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인천인구 300만 본문
2016년 10월19일 오후 1시를 기하여 내고장 인천의 인구가 300만13명을 기록하며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서울,부산에 이어 3번째로 인구 300만의 대도시가 되었읍니다
도시의 인구가 300만명이 넘는곳은 지구상에서도 68개 도시에 불과하며
오는 11월말에 새로운 토지(매립지)가 등록이되면 인천시의 총면적은 1,062km²가 되어
울산(1,061km²)를 제치고 대한민국의 특별시와 광역시들 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도시가 되기도 합니다
인구 300만의 대도시에 걸맞게 인천의 GRDP(지역내 총생산) 69조5천억원(2014년 기준)은
미얀마(649억 달러)나 과테말라(638억 달러)의 GDP(국내 총생산량)와 맞먹는 규모 입니다
내고장 인천이 인천이라는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 10월 15일) 이라고 합니다
인천시민의 날이 10월 15일 인것이 이날을 기념해 10월 15일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지난 2013년은 내고장 인천이 인천 이라는 이름으로 정해진지 600주년이 되는해 이었읍니다
제물포 개항(1883년)후 인천에는 외국인들이 들어오기 시작을 하였고
1910년 당시에는 인천의 전체인구 3만3천명중 조선인은 14,820명이고 일본인이 13,000명 기타 70명 이었으며
농업국가였던 당시의 조선에서 인천은 출신지역과 신분이나 계급(양반 상놈등)을 차별받지않는
등대,부두, 세관, 철도, 우체국, 정미소, 염전등의 새로운 일자리가 넘쳐 나면서 조선팔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 했고
해방직전인 1944년 21만 3천명 이라는 큰도시로 발전을 합니다
한국전쟁중 북한 피난민들이 전쟁이 끝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요량으로 자신들의 고향과 가까운 이곳 인천으로 유입 되면서
남북분단후인 1955년에 인천의 인구는 31만 7천 967명으로 늘어 납니다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외지인들이 인천으로 유입이 되면서
1960년에 인천의 인구는 40만 돌파하고 제가 초등학교 6학년(1966년) 사회생활 수업때 인천의 인구를 70만으로 배웠고
인천의 인구가 100만명을 넘던 1979년에 부산의 인구는 300만명 이었고 대구는 157만명 이었읍니다
1981년도에 경기도에서 떨어져나와 직할시로 승격을 하기전까지 인천은 경기도의 사회,정치,경제,문화등의 중심지 였읍니다
외람된 이야기 이지만(인천이 경기도에 속해 있던때에) 수원을 비롯한 경기도내의 초등학생들이
인천에있는 명문중학교의 입학시험에 응시를 한다는것은 큰 모험 이었을 정도로
인천은 전국 에서도 알아주는 높은수준의 학력도시 였읍니다
일례로 저와 초등학교 동창사이인 오세우동문(인천중학교~제물포 고등학교)의 고교동창 모임 에서는
고교시절에 공부를 안해서 서울대학교는 못가고 연세대학교에 갈수밖에 없었다는 농담이 아닌 농담들을 할 정도 입니다
오세우 동문 역시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인문학계열의 진학을 포기하고 연세대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읍니다
만일 오세우동문이 법대를 비롯한 인문학이나 사회계열을 전공한후 정치계에서 활약을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습니다
이렇게 사회,지리,인적 잠재성이 풍부했던 인천은 1981년도에 직할시로 승격을 한후 1992년에 200만명을 돌파 합니다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외지인들이 인천으로 몰려 오면서
인천은 다양한 지역 출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되었는데
인천 토박이(80만~100만명으로 추산)와
충북·충남 180만명, 호남 100만명, 이북5도 65만명, 경북·경남 40만명, 강원 20만명(재인 향우회의 자체추산)이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주거문제(집값,서울과 가까운 교통등)등으로 서울과 경기도에서 인천으로 전입하는 경우가 늘기 시작을 하였읍니다.
한국전쟁후 인천의 끄트머리 바닷가 염전지역 주변인 용현동에 모여 살았던 북한 피난민(주로 황해도지역)들,,,,
그분들의 2세들은 베이비 부머(baby boomer)세대들 인천 토박이로서 인천의 모든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하였고
그들중 일부는 이제는 환갑을 지났거나 앞둔 고령자들이 되어있읍니다
참고 : 우리나라의 베이비붐 세대는 6·25 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로
이들은 고도 경제성장과 1997년 외환위기, 그리고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를 경험했습니다
연안부두 - 김 트리오