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인천여상 본문
저희들이 중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던 60년대 중후반에 인천은 경기도에 속한 시 였읍니다
당시 인천은 경기도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교육의 중심지였읍니다
특히 교육분야 에서는 인천과 인천이 속한 경기도내의 다른학교들과 학력수준의 차이가 있어서
인천이 아닌 도내의 다른 초등학교에서 6년 수석을 했다는 학생들 조차도
인천에 있는 중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이 보장이 안되었었읍니다
그렇게 학습능력이 뛰어난 인천의 초등학교 6학년생들 중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여학생들은
졸업후 취업이 보장되는 인천여상과 동교인 남인천여중에 응시를 하였었읍니다
제 개인적 으로는 저의 용현초등학교 여자동창생이 그해 치러진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남인천여중에 수석입학을 한 자랑도 있으며
노래 <이사 가던날>, <밤비야>, <마지막 남은것>등을 불렀던 여성듀엣 <산이슬>도 인천여상 이 배출한
자랑스런 인천출신 가수들 입니다
어제(12월 12일) 저는 고교시절에 활동을 했던 물망초클럽의
4기회원(저는 2기출신임)들의 송년모임자리에 참석을 했었읍니다
물망초 4기회원들의 구성중 여학생들은 대부분 인천여상 학생들 이었읍니다
사진 왼쪽에 남학생들 사이에 앉아있는 영진씨는 인천여상 졸업후 (주)대우에 입사를 했읍니다
영진씨는 빼어난 미모와 성실함으로 어느해 치러진 미쓰 대우 선발대회에서 1등을 먹었었읍니다
사진 오른쪽의 제옆에 앉아있는 충순씨는 계양구의 새천년장례식장 주인마님 입니다
신사神社 터에 세운 배움터
졸업 앨범에는 학교만 있지 않다. 인천도 있다.
졸업 기념 촬영 때 학교 주변 동네의 풍광이 종종 카메라에 잡혔다.
교외(校外)에서의 포즈나 행사를 담은 사진은 더없이 귀한 인천의 과거다.
지역 내 고교 앨범에서 수집한 사진을 통해 인천의 6, 70년대를 반추해 본다.
그 첫 번째로 인천여상의 앨범을 들춰 보았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재촬영 홍승훈 자유사진가
인천시 중구 신생동 24(인중로 146). 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이 땅은 곡절이 참 많았던 곳이다.
이 땅은 품고 있었던 ‘과거’를 말끔히 씻어내기 위해 광복이 되자 동네 이름을 ‘신생동(新生洞)’으로 바꿨다.
일본 신사에서 피란민촌, 그리고 미군 고사포 부대까지, 다시 태어나야 할 만큼 절박했던 이름이다.
인천이 개항하기 이전 신생동은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船倉里)의 일부지역이었다.
개항장 주변 지역이라 본래 아무 시설도 없던 빈 땅이었다. 이곳으로 산사람보다 ‘망자’들이 먼저 들어왔다.
1887년부터 일본인 공동묘지로 사용되다가 191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일본인촌이 되었다.
현재의 인천여상 자리에는 인천신사(仁川神社)가 있었다.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1천600여 명의 일본인들은 기부금을 모아 신사 건립에 나섰다.
그들이 명당을 찾고 찾은 끝에 낙점한 곳이 바로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다.
학교 남쪽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낭떠러지로, 바다가 훤히 보여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그곳에 1890년 6월 신사를 건립했다.
대신궁 건축공사가 낙성되면서 면모를 갖춘 인천신사는 이후 지속적인 증축 공사를 하며 규모를 넓혔다.
일본인 신궁(神宮)이 들어서면서 동네 이름이 궁정(宮町)이 되었다. 그곳에 일본인 전용 공원인 동공원도 조성됐다.
광복이 되자 신사는 조선인들 분노의 첫 타깃이 되었다. 방화와 파괴가 잇따르며 시설 대부분이 사라졌다.
신궁 등 건축물은 모두 파괴되었지만 아직도 학교 안에는 신사의 잔재가 남아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석축과 석조 난간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교정 곳곳에서 당시의 석주, 석탑도 만날 수 있다.
1945년 4월 12일 개교한 인천여상은 여러 번 이삿짐을 싸야 했다.
먼저 인천공립상업학교(율목동 옛 인천고) 일부 교사를 빌려 개교한 후 광복 후 송림초교 교사에서 잠시 셋방살이를 했고
46년부터 3년간 만석동 풍국제분공장에서 공부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공장 안에 합판으로 칸막이를 쳐서 교실을 만들었다.
공장 바로 옆에는 미군 흑인 병사들의 막사가 있어 학생과 교사들은 항상 긴장감에 싸여 있었다.
49년 인천신사 터로 이전함으로써 신생동과 처음 인연을 맺는다.
6.25 전쟁 때 뿔뿔이 흩어졌다가 신사 터로 다시 돌아왔으나 피란민들이 움집을 짓고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언덕 정상에는 미군 고사포 부대 막사가 자리 잡았고 학교 옆에는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이 진을 쳤다.
56년 고사포 부대가 이동함으로써 비로소 학교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팔판루와 신사 종무소(1959년도 앨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인천신사 안에는 수명루와 명월루라는 고급 요정이 있었다.
특히 수명루는 ‘제일루’라 불릴 정도로 인천 최고의 요정이었다. 맛있는 술과 음식, 아름다운 여자들,
그리고 청아한 정자와 눈부신 전망을 자랑했다.
수명루는 청일전쟁이 끝난 후 팔판루(八阪樓)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흔히 ‘팔팔로’라고 불렀다.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도 인천에 올 때마다 즐겨 찾았다고 한다.
후에 요정은 모두 폐쇄되었고 팔판루 일부는 신사 종무소로 사용되었다.
광복 후 적산이 된 종무소는 한동안 미군 방첩대가 들어섰고 49년 5월 임시 교사(校舍)로 사용했다.
6.25 전쟁 후에는 72가구 300여 명의 피란민들이 무단 입주했다. 피난민들은 53년 10월에 학교에 자리를 내주었다.
인천여상은 이곳을 교장실, 사무실, 숙직실로 사용했다.
66년 신사 종무소를 헐어냄으로써 인천 신사 관련 건물은 모두 사라졌다.
시보 사이렌 망루와 홍예문 철책(1959)
시계가 거의 없던 시절, 대포가 시간을 알렸다.
우리나라에서 시간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대포를 쏜 ‘오포(午砲)’는 인천에서 시작했다.
1906년 2월 9일부터 인천관측소 아래 응봉산 중턱에 대포를 설치해 매일 정오(正午)에 맞춰 오포를 발사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산을 오포산(午砲山)이라고 불렀다.
1925년 오포제는 폐지되었고 대신 1931년부터 홍예문 위에 세워진 소방대 망루에서 시보(時報) 사이렌이 울렸다.
이 사이렌은 1960년 대 초까지 운영했다.
높이 13m의 홍예문은 한때 인천의 자살 터였다.
7,80년대까지만 해도 시내에서 이만한 높이의 개방된 건축물이 별로 없었다.
이게 문제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
사고가 이어지자 이후 높다란 철책이 둘러쳐졌다.
도화동 국군묘지(1962)
인천 도화동에는 국군묘지가 있었다.
1968년까지 세화초교 운동장과 옛 선인체육관 부지 아래 6.25 전쟁 때 전사한 국군 379위(혹은 358위)가 안장되었다.
매년 6월 6일이면 이곳에서 정부 차원의 현충일 추념행사를 거행했다.
사진은 현충일을 맞아 학생들이 도화동 국군묘지를 찾은 모습이다.
도화동 국군묘지는 1968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하면서 폐쇄했다.
소방소 망루(1961)
학생들이 포즈를 취한 뒤편으로 삐죽 솟은 시설이 자주 눈에 띈다. 높다란 소방소 망루이다.
이 망루는 70년대 초까지 사진 배경으로 등장한다.
아직 전화기가 대중화되지 않은 시절, 소방대원은 24시간 높게 솟은 망루에 올라가
망원경이나 육안으로 검은 연기를 발견해 서둘러 출동해야 했다.
1896년 인천 최초의 근대식 소방대인 인천소방조(仁川消防組)가 신생동에 발족했다.
1919년 12월 12일 인천소방조 청사를 지금의 인천여상 정문 자리에 신축했다.
앨범에 등장하는 이 망루는 신생동소방파출소 소관이었다.
98년 1월 8일 신생동소방소는 폐소되었고 그해 8월 26일 건물마저 헐리고 만다.
소방망루는 훨씬 전에 먼저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인천 문화의 요람, 강당(1960)
이 학교의 강당은 인천 ‘예술의 전당’이었다.
1958년 미군의 원조자재에 힘입어 당시 보기 드물게 음향과 조명시설을 갖췄다.
인천에 특별한 문화 공간이 없던 시절, 이 강당에서 각종 문화 행사와 실내경기 등이 자주 열렸다.
KBS교향악단 연주회,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보풍의 연주 등을 비롯해
오제도 검사의 시국 강연회, 전국주산대회, 전국체전 레슬링대회 등이 열렸다.
심지어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대회도 열려 시민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사진은 1960년 강당에서 당시 인기 만화였던 ‘고바우’ 영화를 상영하는 모습.
자매도시 장병 위문공연(1963)
현재 인천시의 자매결연도시는 20개, 우호결연도시는 14개다.
첫 번째 자매도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시. 양 도시는 1961년 12월 18일 정식으로 자매결연서에 서명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인천시는 이듬해 5월 버뱅크 출신 주한미군 7명을 초청해 리셉션을 베풀었고
7월 미국 LA 인근 롱비치에서 열린 세계미인선발대회에 참가한 미스코리아 손양자 편에 인천시장의 선물을 전달하는 등 친선교류에 힘썼다.
사진은 1963년 인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중 버뱅크시 출신 장병을 학교로 초청해 위문 공연을 한 후의 기념사진이다.
취업 최고 스펙, 주산(1963)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판은 필수 사무용품이었다.
1950년대 상업학교에서 주산은 의무 교육이었고 60년대 초·중학교에서는 특기교육과정이 되었다.
한창 때는 전국 10여 개 공장에서 생산하는 주판이 한 해에 10만 개씩 팔리기도 했다.
골목마다 주산학원이 들어섰고 아이들은 한글과 구구단을 깨치기 전에 조기교육으로 주산을 배웠다.
주산자격증은 확실한 ‘취업보증서’였다.
인천여상 강당은 주산대회 단골 장소였다. 전국주산대회와 기능시험 등이 이곳에서 자주 열렸다.
연오정과 석정루(1964)
1964년 멋진 앨범 촬영을 위해 여고생들은 교정을 벗어나 자유공원으로 향했다.
자유공원은 당시 인천을 넘어 한국에서 가장 ‘핫’한 곳 중 하나였다.
여고생들은 육각형 단층 정자 ‘연오정(然吾亭)’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이 정자는 송현동 100번지에 살던 조길 씨가 그의 부친인 독립운동가 조훈 선생이 생존 시 당부한 뜻을 받들어
1960년 8월 350만환의 공사비로 건축했다. 사
람들은 이곳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장구 장단에 맞춰 소리를 하며 풍류를 자주 즐겼다.
여고생들 뒤편으로 공사 중인 건축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2층 누각 석정루(石汀樓)다.
목재업과 조선소로 큰돈을 벌었던 이후선 사장이 30여 년간 자유공원을 산책하며 건강을 지켜온 데 대한 보은으로 석정루를 짓는 중이다.
출생지가 월미도였던 그는 고향 월미도가 보이는 공원 서쪽 언덕바지를 누각의 위치로 정했다.
1966년 완공해 인천시에 기증했다. 당대 이름을 떨친 서예가 박세림 선생이 현판 글씨를 썼다.
60년대 초반 남파 간첩들은 제집 드나들 듯 한국에서 활동했다. 62년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간첩 규탄대회.
. 인천여상의 합창부는 73년 전국콩쿠르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고교 합창계의 강자였다.
이것은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선생이 이 학교 음악교사로 한동안 재직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인천여상 교가도 작곡했다(1959).
인천여상과 바다는 아주 가까웠다. 교실에서 보면 도크(1부두)는 코앞이다(1959).
얼마 전 동방극장 건물이 완전히 사라져 주차장이 되었다.
외화개봉관으로 유명했던 동방극장의 귀한 사진이 앨범 구석에 실려 있다(1959).
재일교포들은 북한의 꾐에 빠져 북송선을 많이 탔다.
지금의 답동사거리에서 열린 북송 반대 규탄대회에 참가한 인천여상(1960).
송도유원지는 소풍 단골 장소였다.
도시락을 까먹은 후 야외음악당에 모여 반별 장기 자랑을 했다.
이 날 예상 못한 ‘스타’가 꼭 탄생하곤 했다(1972).
광복 직전 어느 일본 여인이 신사에 석등을 기증했다.
광복 후 학교가 들어서면서 흩어진 석등을 모아 재조립해 학교 조경에 사용했다(1962).
1945~2015, 그 칠십 년 이야기
인천여상은 해방둥이다. 1945년 4월 12일 한국인 25명, 일본인 25명 총 50명으로 개교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광복을 맞음으로써 절반을 차지한 일본인 학생 25명이 귀국하였고 학교는 일시 휴교에 들어갔다.
이후 학교를 재정비하고 공부할 만하니까 이번엔 전쟁이 터졌다.
뿔뿔이 흩어진 학생들을 모아 수업을 재개하던 중 학제가 변경돼 1951년 일부 학생(6년제, 4년제)이 인천여자상업중학교,
나머지(3년제)는 월미여중의 첫 졸업생으로 배출되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1955년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3년제) 135명이 첫 입학생으로 들어왔다.
58년 3월 112명의 졸업생이 처음으로 배출된 이래 지난해 2월까지 3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동안 경기도(인천 포함) 내 최고 명문 상업학교로서 입지를 굳히며 매년 서울, 경기 등에서도 적지 않은 학생이 지원해왔다.
이러한 숱한 이야기들이 ‘인천여상 칠십년사’의 페이지마다 담겨 있다.
이 책은 이 학교 국어교사인 최금희 편찬위원이 인천여상 40년사, 동창회 자료, 지역 신문, 지역향토사 등을 1년여 동안 조사, 수집해 엮었다.
최 교사의 어머니는 인천여상 3회 졸업생이다. 그 운명적 인연으로 더 애정을 갖고 심혈을 기울여 칠십년사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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