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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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배꼽산

매루 2017. 3. 27. 20:50




 

학(鶴 : 두루미)은 천년을 장수하는 영물로 신선이 타고 다니는 새로 알려져 있는데 

문학산 주변에는 문학(文學洞),선학(仙鶴洞),청학(靑鶴洞),학익(鶴翼洞)등 학(鶴)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고

연년익수 (壽 : 수명 더욱더 길게 늘여 나감)의 줄임말인 연수(延壽)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연수동(延壽洞) 이 있는걸로 봐서 

문학산 일대가 사람들의 장수가 보장되는  자연환경이 무척 좋은곳 이었음을 알수 있겠지요

하지만 문학산 주변에는 일제 강점기때부터 각종 산업시설과 주택들이 들어서고,

근래에는 고속도로를 비롯하여 터널및 거미줄같은 도로들과 

월드컵경기장 야구장 수영장등의 각종  경기장등이 건설되면서 지형이 크게 바뀌었지만

계양산의 부평, 마니산의 강화와 함께  문학산은 인천의 진산으로  인천도호부와 향교가 있는  원인천으로 인천의 발상지라 하겠읍니다



 문학산은 40대 이후의 인천출신들 에게는 배꼽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산  이지요 

학익동의 소년형무소(지금의 법원) 근처에서 태어난 제 개인적으로 배꼽산은 추억이 무척 많은 산 입니다

봄이오면 동네형들과 칡뿌리를 캐러 무지무지하게 높았던 소년형무소 담장옆 길을 따라 문학산엘 다녔고

민둥산 이던 시절 이어서 진달래꽃이 피면 온산이 붉은색으로  불붙은듯했고

진달래꽃이 지고 신록의 계절이 오면 때까치라는 이름의 새둥지를 찾아 다니며 새끼 때까치들을  집에 가져다 키우기도 했으며

가을이면 지금의 향교앞 논에서 벼메뚜기를 잡기도했던 추억이 매우 많은 동네 입니다 


지난 일요일(2017년 3월 26일)에 문학산에서는 용현초등학교 총동문들의 시산제가 있었읍니다

시산제에 참석하면서 배꼽산에 대한 추억들이 많이 떠올랐었읍니다


아래사진들은 네이버 블로그<인천의 어제와 오늘에서 빌려온 사진들 입니다



1950년대로 추정하는 문학산 꼭데기에 있던 봉화대 사진 입니다

문학산이 왜 배꼽산이라 불리우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따로 설명이 필요없음을 보여주는 사진 입니다

 

이 봉화대는 1960년대에 산 꼭데기 부위를 평탄하게 깎아낸후  레이더기지가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원래의 높이가 233m였던 문학산은 217m로 낮아 지게되 그때 배꼽도 없어져 버립니다






문학산에 있었던 미군부대가 보이는 1960년대 전반으로 추정되는 시기의 사진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사진을 볼때마다 분노가 일곤 합니다

산꼭데기에 있던 유물(봉화대)을 밀어버린것도 부족하여 산꼭데기의 토사들을 산아래로 그냥 흘려 버린겁니다







결핵요양소(지금의 적십자병원)이 보이는 1954년 항공사진입니다.

산꼭데기가 깎이기전의 문학산 모습이 보이는 사진 이지요

지금은 남동공단이 된 바둑판 모양의 염전이 보이고

영전 위에 (사진 정가운데)결핵요양소가 보입니다

사진위의 바다에 여러개의 섬들이 보이는데 오른쪽에 송도 유원지와 아암도가 보이고

오른쪽에 월미도가 보이고 낙섬과 낙섬에 딸려있던 작은섬 두개(저희들 어렸을적에는 똥섬 이라 불렀읍니다)의 모습이 반갑습니다

사진 오른쪽 위에 흰직선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길이 SK에서 학익동까지 뻗은 (인하대학교 앞)길 입니다

 문학산 왼쪽에 송도역에서 선학동으로 가는 길과

인천청춘남녀들의 데이트장소였던 옛수인선 철로가 염전 뚝방에 보입니다








Monika Martin - Ein Kleines Gluck(하나의 작은 행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