 김여진씨,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장, 진중권 동양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2012.12.16






[한홍구 교수가 말하는 '한국의 보수, 내일은 있는가']

"역사 책임 지는 진정한 보수 되살려야"
2017년 12월 20일 00:05 수요일



▲ '한국의 보수, 내일은 있는가' 강연회 참석자들의 한홍구 교수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1855~1910)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주를 마시고 자결했다.

그는 "나라가 망할 때 죽는 사람이 없으니 원통한 일 아닌가"라는 유서를 남겼다.

황현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씨를 말려야 한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지독한 보수주의자였지만 그만큼의 책임질 줄 아는 '진정한 보수주의'의 길을 걸었다.

백범 김구가 보수주의자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백범의 비서였던 장준하도 한 때 친미·반공주의자로 이름을 떨친 극단적 보수주의자였다.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독립운동과 남북통일에 앞장섰고, 독재정부에 저항했다.
죽음이 예고되어 있었지만 보수주의자로서의 역사적 책임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빈자리는 친일과 친미, 독재정권 부역자들의 몫으로 넘어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30분 동안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세월호 선장은 아이들을 내버려둔 채 배에서 탈출했다.

한국전쟁 전쟁 발발 3일 만에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달아난 이승만과 너무도 닮은꼴이다.

한국현대사 이야기의 저자 한홍구 교수는 "지금의 보수로는 희망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우리 앞에서 보수를 외치는 자들은 자신의 영달을 좇는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고 일침한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역사에 책임을 지는 진정한 보수를 되살릴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역설했다. 

인천행동하는양심은 지난 14일 오후 부평아트센터에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초청 강연회를 개최했다.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매진해 온 한 교수는 '한국의 보수, 내일은 있는가'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한 교수는 먼저 한일강제병합 시기에 보여준 정통 보수주의자들의 행적부터 짚어 나갔다. 



● 구한말 정통 보수주의자의 결기 

황현의 친구 이건창(1852 ~ 1898)은 동학군에 대해 "짐승을 사냥하듯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한 보수주의자였다.

하지만 동학군들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하고, 학정을 저지른 양반 관료들을 더욱 매섭게 질타했다.  
이건창과 황현은 나라가 망하자 음독자살을 선택하거나 울화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의 동생과 그 동지들은 가산을 정리해 가족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동상과 굶주림으로 산송장이 되어 현지에 도착했고, 죽은 뒤에는 관조차 살 돈이 없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 등 많은 지식인들도 만주 땅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백범 김구, 장준하 등 민족주의 인사들은 중국에서 조국광복운동에 혼신을 다했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이완용과 같은 친일파들이 남아 온갖 지위와 부를 누렸다.

정통 보수주의자들이 사라진 빈틈을 기회주의자들이 차지한 것이다.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한 채 일본천황에게 충성맹세를 했다.

김창룡, 노덕술과 같은 친일경찰들은 독립군을 색출해 처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 미 군정기의 친일파 부활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을 대신해 점령군 행세를 했던 미군은 친일파를 다시 등용하기 시작했다.
한번 권력에 고개를 숙인 자들은 또 다른 권력에도 쉽사리 빌붙는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국내로 돌아온 독립투사들은 자신을 체포하고 고문했던 일제 경찰들의 손에 또다시 붙잡혀갔다.
백범은 친일경찰 출신 김창룡의 부하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
의열단을 만들어 일제에 저항했던 김원봉은 일제의 앞잡이 노덕술에게 모진 수모를 겪었다.



● 보수가 만든 제헌헌법의 진보성 

해방정국에서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남·북한은 제각각 헌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한에서 만든 제헌 헌법은 보수주의자들 손에 작성됐다. 
진보 지식인 대부분이 북한으로 넘어간 탓이다. 
제헌 헌법의 기초를 놓은 유진오는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될 만큼 널리 알려진 친일인사였다.
제헌 헌법은 종북으로 몰려 해산당한 통합진보당의 강령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제18조는 노동자가 기업의 이익을 나눠가질 수 있는 '이익의 균점권'을 보장하고 있다.
제85조는 '주요산업을 국유화한다'는 사회주의식 경제정책을 규정했다.

당시 소련이나 중국 이외에는 어느 나라도 채택하지 않은 조항이었다.

학교에서 제헌 헌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정부 수립 이후 독립운동가의 수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은 친일파를 앞세워 독립운동가 출신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했다.
백범 암살에 이어 친일파 처단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를 해체시켰다.

이 때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위원들의 암살을 모의한 인물이 노덕술이다. 

이승만은 6·25 전쟁이 터지자 3일 만인 6월 28일 한강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한다.

그날 한강다리 위에 있던 애꿎은 피난민 5백여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승만은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방송을 되풀이했다. 그 순간 그는 대전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 있었다.



● 자유주의자들의 저항 

이후 어린 학생들의 희생 속에 4·19 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권력은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쓰며 충성을 서약한 일본 육사 출신 박정희가 차지했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철권을 휘두르며 자유주의자를 짓밟았다.

박정희의 독재 권력에 저항한 인사 대부분은 자유를 부르짖던 보수주의자였다.
의문의 죽임을 당한 장준하 선생은 극단적인 친미·반공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백범의 비서였던 그는 백범이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김일성과 대화에 나서자 결별을 선언했다.
반공활동을 함께하던 이범석 장군이 좌익 활동가를 감싸 안자 그와도 손을 끊고 말았다.
하지만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 유신에 반대하던 그는 죽음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박정희의 철권통치는 역설적이게도 양심적 보수주의자들을 진보 진영의 대부자리로 올려놓았다.
신의주 반공의거의 배후였던 함석헌과 우익반탁진영의 행동대장이던 계훈제가 대표적이다.

문익환은 미군통역장교, 백낙청은 미국유학파, 김수영은 북한 의용군을 탈출한 반공포로였다.
이들은 박정희의 반민주적이고 폭압적인 유신 정권을 용납하지 않았다.
한때 반공, 친미에 몸담았던 보수주의 지도자들이 진보진영의 지도자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 건국절과 국정교과서 논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은 주한미국대사 앞에서 "내 동생은 뼈 속까지 친미"라고 자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 첫해 2008년 광복절 행사에서 "1948년을 건국 원년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같은 해 제정된 제헌헌법 전문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립됐다"고 적고 있다.
현행 헌법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 교수는 "친일의 뿌리를 가진 기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죄과를 덮으려는 술책"이라고 비판한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전의 역사를 부정해, 일제 강점기의 친일역사를 지우려 한다는 설명이다.
박근혜 정부는 아예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해 친일·독재의 역사를 미화하려 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친일에 이어 친미주의자로 변신했고, 이후 독재정권에 부역한 기회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준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이, 대통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배의 선장은 도망을 쳤다"고 일갈했다. 
마지막까지 배를 지킨 것은 매점에서 일하던 20대 비정규직 여성과 교사들이었다.
한 교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이영희 교수의 저서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진정한 보수가 재건돼야, 건강하고 균형잡힌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사진 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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