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12월12일 흥남철수 본문
오늘(1950년 12월 12일)은 6·25전쟁중 개마고원일대에서 사투를 벌이며 고전을 하던 미군의 `흥남 철수`가 시작됀 날 입니다.
`흥남 철수`는 이날부터 24일까지 북한의 함흥에있는 흥남부두에서 12일간 벌어진 미군의 철수작전을 말합니다.
한반도의 지붕 이라 불리우는 개마고원은 함경남도 삼수, 갑산, 풍산, 장진군의 북부에 있는 높이 2,000미터 안팎의 고지대 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여진족의 땅 이엇던 개마고원을 조선의 세종대왕은 북방정책(4군6진)으로 다시 찾은후에
이곳에 남부 지방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고 합니다
이곳으로 강제이주를 온 사람들은 화전을 일구어 연명을 해야하는 고된삶을 살아야 했읍니다
저희들이 초등학생 시절이었던 60년대에 듣고 배웠던 북한의 아오지탄광처럼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가기 싫어하는곳을 이야기할때 "삼수 갑산" 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는 개마고원으로 이주한 백성들의 곤궁한 모습에서 나온말 이리라는 저의 생각 입니다
실제로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원산에 상륙한 미국 1해병사단은 당시 북한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기 위한 진격중
개마고원에 있는 장진호전투에서 12만명 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에 빠지기도 했었읍니다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진행된 장진호전투에서
미 해병 1만 5000명 중 4500여 명이 전사하고 7500여 명이 부상했을 정도로 희생이 컸다고 하는데
이는 지구촌 여러곳에서 치른 미군의 전사(戰史)에 "가장 고전을 했던 전투"로 기록되어있고
그해 타임지는 표지에 "가장 참혹한 전투"라는 제목을 실으며 장잔호전투에서 미군이 당한 패전의 아픔을 소개 했다고 합니다
(중공군)중화인민공화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후퇴를 해야하는 북동부전선의 미군은
막혀버린 육로를 포기하고 함흥의 흥남부두에서 해상철수(흥남철수)를 하게 됩니다
12월 12일부터 시작된 흥남철수작전의 마지막날이었던 12월 23일
흥남부두에서 후퇴하는 미군을 기다리고있던 마지막배였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23일 피란민 1만 4000명을 태워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해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우게 되는데
빅토리호는 2004년에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돼기도 합니다.
흥남철수와 메르디스 빅토리호
1950년 12월 12일,
1950년 12월 12일 6·25전쟁이 한창이던 이날 이른바 `흥남 철수`가 시작됐다.
6·25전쟁사에 기록된 `흥남 철수`는 이날부터 24일까지 흥남에서 12일간 벌어진 당시 최대규모의 철수작전을 말한다.
시작은 1950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총공세를 펴기로 하고 15,000명의 미 해병 1사단을 원산에 상륙시켰다.
이 부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 북진 끝에
11월 하순, 함흥 북쪽의 개마고원에 있는 장진호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중공군은 이미 10월 하순 한반도에 들어와 있었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역인 장진호에도 중공군 4개 사단 12만여명이 포진해 있었다.
미군이 중공군에 포위돼 공격을 받자 유엔사령부는 철수를 명령, 11월말 1사단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이 장진호 전투(Chosin Reservoir Battle·`초신`은 장진의 일본식 표기)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양쪽에서 발생했다.
미군측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만 중공군 25,000명, 미군 3000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탈출한 병사들은 흥남까지 철수했고, 연합군이 진격할 때 환영했던 민간인들까지 뒤섞여 흥남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흥남항에서 미 해병 1사단을 포함한 10만5000명의 지상군과 10만 여명의 피란민,
1만7500대의 각종 차량과 35만t에 달하는 군수물자를 193척의 군함으로 남쪽으로 탈출시킨 과정이 `흥남철수`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때 후송하지 못한 200t의 탄약과 같은 양의 폭약, 500개의 포탄, 200드럼의 유류는 최종철수 때 항만과 함께 폭파됐다.
UN군과 피난민 14,000명을 태우고 철수 후 흥남부두와 군수물자 폭파
흥남철수 당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 구조를 성공시킨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의 레너드 라루 선장과 47명의 선원 이야기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 22일 흥남부두(흥남항)로 갔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되었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부두에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의 군대는 이미 철수했고 피난민의 철수도 마무리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었다.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해안에 남아 있던 14,000명의 피난민 모두가 승선할 때까지 포화가 쏟아지고 있는 항구에 정박해서 마지막 한 명까지 승선시켰다.
당시 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는 “선장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 모두를 한명도 빠짐없이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14,000명 모두가 승선할 수 있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고, 적이 공격하는 와중이었지만 희생자는 한명도 없었다.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줬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다.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라루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12월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
위의 글상자속의 글 중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12월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에서
자신의 부모님께서 한국전쟁중 흥남철수때 빅토리호를 타고 피난을 오셨다고 이야기하는
거제도 출신 문제인 대통령을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