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부평 나환자촌과 신명 보육원 본문
구월동 양계단지 시절의 동생들과 세퍼트<루씨>
제가 고등학교 1학년때인 1970년도에 저희가족은 당시로서는 시골이라 할수있었던
구월동(지금의 상인천 중학교 부근)의 육계(지금의 하림에서 키우는 닭)단지로 이사를 옵니다
한국전쟁때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오셔서 결혼을 하신 저희 부모님들 이셨기에
친척 이라고는 지금의 삼능(인천 지하철 동수역 부근)의 고모님댁(성동학교)과
신촌(백운역 부근)미군부대에 근무를 하시던 이모님 한분 뿐 이었읍니다
친척들께서 살고 게시는곳과 가까운 거리의 집으로 이사를 온것 이지요
그러다보니 고모님댁과 이모님댁으로 심부르을 다닐일이 생겼고
그심부름은 나이어린 동생들 보다는 당시 고교생 이었던 저의 몫으로 돌아왔읍니다
버스요금도 부담스럽던 시절기도 했지만 그때 저희집에는 <루씨>라는 이름의 독일산 세퍼트가 있었기 때문에
루씨와 함께 만월산을 넘어서 부평삼거리를 지나 신촌이나 삼능까지 걸어 다녔읍니다
구월동에서 부평엘 갈수있는길은 석천입구(지금의 간석 오거리)까지 나와서 경인국도의 원퉁이고개를 넘는길이 첫번째이고
구월동에서 석천입구까지 가질않고 간석시장 근처에서 약사사쪽 시골길을 걸어 약사사경내를 지나는 산길을 지나
부평삼거리에 이르는 길이 두번째 길 이었으며
세번째 길은 지금의 만월터널 부근 부평농장(경인농장 이라고도 함)을 지나서 부평삼거리에 이르는 길 이었읍니다
이 세가지 길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길이 부평농장을 지나가는 길 이었는데
당시 부평농장은 나병환자들이 모여서 알 낳는 닭을 기르던 양계단지 였읍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루씨>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가까운 길 일지라도 이길은 선택을 할수 없었을 만큼
나병환자들이 모여살던 인천의 외진 골짜기 동네로서 고교생인 저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길 이었읍니다
한하운은 1949년 12월 30일 밤,
환자 70여 명을 이끌고 부평공동묘지(인천가족공원)골짜기로 들어왔다.
고개 너머 묻힌 망자(亡者)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였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치료 후 음성 판정을 받은 그들은 ‘사람 사는 곳’ 십정동과 청천동으로 이주했다.
그들의 첫 정착지였던 나환자촌은 후에 중소 공장 단지(경인농장)로 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하운은 한센병자의 자식들을 위해 1952년 산 너머 경인가도 변에 신명보육원을 창설했다.
아이가 보고 싶은 부모와 부모 품이 그리운 아이들이
해가 지면 산을 돌아 넘어와 보육원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몰래 만났다
2012년 11월 12
2012년 11월 만월산에서 바라본 경인농장
인천의 시인 한하운(韓何雲) 40주기를 맞아…
홍미영 인천광역시 부평구청장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故鄕 그리워/ 피-ㄹ 닐니리,보리피리 불며/ 꽃 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2월 28일은 한센 병(나병) 시인 한하운(韓何雲)의 40주기다. 그는 1975년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산 39번지에서 눈을 감았다.앞의 글 ‘보리피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한 시다.
한국을 대표하는 고은(高銀) 시인이 한하운의 글을 읽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은 문단에 널리 알려진 일화다.
1919년 함경도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나병(癩病) 환자이며 나병 퇴치 운동가 한하운은
1950년 한센 병(문둥병) 환자 600여 명과 함께 부평공동묘지 인근으로 이주,
성계원이란 나환자요양소를 만들어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성계원 자치회장, 대한한센총연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나병 퇴치 및 구제 운동에 앞장섰다.
성계원은 이후 국립부평(나)병원으로 바뀌었고, 1968년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에 국립나병원이 신설되면서 폐지됐다.
성계원의 흔적은 아직도 청천농장, 경인농장 등의 명칭으로 부평지역에 남아 있다.
한하운이 세운 신명고아원이 현 십정동 신명재단의 모태다.
현재도 서울에서는 한하운 시인을 기념하기 위한 ‘한하운 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으며, ‘한하운 문학상’이 수여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평에 한하운의 시비(詩碑)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아 민선 부평구청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표 시비는 전라도 소록도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가 경기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인연으로 잠시 머무른 수원시 세류3동 수원천변에도 지난 2011년에 시비가 만들어졌다.
수원에 설치된 시비에는 “경기도청 등에 재직 중 나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함남 함주)에서 치료하다가
1948년에 월남, 1949년 세류동의 정착촌인 하천가에서 살았다.
1950년 부평에 있는 나환자촌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기록돼 있다.
이 시비를 만든 ‘세류3동 좋은마을만들기협의회’는
“수원천변에서 머물다간 시인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보리피리’ 시비를 세운다”고 적어 놓았다.
한하운이 인천에서 산 25년에 비하면 수원 거주 1년은 말 그대로 머물다간 정도다.
그럼에도 부평엔 그의 흔적이 크게 남아 있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한하운의 글에 그 답 하나가 담겨 있다.
“우선 부평은 이 지방민의 반대가 없을 것이라 믿고 불모의 산협이지만 우리가 무슨 선택의 자유가 있을까……
우리들의 마지막 안식처로서 택하기로 하였다.(한하운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 중)”
불청객인 문둥병 환자 수백 명을 이끌고 갑자기 인천을 찾아왔으니 주민들은 그가 반갑지 않았을 것이고,
아직까지 나병은 무조건 전염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바로 잡히지 않았기에
시인 한하운을 기억하기보다 문둥이 한하운을 지우고 싶지 않았을까?
그가 ‘驪歌(여가)’에서 노래했듯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 寒食(한식)에 素服(소복)이 통곡할 때에/
/ 富平(부평) 성계원에 진달래 피면/ 이 세상 울고 온 문둥이는 목쉬어./
/ -중략-
앞날이 없는 문둥이는/ 돌아서 돌아서면서 무너지는 가슴에/
다시는 뵈울 수 없는 것은/ 다신 뵈울 수 없는 것은/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처럼
우리가 한하운 시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닌지 자성해 봐야한다.
하지만 한하운은 2013년 ‘지식을만드는지식’이 펴낸 ‘한하운 시선’에 수록된 친필 유고 ‘부평 지역 청년단체연합회에 부친다’에서
“부평 평야는 우리의 넓은 마음으로/
높솟은 계양산은 우리의 이상으로 하늘에 닿고/
한강이 銀龍(은룡)으로 굽이치고/
강화, 영종섬이/ 관악산이 남한산이 북한산 산들이/ 부평을 품안고/
/ 선인들의 옛 읍터가/ 한촌 어느 변두리처럼/ 부평이 어찌 인천의 변두리인가?//”라며
부평에 무궁한 애정을 보내며 인천사람으로 살기위해 우리에게 다가오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었다.
한하운은 1959년 나병 음성 판정을 받고 사회로 복귀했으며, 1975년 나병이 아닌 간경화증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죽어서 인천에 묻히지 못하고 경기도 김포 현 김포공원묘지에 유택을 마련,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인천시가 2014년 시인 한하운을 인천의 인물로 선정했다고 하나 아직 기념물 하나 세워져 있지 않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한하운 시인이 돌아가신지 40년을 맞아 뒤늦게나마 그를 위한 詩碑라도 하나 세워,
한 작가의 작품 세계와 나병 퇴치 운동 역사를 기록해 줄 것을 지역 사회에 제안한다.
부평구도 노력을 아끼지 않겠지만
관(官) 주도가 아니라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주민들이 앞장 서 인천의 인물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길 기대해 본다.
(2016.2.19. 경인일보 오피니언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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